“이 빌어먹을 재산.”
8천만부의 판매고를 올린 베스트셀러 미스터리 작가 할란 트롬비는 뇌까린다. 자택에서 자녀와 손자, 손녀를 초대해 85살 생일 축하연을 연 할란은 이튿날 아침 서재에서 경동맥이 정확히 벤 시체로 발견된다. 그의 죽음은 보이는 대로 자살일까? 경찰의 일대일 탐문이 시작되면 관객은 파티에 참석한 가족 여럿이 그날 밤 가장에게 원하는 바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둘째 며느리 조니는 딸의 학비 송금을 재촉했고 막내아들 월트는 아버지의 소설 판권을 넷플릭스에 팔자고 졸랐다. 손자 랜섬과 사위 리처드는 다른 이유로 할란에게 언성을 높였다. 게다가 아버지도 자식들에게 별러온 용건이 있었다. 생일잔치는 할란에게 한눈파는 사위, 철없이 방탕한 손자, 이중 생활비를 청구한 며느리, 독립 의지를 잃은 아들에게 최후통첩 디데이였다. 혈연 외에 저택을 자유롭게 출입한 인물은 가정부 프랜과 할란의 간병인 마르타. 히스패닉계 불법 이민자 어머니를 둔 젊은 마르타는, 세대차와 직분을 넘어 지혜롭고 외로운 노인의 고민을 나눈 친구였다. 거짓말을 하면 반드시 구토를 하는 증세를 지닌 마르타는, 익명의 의뢰를 받고 저택에 당도한 사립 탐정 브누아 블랑에게 용의자의 일원이자 조수가 된다.
<나이브스 아웃>은 애거사 크리스티, 엘러리 퀸, S. S. 반 다인, 존 딕슨카 등 20세기 정통파 추리작가들이 쓴, 제한된 공간에서 발생한 용의자 많은 살인 미스터리의 계보에 속한다. 우리가 유년기에 즐겨 읽은 이 소설들에서 자주 보는 상황은 다음과 같다. 방 많은 저택이 범죄 현장이라 용의자들은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머물고, 탐정도 예외는 아니다. 성실하고 상식적인 경찰의 조력을 받는 비범한 사립 탐정은 여송연이나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송로버섯을 찾는 돼지처럼 물증과 인간성에 관한 후각을 뽐낸다. 길어진 수사 과정 중 용의자 사이에 숨겨진 과거가 드러나는가 하면 추가 살인이 발생해 첫 살인의 추리를 수정하기도 한다.
(다음 단락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편집자)
라이언 존슨 감독이 직접 오리지널 각본을 쓴 <나이브스 아웃>이 범인찾기 미스터리(일명 ‘후더닛’)로서 지닌 각별함은, 비교적 일찍 죽음의 정황을 관객에게 드러내고 나서도 긴장을 유지하며 나머지 러닝타임을 끌고 간다는 데에 있다. 심지어 용의자가 명탐정에게 꼬리를 밟힐까봐 마음 졸이게 된다. 히치콕은 범인 찾기에 중점을 둔 서사는 재미없는 미스터리영화를 만든다고 했다. 라이언 존슨은 후더닛을 영화의 전체 틀로 삼되 비밀의 절반을 초반에 밝히고 결론까지 이르는 경로를 작은 단위의 서스펜스로 채우는 전략을 택했다. 장르의 상투적 장치들은 모두 제자리에 있지만 그것들은 모퉁이마다 예기치 못한 전개를 끌어낸다. <나이브스 아웃>이 끝내 찾아내는 것은 진범을 넘어 할란 트롬비의 죽음에 내포된 목적과 의미다. 이는 피살자인 할란 트롬비 본인이 이 사건의 일부 플롯을 짠 작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지혜로운 백인 남성들이 선한 젊은이를 보호해주는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나이브스 아웃>의 진정한 주인공은 극중에서 경제적, 문화적 외부자인 마르타이다. 이 인물의 총명함과 인간적 품위는 칭찬받을 만한 미덕을 넘어 최상의 무기로 기능한다. 누군가가 매일 주사하는 약과 모르핀 병 라벨을 고의적으로 바꿔놓아도 성실하고 숙련된 간병인 마르타는 감각으로 맞는 약물을 고른다. 영화 후반, 미국에서 추방될 위기를 앞에 두고도 마르타는 죽어가는 타인부터 구하는 도리를 택한다. 이 모든 마르타의 예기치 못한 선택은, 상대가 놓은 덫의 의표를 찌른다. 거짓말에 신체적 거부반응을 보이는 마르타의 증세는 인물의 타고난 성품을 표현하는 수단이자 나중에는 허허실실 게임의 도구로도 이용된다. 쟁쟁한 스타 앙상블 사이에서 실제적 주인공 역을 감당하는 아나 데 아르마스의 캐릭터는, 이 배우가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 맡았던 홀로그램 여자 친구 조이 역과 대조적이며 훨씬 더 흥미롭다.
올해의 베스트 미국영화로 거론되는 이유
소년 시절부터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 <나일강의 죽음> <거울 살인사건> 같은 애거사 크리스티 원작 각색영화와 안젤라 랜스버리 주연의 시리즈 <제시카의 추리 극장>, <형사 콜롬보>의 팬이었던 존슨은 10년 전부터 <나이브스 아웃>을 구상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라이언 존슨이 장르에 접근하는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이하 <라스트 제다이>, 2017)의 감독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전부터 라이언 존슨은 전통적 장르와 서사 공식을 현대로 끌어오기를 즐겼다. 조셉 고든 레빗 주연의 <브릭>(2005)은 필름누아르를 21세기 미국 고등학교로 옮겨온 영화였다. 주인공이 전 여자 친구의 행방을 찾아 10대들 사이에 침투한 범죄조직을 탐색하고 다니는 이 이야기에서 틴에이저들은 1940년대 누아르의 인물 같은 말투로 대화한다. “배경을 현대 고등학교로 설정함으로써 관객은 영화를 처음부터 익숙한 누아르의 상자에 넣어버리지 않고 예민하게 영화를 따라간다. 그러다보면 오히려 장르의 본질적 쾌락을 깨닫게 된다”라는 게 감독의 견해다. <루퍼>(2012) 역시 영화가 수없이 활용한 시간여행 모티브를 참신하게 해석한 시도였고, <라스트 제다이>는 거의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은 사상 최대 프랜차이즈의 골격을 유지하면서, 동시대 이슈와 리더십의 새로운 조건을 이야기 중심으로 끌어들인 모험이었다.
얼핏 복고적 엔터테인먼트로 보이는 <나이브스 아웃>도 연장선상에 있다. “애거사 크리스티는 정치적 입장이 선명한 작가는 아니었지만 등장인물의 묘사를 통해 당대 영국 사회의 인간형과 사회적 풍경을 충분히 그려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장르를 갖고 동일한 작업을 해서는 안될 이유가 있을까?” 라이언 존슨은 트롬비 가족과 마르타의 관계를 통해, 트럼프 시대 미국 사회의 풍속화를 그린다. 교양 있는 시민임을 자부하는 트롬비 가문 사람들은 마르타가 가족이나 다름없다고 입 모아 말하지만, 마르타의 고국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에콰도르, 파라과이, 심지어 언어가 다른 브라질이라고 각자 확신한다. 지식인을 자처하는 월트는 마르타를 보호해주겠다고 공언하지만 유언장 내용이 밝혀져 마르타의 지위가 달라지자 태도가 표변한다. 요컨대 이 집에서 마르타는 동등하기 전까지만 환대받는다. <나이브스 아웃>은 동시에 트럼프 대통령이 주장하는 자수성가 신화와 미국의 주인은 개척자 백인의 후예이며 나머지는 공짜 승객이라는 편견에 표창을 날린다. 할란 트롬비의 자식들은 저마다 바닥부터 성공했다고 진술하지만 실상은 아버지에게 출발을 빚졌고 현재 생활비도 의지한다. 그나마 부동산 사업가로 자립한 맏딸 린다도 할란의 돈 100만달러를 종잣돈 삼아 창업했다고 다른 인물이 증언한다. 린다라는 캐릭터는 맨손으로 성공했다고 외치는 부동산 재벌 트럼프에게 직접적으로 던지는 반론이다. “이 저택은 선조들이 살아온 우리 집이야!”라는 누군가의 외침에 탐정은 야무지게 바로잡는다. “이 집은 댁의 할아버지가 1988년에 파키스탄 사업가한테서 매입했습니다만?” 백인 상류층 트롬비 가족이 고집하는 대로 개인의 능력이 미국에서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유일한 심급이라면, 마르타야말로 가장 유능하고 성실한 개인이다. <나이브스 아웃>의 발단도 따지고 보면 상속재산이 자손을 망쳐놓았다고 판단하고 사태를 바로잡으려고 한 할란 트롬비의 결단이다. 트롬비 가족의 정치적 스펙트럼은 넓다. 10대 제이콥은 별명이 ‘어린 나치’고 리처드는 이민을 혐오하는 반면 조니 모녀는 진보주의자를 자처한다. 라이언 존슨은 그러나 대외적 이데올로기가 무엇이건 간에 그것이 좋은 인간이냐 아니냐를 좌우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백히 한다. 뒤통수를 치는 유언장 앞에서 가족들의 정치적 신념은 어떤 차이도 만들지 않는다. 좋은 인간이기 위해서는 당신이 좋은 인간이어야 하고 다른 길은 없다고 영화는 마르타를 빌려 말한다.
그럼에도 올해 토론토국제영화제 최초 공개 이후 개봉한 지금까지 <나이브스 아웃>에 미국 평단과 관객이 열광하는 첫 번째 이유는 사회적 메시지가 아니다. 원작도 브랜드도 없는 순수 창작 시나리오로 치밀하게 완성된 장르영화를 향한 목마름이다. 캐릭터와 ‘유니버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극장의 어둠 속에 앉아 마주하는 놀라움과 쾌감이 얼마 만이냐는 감격이 <나이브스 아웃>을 2019년 최고의 미국영화 중 한편으로 밀어올리고 있다.
●<나이브스 아웃>의 프로덕션 디자인과 의상 - <기생충>과 더불어 ‘올해의 집’ 후보
고풍스러운 적갈색 벽돌 저택 앞으로 검은 개 두 마리가 낙엽을 밟으며 달린다. <다운튼 애비>의 오프닝 같다. 그러나 연대 불명의 실내장식을 둘러보던 카메라는 “내 집, 내 규칙, 내 커피”라고 쓰인 머그컵에서 멈춰 지금부터 시작되는 영화가 현대의 이야기임을 확인시킨다. <나이브스 아웃>에서 대부분의 사건이 일어나는 트롬비 저택은 <기생충>의 두 집과 더불어 2019년 영화 속 가장 의미심장한 주택으로 회자되는 중이다. 라이언 존슨 감독과 데이비드 크랭크 프로덕션 디자이너는 보스턴 외곽에 있는 1890년대 주택에서 트롬비 본가의 외관을, <셔터 아일랜드>에도 등장하는 매사추세츠주 에임스 맨션에서 내부를 촬영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시체가 발견되는 서재와 연결 복도는 세트로 지었다. 데이비드 크랭크는 폴 토머스 앤더슨, 스티븐 스필버그, 테렌스 맬릭 감독의 영화에 참여한 미술감독으로 <데어 윌 비 블러드>(2007)의 석유 부호 대니얼 플레인뷰(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집, <링컨>(2012)의 워싱턴 풍경 등이 그의 손을 거쳤다. 범죄 소설가의 머릿속을 반영한 가구와 장식품으로 실내를 채우기 위해 세트 데커레이터들은 앤티크 수집가 등을 접촉해, 괴기스러운 돌 하우스와 태엽 감는 인형, 골동품 등을 모아들였다. 서재를 담당한 세트 장식가 제레미 우다드는 집주인이 30개 언어로 번역된 베스트셀러 작가임을 감안해 가상의 저서 표지를 개정판까지 포함해 10년 단위로 일일이 디자인했다고 한다. 미스터리 장르의 특색과 올스타 캐스팅, 고양된 연기 스타일과 어울리도록 미술도 과잉의 미학을 택했다. 특히 수 많은 단도를 동심원 형태로 디스플레이한 거실 장식은, 식구들이 한 사람씩 탐문을 받는 단독 숏에서 용의자의 머리를 둘러싸는 후광 노릇을 할 뿐 아니라 공교롭게도 “도넛처럼 가운데가 빈” 사건의 양상까지 표현한다. 라이언 존슨 감독은 촬영 후 칼 장식을 집에 가져가고 싶었으나 단검의 반수 이상이 빌린 물건이라 포기했다고 한다.
의상 디자이너 제니 이건은 모든 앙상블 영화의 의상 담당자가 그렇듯, 인물의 개성을 대변하면서도 한 가족으로 보일 수 있는 옷을 고민했다. 가부장이자 작가인 할란은 보수적인 재킷 안에 대담한 색상의 셔츠를 입고, 100살도 넘었을 게 분명한 트롬비 노부인은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가짓수 많은 옷과 장신구를 켜켜이 걸친다. 사업가 린다는 진한 단색의 각진 옷을 입는 반면, 유기농 라이프를 추종하는 조니는 흘러내리며 주름 잡히는 의상을 택해 대조를 이룬다. 극우 10대 악플러로 설정된 제이콥은 기숙학교 교복풍의 옷을 변주해서 입혔다. 외부자 마르타는 환자를 돌보는 직업에 맞게 실용적인 차림으로 일관한다. 다만 랜섬과 ‘동맹’을 맺는 식당 장면에서는 두 사람이 비슷한 톤의 니트 스웨터를 입어 이후 전개를 은근히 예고하기도 한다.
●나오는 사람들
-할란 트롬비 (크리스토퍼 플러머)
부와 명성을 지닌 85살의 추리작가. 자택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린다 드리스데일 (제이미 리 커티스)
맏딸. 부동산 회사를 성공적으로 경영 중.
-리처드 드리스데일 (돈 존슨)
맏사위. 아내의 회사 경영을 돕는다.
-랜섬 드리스데일 (크리스 에반스)
린다의 아들. 총명해 한때 할란의 사랑을 받았으나 현재는 망나니.
-월트 트롬비 (마이클 섀넌)
막내아들. 할란의 작품을 내는 출판사 CEO.
-제이콥 트롬비 (제이든 마르텔)
월트의 아들. 10대 극우 악플러.
-조니 트롬비 (토니 콜레트)
죽은 둘째 아들의 아내.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를 운영한다.
-멕 트롬비 (캐서린 랭퍼드)
조니의 딸. 마르타와 친구처럼 지낸다.
-트롬비 노부인 (케이 칼란)
할란 트롬비의 어머니. 나이와 인지능력을 가늠하기 힘들다.
-마르타 카브레라 (아나 데 아르마스)
할란에게 신뢰받는 젊은 간병인.
-프랜 (에디 패터슨)
트롬비가의 가정부. 시신을 최초 발견한다.
-브누아 블랑 (대니얼 크레이그)
테네시주 출신 유명 탐정. 익명의 의뢰를 받고 할란 트롬비 살인사건 수사를 위해 트롬비가에 온다.
-알란 엘리엇 경사 (레이키스 스탠필드)
수사를 주관하는 지역경찰.
-스티븐스 (프랭크 오즈)
유언 집행을 맡은 트롬비가의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