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눈망울로 말을 거는 듯한 배우, 유다인이 새로운 모습으로 관객들을 찾아왔다. 각자의 목적을 위해 속내를 감춘 여러 인물들의 신경전을 그린 <속물들>을 통해서다. 여러 작품을 통해 부드럽고 따듯한, 혹은 올곧고 당찬 이미지를 쌓은 유다인. 이번 영화에서 그녀는 성공을 위해 표절을 일삼고, 애인을 두고 바람까지 피우는 화가 선우정 역을 맡아 연기 변신을 보여줬다. 어울리지 않을 듯한 옷이라 예상했을 수 있지만 사람이라면 공감되는 이기심을 천연덕스럽게 담아냈다. <속물들> 개봉과 함께 단편, 독립, 상업 등을 오가며 경력을 쌓아온 유다인의 발자취를 돌아봤다.
선배, 나 열나는 것 같아
유다인은 2005년 SBS 드라마 <건빵선생과 별사탕>에서 단역으로 데뷔한 후 여러 드라마, 영화(단편 제외)에서 단역과 조연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녀가 대중들에게 본격적으로 각인된 시점은 2008년 캔커피 브랜드 ‘레쓰비’의 TV CF ‘거짓말’에 출연하며. 추운 겨울, 따듯한 캔커피로 이마를 데우며 연인을 기다리는 대학생(유다인). 이후 연인이 나타나며 뱉는 그 유명한 “선배, 나 열나는 것 같아”. 화룡점정으로 이어지는 “아프니까 더 예뻐 보인다”까지. 오그라드는 손발을 펴기 힘들 수도 있지만, 따듯하게 마실 수 있는 제품 특성과 풋풋한 연인의 달달함을 이어 강한 임팩트를 남긴 광고다. 덕분에 당시 여러 패러디를 양산하며 대사가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뮤직비디오
배우로서의 초석을 다지던 시기에는 뮤직비디오에도 자주 출연했다. 2000년대 유행했던 나름의 서사가 있는 형식의 발라드 곡이다. 2007년 박상민의 ‘울지마요(Don't cry)’에서는 누아르 분위기의 뮤직비디오에서 정준호와 연인을 연기했다. 두 사람을 갈라놓은 악역으로는 김상중이 출연해 꽤 화려한 라인업을 자랑했다. 심지어 유튜브에 게재된 영상에는 한 외국인이 ‘이 영화는 무엇인가요?’라는 댓글을 달기도. 이외에도 유다인은 2000년대 초 ‘미디엄 템포 발라드 신드롬’을 이끌었던 윤건의 ‘사랑으로 빚진 날들’, KCM의 ‘Only You’ 뮤직비디오 등에 출연했다. 배우로서 입지를 굳힌 뒤에도 바비킴의 ‘사과’ 뮤직비디오에서 김민준과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독립영화 <혜화,동>으로 연기력 입증
광고, 뮤직비디오로 얼굴을 알린 유다인이 배우로서 입지를 굳힌 계기는 민용근 감독의 <혜화,동>이다. 18살에 미혼모가 되고, 아이마저 세상을 떠나 홀로 남게 된 혜화(유다인). 그런 그녀 앞에 5년 만에 아이의 아빠였던 한수(유연석)가 나타나 “아이가 살아있다”는 말을 한다. <혜화,동>은 암담한 상황과 현실을 담았지만 자극을 앞세우지 않고, 캐릭터들이 느끼는 감정을 파고들며 짙은 드라마를 자아냈다. 동시에 극적인 재미를 불어넣은 반전, 혜화를 은유하는 버려진 강이지 같은 디테일 등으로 높은 완성도를 자랑했다.
민용근 감독의 섬세한 스토리텔링, 연출력이 빛을 봤다 할 수 있지만 이를 관객들에게 전달한 것은 배우들. 주인공 혜화를 연기한 유다인은 덤덤한 표정, 눈빛만으로도 캐릭터의 감정을 전달하며 평단과 관객들의 찬사를 받았다. 시린 겨울 같았던 영화에서 온기가 느껴졌던 것도 그녀의 몫이 컸다. 그 결과 <혜화,동>은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작품상, 감독상, 배우상 3관왕을 기록했으며 부산국제영화제 감독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여우상 등을 수상하며 그 해 최고의 독립영화 중 하나로 남게 됐다.
다양한 장르, 캐릭터로 활동
<혜화,동>으로 단번에 많은 영화인들의 주목을 받은 유다인은 이후 다양한 장르, 캐릭터로 활약했다. 하정우, 박희순, 장혁이 주연을 맡은 <의뢰인>에서는 살인사건의 피해자로 등장해 스릴러 장르 색을 끌어올렸으며, 문제아들의 뮤지컬 도전을 담은 <천국의 아이들>에서는 아이들을 이끄는 선생님을 연기해 대책 없지만 다정하고 씩씩한 모습을 보여줬다. 민주화 운동을 소재로 한 블랙 코미디 <강철대오:구국의 철가방>에서는 단아한 첫사랑의 이미지를, 반대로 액션영화 <용의자>에서는 정의감에 불타오르는 열혈 PD를 연기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시체가 돌아왔다>, <올레> 등에서 개성넘치는 모습을 보여줬다.
브라운관
<혜화,동> 이후 영화 못지않게 유다인이 주력했던 것은 드라마. 2012년에는 KBS에서 단막극 형태로 방영하는 <드라마 스페셜> 시즌 2에 출연, <보통의 연애> 에피소드를 맡아 연기력을 뽐냈다. 7년 전 벌어졌던 살인 사건 용의자의 딸 윤혜(유다인)과 살인 사건 피해자의 동생 재광(연우진)의 흔치 않은 만남을 담았다. 불가능할 것 같은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는 과정을 그려내며 달달함과 씁쓸함 사이를 오갔다. 덕분에 강한 여운을 남기며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보통의 연애>는 팬덤의 인기에 힘입어 감독판 DVD가 발매되기도 했으며 유다인, 연우진은 함께 KBS 연기대상에서 단막극 연기상을 수상했다. 이후 유연석과 재회한 <맛있는 인생>을 비롯해 <아홉수 소년>, <한번 더 해피엔딩>, <닥터스>, <역도요정 김복주> 등 여러 드라마에서 주조연을 맡으며 브라운관에도 정착했다.
슬럼프
연기에 대한 스트레스, 지괴감을 털어놓기도 했다. 처음 고민에 빠졌던 것은 2009년 첫 드라마 주연작이었던 <청춘예찬>이 시청률 부진으로 조기 종영되며. 2011년 <씨네21>과 진행했던 인터뷰에서는 “<혜화,동>을 하기 전까지 1년을 쉬었다. 연기를 계속해도 되는 건가? 하고 싶긴 한데 잘 하는 것 같지도, 그렇다고 외모가 눈에 띄는 것 같지도 않았다”고 전했다.
최근 여러 매체와 진행한 <속물들> 관련 인터뷰에서도 2년 전 겪었던 슬럼프를 고백했다. “(극 중 역할인)선우정이 재능이 없는데 버티는 것에 공감했다. ‘너는 잘 될 줄 알았다’고 말하는 사라들의 시선이 부담되고 겁이 났다”고. 그래서 <속물들>에 더욱 애정이 갔으며, “지금도 버티고 있고, 시간이 지나서 괜찮아졌다. 그저 맣은 작품을 통해 연기를 계속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차기작
작품 의지를 불태운 만큼, 현재 유다인은 두 편의 차기작으로 관객들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 첫 번째는<아홉수 소년>에서도 함께 했던 오정세와 호흡을 맞추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직장’을 소재로 사회의 부조리를 꼬집는 내용이다. 유다인이 원청업체(구매자와 직접 계약한 업체) 직원을, 오정세가 원청업체로부터 일을 받는 하청업체 직원을 연기했다. 드라마, 코미디 중 어디에 치중될 것인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으며 현재 촬영을 마치고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다음은 유다인이 1인 2역을 맡은 양윤모 감독의 <튤립모양>. 일본인 여성(유다인)과 한국인 남성(김다현)의 만남을 그렸다. 경기도 다양성영화 제작 투자 지원작으로 꼽힌 영화로 아기자기하고 서정적인 분위기가 예상되는 작품이다. 유다인은 일본인이 사용하는 한국어 억양을 위해 실제 사례를 열심히 보고 연습했다고. 현재 촬영을 완료하고 후반 작업이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