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bituary]
[안나 카리나 추모] 누벨바그의 얼굴
2019-12-20
글 : 이지현 (영화평론가)
<미치광이 피에로>(1965)

고국인 덴마크에서 안나 카리나가 학업을 중단했을 당시, 그녀의 나이는 고작 14살이었다. 학교를 그만둔 후 카리나는 엘리베이터걸, 일러스트레이터 등 다양한 직업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모델 일을 시작했다. 훗날 그 당시를 떠올리며 카리나는 “너무 일찍 돌아가신 할머니와 사랑스러웠던 할아버지, 멀리 떨어져 있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우왕좌왕해하며 자라던 연약한 시절”이라고 고백한 적 있다. 이후 프랑스에 도착한 시기는 1957년으로, 그녀 나이 17살 때였다. 이때부터 그녀의 인생항로는 크게 바뀐다. 어쩌면 ‘영화의 신’이 그녀를 보고 단번에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파리에서 카리나의 행보는 성공적이었다. 생각해보면 카리나만큼 클로즈업에 적합한 배우는 없었다. <비브르 사 비>(1962)에 등장하는 배우 마리아 팔코네티 얼굴과의 비교는 단적인 예시일 것이다. 흑백 화면을 가득 메운 카리나의 얼굴은 <잔다르크의 수난>(1928)과 견주어서도 미약하지 않다. 오히려 이토록 단정한 얼굴에서 배어 나오는 깊은 슬픔이 신비할 정도로 안정적이다.

순간을 빛나게 하는 누벨바그의 요정 카리나, 그녀가 지난 12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AFP>는 다음날인 일요일 아침 “파리의 한 병원에서 안나 카리나가 암으로 숨졌다”는 짤막한 소식을 세계에 전했다. 이 여배우의 죽음은 여타 누벨바그 감독들의 비보와는 다른 강한 애수를 남긴다. 어쩌면 그녀의 얼굴이 가지는 역사적 가치는 시네마의 운명과 동일한지도 모른다.

위대한 재능의 발견, 그리고 장 뤽 고다르

17살 카리나가 파리의 공항에 처음 도착했던 당시, 그녀는 어렸고 또 혼자였다. 하지만 이후 그녀의 삶은 결코 외롭지 않았다. 그녀의 곁에는 항상 가장 위대하고 영향력 있는 예술가들이 함께했다. 가장 먼저 패션계가 그녀의 재능을 알아봤다. 광고회사 ‘퍼블리시스’는 카리나에게 잡지 <주르 드 프랑스>의 표지모델을 맡겼고, 이후 ‘피에르 가르댕’의 모델로 발탁했다. 그리고 여성지 <엘르>의 수장 엘렌 라자레프의 권유로 잡지의 사진모델이 됐다. 당시 코코 샤넬과 알게 되면서 본명 ‘한느 카린 바이어’를 버리고 현재의 이름으로 개명한다. 이 모든 일이 고작 2년 만에 일어났다. 특히 당시 촬영했던 ‘팜올리브’ 비누 광고가 그녀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 광고를 통해 장 뤽 고다르가 카리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1957년은 고다르가 <카이에 뒤 시네마>의 기자로 활동하던 시기다. 당시 고다르는 첫 번째 장편영화 <네 멋대로 해라>(1960)를 기획 중이었고, 카리나에게 작은 배역을 부탁했다. 하지만 거절당했다. 누드 장면이 있었고, 작은 역할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결국 <네 멋대로 해라>에서 카리나의 역할은 시나리오에서 삭제되었다. 그사이 그녀는 미셸 드빌 감독의 <오늘밤 아니면 절대>(1961)에 출연했고, 이 작품을 통해 처음 대중에게 영화배우로 소개됐다. 돌이켜보면 고다르와의 작업은 늘 성공적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첫 출연을 거절당한 뒤 고다르는 <작은 병정>(1963)의 주연을 카리나에게 부탁했고, 이 작업은 완성된 지 몇년 후에야 일반에 공개된다. 1960년 프랑스 정권이 영화의 상영을 금지했던 탓이다. ‘알제리전쟁’이란 키워드는 드골 정권의 정책에 노골적으로 반했다. 그렇게 미셸 드빌과의 작업보다 먼저 촬영된 <작은 병정>은 카리나의 첫 번째 필모그래피가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작은 병정>을 통해 고다르와 카리나의 새로운 이야기는 시작된다. 두 사람은 1961년 결혼했고, 이후 6년을 함께했다. 그사이 카리나가 주연한 <여자는 여자다>(1961)가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또 다른 걸작 <비브르 사 비>가 탄생했다. 마찬가지도 전세계 영화 팬을 매혹시킨 고다르의 걸작 <미치광이 피에로>(1965)가 이 시기 탄생한다. 혹자는 카리나를 ‘고다르가 가장 좋아한 여배우’로 기록하거나 ‘누벨바그의 충동적이고 감성적인 여성을 연기하는 여배우’로 기억하기도 한다. 이런 감상은 <미치광이 피에로>의 공로가 크다. 카리나 본인도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이 영화를 꼽은 적이 있다. <미치광이 피에로>의 가장 유명한 장면 하나를 떠올린다. 호숫가에서 장 폴 벨몽도가 연기하는, 아마도 고다르를 대신한 남자가 일기를 쓰고 있다. 그의 곁으로 붉은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작은 물결을 헤치며 다가온다. 그녀가 샹송을 읊조리듯 “하지만 난 뭘 해야 할까요?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를 반복해서 말한다. 남자가 “조용히 해. 글 쓰잖아”라고 말하지만 여자는 멈추지 않는다. 이 두 사람은 서로 다르다. 시각적으로 보이는 붉음과 푸름의 대조와 더불어 남녀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남자가 단어로 생각을 말하는 반면, 여자는 감정으로 상대방을 바라본다. 여자에게 생각은 감정이지만, 남자는 그런 그녀가 진지하지 않다고 타박한다. 이렇게 ‘문학이 음악보다 먼저인 남자’와 ‘음악처럼 생각하는 여자’가 점점 멀어진다. 훗날 카리나는 “나는 장 뤽 고다르의 아내였다. 의심할 것 없이 그 사실이 다른 누벨바그 감독들을 겁먹게 만들었던 것 같다”고 고백한다. 이 점은 당시 상황과도 연관된다. 둘은 함께라서 완벽해 보였지만 서서히 멀어졌고, 겉으로 드러나는 큰 문제 때문이 아니라 완전한 만족이 아니었기에 결국 결별한다.

실제로 카리나는 자크 리베트를 제외한 다른 누벨바그 감독들과 작업하지 않았다. 고다르와 결별한 후 조지 쿠커, 루키노 비스콘티,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브누아 자코 등 거장들과의 작업을 이어갔지만, 고다르와의 협업을 뛰어넘는 걸작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실패했던 것은 아니다. 단적으로 어떤 감독이라도 그녀의 클로즈업을 실패한 적은 없었다. 어쩌면 카리나의 얼굴이 누벨바그의 아이콘이 된 것은 스스로의 기질 덕분이었다. 70년대 카리나는 영화배우 외에도 연극배우, 소설가, 가수 등으로 활동영역을 넓혔는데, 그중 가장 돋보이는 영역이 ‘영화연출가’ 작업이었다. 1973년에 내놓았던 첫 영화 <비브르 앙상블>(1973)에서 카리나는 스스로 대본을 쓰고 주연을 맡는다. 이때 그녀가 연기한 인물은 고스란히 배우 자체의 매력을 담는다. 60년대 고다르 영화가 그러했듯, 본인의 작품에서도 그녀는 공기처럼 뛰어다닌다. 스스로가 자신의 재능을 알고 있었다는 증명이다.

배우, 소설가, 가수… 연출가

위대한 배우로서 안나 카리나가 지닌 에너지는 지독히 프랑스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프랑스영화의 히로인들 중 특히 그녀의 클로즈업은 유니크하다. 이를테면 잘 알려진 샬롯 갱스부르의 자유로움과 카리나의 자유분방함은 다르다. 물론 60년대 수많은 할리우드의 여신들과도 구분된다. 그녀가 등장하기만 하면 화면은 복잡한 감정들을 잊고 한가해졌다. 그렇다고 그 얼굴이 완전히 생각의 끈을 끊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회색빛의 짙고 푸른 눈동자가 화면 너머로 관객을 응시할 때면, 그리고 창백한 낯빛에서 음울함이 표현될 때면 자연스럽게 우리는 ‘영화는 무엇인가?’ 고민하게 된다. 이 여배우의 얼굴이 지닌 순간의 찬란함은 전체를 지배한다. 카리나의 얼굴이 가리키는 ‘시간’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한다. 그녀는 늘 관객을 꿈꾸게 만들었다. 그토록 순진한 관념이 맞닿은 ‘시네마’를 그녀는 일깨운다. 우리가 늘 신앙했던 누벨바그 이미지는 어쩌면 한 여배우의 단면을 통해 완성된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의 분신이 된 불꽃같은 그녀의 얼굴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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