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리팀의 크리스마스 파티, 디에고가 구석 테이블에 침묵을 지키며 앉아 있다. 항상 축제의 중심에서 좌중을 장악하던 이전과 상반된 모습이다. 사운드가 페이드아웃되고 디에고가 공허한 눈빛으로 바닥을 응시한다. 혼자만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는 듯이. 1990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가 아르헨티나에 패배한 이후 급변한 디에고의 상황이 단적으로 드러난 숏이다. 미디어가 축구의 신 ‘마라도나’의 흥망성쇠에 집중할 때, 아시프 카파디아 감독은 그 속에서 인간 ‘디에고’의 모습을 건져올린다. 그의 세심함은 전작 <세나: F1의 신화>(이하 <세나>)와 <에이미>에서도 돋보인다. 레이싱 도중 사망한 동료를 보며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아이르통 세나, 망연자실한채 무대 뒤에 앉아 있던 에이미 와인하우스. 이러한 필드 밖의 순간들이 모여 인물에게 입체감을 부여한다. 부와 명성, 빛나는 천재 타이틀 뒤편의 그림자를 짚어내는 예리한 시선.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 아시프 카파디아의 미덕은 여기에 있다.
정상의 자리에 선 이들의 공통점은
<디에고>는 그의 천재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이다. 감독 스스로 “도전”이라 칭했던 다큐멘터리 <디에고>는 앞의 두 작품과 다르게 살아 있는 인물, 디에고 마라도나의 일대기를 다룬다. 그는 첫 다큐멘터리 <세나>를 만들기 전부터 <디에고>를 3부작의 마지막 작품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디에고>는 나폴리 이전의 디에고와 그를 보기 위해 질주하는 한 자동차 영상을 교차편집하며 시작한다. 마치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온 것처럼. 디에고와 자동차에 탄 팬들은 마침내 그의 나폴리 입성을 축하하는 경기장에서 조우한다.
카파디아 감독은 <세나> <에이미> <디에고> 외에도 밴드 오아시스와 축구선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기획했다. 계속해서 스포츠, 음악계 인사들의 이야기를 다뤄온 셈이다. 감독은 그들의 어떤 점에 매료된 것일까. 우선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정상의 자리에 선 천재들이다. 그러나 그 주목이 단지 그들의 천재성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아이르통 세나는 당시 F1 특유의 정치적 상황에 불편을 드러냈으며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마약과 음주, 거식증 등으로 고통받았다. 디에고의 경우 금지약물 복용으로 출장정지를 받기도 했다. 더불어 안타까운 죽음과 예기치 못한 몰락까지. 이들은 모두 화려한 성공과 비운의 사건을 동시에 겪은 인물들이다. 그러나 카파디아 감독은 인물의 성공이나 비극에 초점을 맞춰 이들을 우상화하거나 연민을 자아내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관심은 대상을 최대한 다면적으로 조명하고자 하는 데 있다. 감독은 인터뷰, 경기 영상부터 파파라치 숏까지 다양한 자료를 토대로 작업을 진행하는데, 1만여 시간이 넘는 상당히 방대한 양이다. 감독은 수년간 이들을 압축해 2시간 분량의 영화로 완성한다. 선택된 숏 하나하나에 어느 한 방향으로 치우치지 않으려는 감독의 집념이 담겨 있는 셈이다. 그가 유가족의 동의하에 <세나>를 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르통 세나의 죽음만 다루려던 여타 감독들과 달리 그가 레이서로서의 세나의 삶 자체를 기록하려 시도했기 때문이다.
<디에고>에 드러났듯이 당시 구단과 언론은 디에고의 마약 문제를 구미에 맞게 이용했다. 전성기 시절엔 복용 사실을 은폐하다 후에 그를 파멸시키기 위해 이를 폭로하는 식으로 말이다. 반면 카파디아 감독은 대상과 사건을 섣불리 재단하지 않고 사건의 전후 상황, 찬반양론을 신중하게 종합한다. 감독은 아이르통 세나의 어머니의 영상을 편집하며 자신이 누군가의 삶을 다루고 있음을 깨달았고 전에 없던 이미지에 대한 책임감을 느꼈다고 말한다. 자기 일의, 무엇보다 이미지의 무게를 인지하고 있으므로 이를 함부로 소비하지 않았던 것이다. 감독의 진중한 태도는 <세나>와 <에이미>를 거쳐 <디에고>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필요에 따라 대상을 신 혹은 악마로 이미지화하여 활용하던 쇼비즈니스, 미디어의 그것과 명확히 구별되는 지점이다.
'진중한 기록자'의 시선
<디에고>에서는 두 가지 주제가 반복된다. 첫 번째는 “디에고와 마라도나, 두 자아의 공존”이다. 디에고의 개인 트레이너와 아내는 그가 대외적으로는 축구산업과 미디어의 요구에 부응하는 ‘마라도나’로 활약하는 반면, 사석에서는 그저 축구를 좋아하는 ‘디에고’로 돌아왔다고 말한다. 그는 마라도나를 최대한 발현시켜 최고의 자리에 올랐으나 종국엔 같은 이유로 나락에 떨어진다. 두 번째는 “디에고 마라도나에게 축구의 의미”다. 디에고의 한 대사가 영화의 서두와 말미에 반복된다. “경기장에서 뛸 땐 삶도 사라져요. 문제도 사라지고, 모든 게 잊히죠.” 그는 젊은 시절처럼 필드를 누비지는 못하지만 절뚝이면서도 환하게 웃으며 눈으로 공을 좇는다. 온갖 파란을 겪은 중년의 감독에게도 축구는 여전히 구원이다. 그를 천국과 지옥 사이의 경계에서 쥐고 흔든 장본인인데도 말이다. 타인은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그 복잡한 감정을, 감독은 현재 디에고의 목소리를 빌려 담담히 전한다.
아시프 카파디아 감독은 <세나>와 <에이미>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주제를 전달한다. 세나는 과거 고카트의 경험을 언급하며 당시를 정치도, 돈도 개입하지 않은 진정한 레이스였다고 회고한다. 그는 이 대사를 영화의 처음, 그리고 마지막에 한 번 더 들려준다. <에이미>는 그의 데뷔 초 모습을 영화의 앞과 끝에 배치하여, 점점 마르고 피폐해져가는 에이미를 감싸 안는다. “에이미, 네 작은 중심에는 무엇이 있어?”라고 묻자 수줍게 웃고, 재즈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장면들로 말이다.
그들의 성과, 천재라는 명성, 마약과 같은 자극적인 화제를 걷어내면 무엇이 남을까. 아시프 카파디아 감독의 작업은 언제나 여기에서 시작하는 듯하다. 대중과 미디어가 쌓아올린 수많은 레이어를 걷어낸 곳엔 순수한 레이스, 삶을 녹여낸 음악, 모든 걸 잊게 만드는 축구를 사랑하는 인물들의 진심이 자리한다. 감독은 이례적으로 그들의 대사와 행동을 반복하며, 인물들이 자기 진심을 전하게끔 돕는다.
그의 다큐멘터리에는 내레이션이 부재하며 부가적인 대사도 적다. 그러나 이는 다큐멘터리뿐만 아니라 <무사>와 같은 극 영화까지 아우르는 카파디아 작품 세계의 특징이다. 이 특징은 그가 영국왕립예술학교 출신이라는 배경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때부터 감독은 이미지 위주의 작업을 주로 해왔다고 한다. 요컨대 그는 이미지로 메시지를 전달하기를 추구하고, 그러한 작업 방식이 몸에 밴 감독이다. 그는 직접적인 내레이션 대신 영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자기 의도를 내비친다. 파파라치, 홈비디오 등 경우에 맞는 성격의 영상을 택해 사건을 설명하고, 일부 장면을 클로즈업하거나 연장하며 스토리를 구성한다. 이 과정에서도 카파디아는 균형감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가령 도핑테스트 이후 모두가 디에고를 비난할 때, 그를 여전히 존중하는 동료 선수의 인터뷰를 보여주는 식이다. 그의 작품은 개입을 최소화하려는 연출자로서의 노력과 감독 고유의 작업 방식이 맞물려 빚어낸 결과다.
<에이미>에서 토니 베넷은 나이를 먹으며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됐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어쩌면 현재의 디에고에게 적용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미디어와 대중이 만든 ‘마라도나’ 신화에서 한 걸음 벗어나 조금씩 ‘디에고’로서의 삶을 찾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치부라 여기며 계속 부인해온, 전 애인 크리스티나와의 관계와 자기 아들의 존재를 마침내 인정한다. 카파디아 감독은 이를 놓치지 않고 그들의 재회를 담백한 자막 한줄과 함께 내보내며 <디에고>를 마무리한다. 그야말로 ‘진중한 기록자’다운 연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