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이별의 기술
2019-12-25
글 : 김혜리

*<결혼 이야기>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미안해요, 리키>

1936년생 사회주의자 켄 로치 감독은 2010년대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과 신종 착취를 따라잡는 데에 게으르지 않다. <미안해요, 리키>는 금융위기 이후 급격히 늘어난 모바일 앱 기반 호출 서비스와 임시직 경제(gig economy)가 만든 노동 환경을 주시한다. 리키(크리스 히친)는 자유롭고 자율적인 자영업자로 일하게 될거라는 배송 회사의 약속을 믿고 운송기사 일을 시작한다. 그러나 ‘0시간 계약노동’이 실제로 뜻하는 바는, 회사가 노동자에 대해 어떤 책임도 지지 않을 자유와 벌점의 위협에 쫓기는 노예적 규율이다. 역사적으로 노조가 쟁취한 병가, 유급휴가의 권리를 무화시켜버린 신종 고용 형태는 리키를 신경쇠약으로 몰아넣고 가족과 규칙적으로 대면할 시간을 빼앗아 가정생활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11/30

노아 바움백 감독이 예술가 부부의 이혼을 그린 영화를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 배우 제니퍼 제이슨 리와 바움백의 이혼을 떠올리고 감독의 자기 연민을 보게 될까 걱정한 사람 중에는 본인도 있었던 모양이다. <결혼 이야기>의 각본을 쓰면서 노아 바움백은 이혼 커플을 양쪽 고루 인터뷰했고 이혼 관련 법에 대한 다양한 리서치를 했다고 한다. 스토리뿐만 아니라 촬영에서도 부부 중 한쪽으로 비중이 기울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고 편집 기사와 매일 통화하며 현장에서 달라진 부분을 어떻게 양쪽 균형을 유지하며 수용할지 의논했다. <결혼 이야기>는, 합의이혼을 앞두고 뉴욕에서 LA로 일하러 온 니콜(스칼렛 요한슨)에게 관객이 동조하도록 초반을 이끌어간다. 그러다 예정과 달리 니콜이 전문 변호사를 고용한 다음부터는 법적 대리인을 통한 협상을 예상하지 못했다 충격에 빠진 찰리(애덤 드라이버)한테 동일시한다. 중반 넘어 부부가 가정법원에 나란히 앉아 변호사들의 대리전을 착잡한 심정으로 지켜보는 장면부터 영화는 관객을 니콜과 찰리로부터 등거리에 앉히려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팔은 안으로 굽어 영화 마지막 장 역시 찰리의 감정을 지근거리에서 그리는 데에 시간을 더 할애한다. 그래도 이 정도면 선방이다. 찰리쪽이 약자로 보이는 일은 영화에 담긴 시기가 결혼 전체에서 차지하는 위치 때문에 불가피한 면도 있다. 둘의 이혼 사유를 제공한 쪽은 결혼 생활을 자기중심적으로 운영한 찰리지만 이는 영화 시작 전의 일이기에 관객은 볼 수 없다. 아들과 LA에서 새 인생을 결심한 니콜의 요구에 뒤늦게 현실을 인식하고 당혹한 채로 끌려가는 찰리는 러닝타임 동안 ‘약자’의 위치에 선다.

이혼 프로세스를 그린 영화를 <결혼 이야기>라고 명명한 근거는 이별 절차 역시 결혼 생활의 마지막 장이기 때문일 것이다. 무심히 다루던 가전제품이 고장나야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혼은 결혼을 전면적으로 반추하게 만든다. 영화에는 전기가 끊긴 니콜의 집에 찰리가 도와주러 온 장면이 있다. 세 식구는 미닫이 현관문을 안팎에서 밀어 닫는데 문이 부부를 갈라놓는 순간은 의미심장하게 편집돼 있다. 말하자면 두 사람은 반대편 자리에 서서 힘을 모아 서로를 분리하는 벽을 치는 과정에 있다. 애초 대리인 없이 평화롭게 헤어지고 재산을 분할하기로 했던 부부는, 캘리포니아 본가로 돌아온 니콜이 유능한 이혼 전문 변호사 노라(로라 던)를 고용하면서 날카롭게 대립한다. 찰리는 배신으로 느끼지만 니콜의 결정은 이해할 만하다. 오프닝의 ‘상대의 장점’ 편지가 소개하듯 찰리는 언변이 좋고 원하는 바를 반드시 관철하는 유형이다. 연출자/작가인 찰리에게 배우로서 줄곧 평가받는 위치였고 자신감이 약한 니콜은 직접 남편과 협상하면 백전백패임을 안다. 둘 사이엔 어린 아들이 있고 니콜이 LA에서 드라마와 영화 일을 하며 인생의 다음 장을 살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뉴욕을 생활 근거지로 고집하는 찰리와의 소송은 불가피하다. 각박한 소송을 거치지 않았다면 찰리는 결혼 생활이 편향돼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12/01

<결혼 이야기>는 대뜸 형식이 눈에 들어오는 영화는 아니지만, 블로킹과 컷의 리듬, 구도로 인물들의 관계를 전달한다. 영화 초반, 이혼의 원인조차 관객이 모르는 상황에서 등장하는 연극 <엘렉트라>의 뒤풀이 신도 그렇다. 니콜은 여성 멤버들과 찰리는 남자 동료들과 식당 반대편에 앉아 있다. 둘은 서로를 의식하며 방을 가로질러 시선을 던진다. 그러다 한 여성 스탭이 찰리에게 다가오자 니콜은 갑자기 외투를 챙겨 나서고 찰리는 급히 따라 나간다. 다음 컷은 텅텅 빈 지하철에서 한 사람은 앉고 한 사람은 서서 거리를 유지하는 부부의 모습이다. 설명적 대사가 없어도 관객은 화가 난 쪽은 니콜이지만 그것의 폭발을 두려워하는 것도 니콜임을 알아차린다.

도입부 몽타주 시퀀스를 제외하면 이혼 합의 전 결혼 생활의 플래시백이 전무한 이 영화에서 이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변호사 노라의 사무실을 방문한 니콜의 긴 회고로 진술된다. 컷 없이 인물을 따라다니는 카메라는 회상 장면으로 도망치지 않고 스칼렛 요한슨을 끈질기게 지켜본다. 니콜은 주저하다 회상하는 동안 격앙되고 급기야 운 다음 편해져서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고 과자를 집어먹는다. 무엇이 니콜의 무장을 해제했는지는 로라 던의 연기와 공간이 보여준다. 개방적이고 실용적인 노라는, 니콜이 말문을 열자 하이힐을 툭 벗어 떨구고 소파에 다리를 올려 다정한 뱀처럼 의뢰인을 감싼다. 모던하면서도 친근한 분위기를 내는 노라의 사무실은, 육중한 책상으로 권위를 뽐내는 라이벌 변호사(레이 리오타)의 오피스, 집인지 직장인지 분간이 안 가는 노변호사(앨런 알다)의 체계 없는 사무실과 시각적 대비를 이룬다. 물리적 폭력이 등장하지 않는 이 영화의 ‘액션’ 시퀀스에 해당하는 클라이맥스는, 찰리가 LA에 얻은 아파트에 찾아온 니콜이 찰리와 대화를 시도하다가 서로를 경쟁적으로 상처내는 언쟁으로 비화되는 10여분의 시퀀스다. 거구의 찰리와 자그마한 니콜은 현저한 체격 차를 보이는 커플이다. 자칫하면 육체적 위협이 감정선을 압도할 수도 있다. 노아 바움백 감독은 니콜이 저돌적으로 쫓아다니고 찰리는 집 안 곳곳으로 피하도록 동선을 정해 니콜을 공격자 입장에 두는 한편 결혼 생활의 문제에 관한 그간 부부의 대화 양상을 짐작하게 한다. 더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진 찰리는 거실로 내몰리고 마침내 니콜을 직면해 자폭한다.

<결혼 이야기>는 이혼 절차를 완료한 둘이 각기 LA와 뉴욕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소 갑작스러운 이 연출은 니콜과 찰리가 근본적으로 시련과 슬픔에서 영감을 얻는 부류의 공연예술가임을 상기시켜 흥미롭다. 우울한 사건을 다루고 있음에도 <결혼 이야기>의 엔딩은 기묘하게 희망적이다. 결혼이 끝나도 아이를 통해 가족은 지속된다. 이혼에 관한 영화이지만 영화를 보고 결혼하기 싫어지는 관객만큼이나 결혼이 할 만한 시도라고 생각하는 관객도 있을 법하다. 결말부에 찰리가 뒤늦게 발견하는 니콜의 글(찰리의 사랑스러운 점을 나열한), 둘의 결혼이 실패했지만 진짜 사랑을 했고 그 사실은 이혼으로 무화되지 않음을 말한다. 희귀하게 아름다운 것을 놓쳤다는 각성은 아프지만 그 아름다움을 뼈저리게 만지작거리게도 한다.

<디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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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포착

<세나: F1의 신화> <에이미>에서 기존 기록 영상만으로 시적인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 있음을 입증한 아시프 카파디아 감독은 나폴리 외곽의 기록보관소에 있는 방대한 이미지와 마라도나 전 부인이 가진 비디오를 재료로 <디에고>를 연출했다. 지금까지 그랬듯 카파디아 감독은 풍부한 자료 표본 가운데에서 인물의 대주제와 맞닿는 시적인 순간을 기어이 찾아낸다. <디에고>가 보여주는 20대 마라도나는 천진하고 열정적인 청년이다. 이적 후 열광하는 스타디움에 검투사처럼 들어서는 작고 단단한 실루엣, 철없이 모피코트를 과시하는 모습, 상심한 나머지 파티에서 입을 다물고 맥주만을 들이켜는 순간. 카파디아는 언제나 거기 있었지만 사람들이 보지 못한 이미지를 보고 합당한 자리에 배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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