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이 오자 각종 리스트들이 얼굴을 내민다. ‘올해의 베스트’도 ‘최고의 흥행작’도 좋지만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들이라면 개인적인 정산의 시간이 필요하기 마련. 말하자면 올해의 영화를 이듬해로 미루는 의식처럼, 극장 관람을 놓친 영화들의 리스트를 다듬는 일이다. 그 작업에 이 글이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길 바란다. 더 많은 관객과 만났다면 좋았을 영화, 소수만 즐기기엔 아쉬운 외화 개봉작을 7편으로 추렸다.
포드 V 페라리
개봉일ㅣ12월 4일
국내 관객 수ㅣ1,113,625 명
포드 대 페라리. 저명한 두 자동차 회사의 이름을 직설적으로 새겨 넣은 제목은 <포드 V 페라리>는 영화가 담고자 하는 이야기를 명료하게 설명한다. 하지만 동시에 심리적 진입장벽도 함께 높였다. 적지 않은 관객들이 레이싱, 자동차, 스피드라는 소재가 주는 매니악한 이미지 앞에 <포드 V 페라리>의 관람을 주저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외면받기엔 <포드 V 페라리>의 만듦새가 너무 훌륭하다. 단순히 승부 하나만을 염두에 둔 장르 영화로 만들 수 있었지만 제임스 맨골드 감독의 야심은 더 먼 곳을 향한다. 차에 관해 잘 모른다거나, 스피드의 매력을 느껴본 적 없다 해도 괜찮다. 철저한 대기업 마인드로 돌파구를 찾는 포드사와, 포드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거친 레이서 켄(크리스찬 베일)이 한 배에 탑승한다. 그리고 삐걱거리는 둘 사이를 조율하는 캐롤(맷 데이먼). 각 인물마다 담고 있는 기질과 성품을 파악하는 재미도 크다. 24시간 동안 쉼 없이 달리는 '르망 24시간 레이스'에서의 클라이막스를 지나기까지152분에 달하는 영화의 러닝타임이 아주 짧게 느껴질 것이다.
나이브스 아웃
개봉일ㅣ12월 4일
국내 관객 수ㅣ596,118 명
<셜록 홈즈>,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 <용의자 X의 헌신> 등 잘 알려진 추리 영화를 떠올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것. 그만큼 상대적으로 파이가 작은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나이브스 아웃>은 올해 꽤 선전한 영화에 속한다. 하지만 <나이브스 아웃>을 본 관객들은 말한다. 더 많은 관객과 만나야 하는 영화라고. 그만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대중적인 취향을 겨냥하는 데 성공한 영화다. 추리 소설의 대가 애거사 크리스티 풍의 이야기라는 별명답게 대저택에서 벌어진 의문사를 둘러싸고 가족들의 알리바이를 하나 둘 파헤치는 데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갇힌 장소 내에서 벌이는 배우들의 연기력을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며, 긴장감을 유지하던 중에도 불쑥 튀어나오는 유머의 타율도 높은 편. 다니엘 크레이그, 크리스 에반스, 아나 디 아르마스, 제이미 리 커티스, 토니 콜렛, 마이클 섀넌 등 이름들의 나열만으로도 기대를 걸게 되는 <나이브스 아웃>은 잘 짜인 연극을 보는 듯한 쾌감을 선사한다.
애드 아스트라
개봉일ㅣ9월 19일
국내 관객 수ㅣ513,375 명
브래드 피트 단독 주연의 SF영화, 그러나 <애드 아스트라>는 더 많은 관객과 만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브래드 피트 덕에 50만 관객을 넘겼다고 해야 할까. 감독 제임스 그레이는 미국 신진 거장 감독들의 반열에 오른 지 오래지만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편이다. 그 수는 적어도 지지는 단단했던 팬들은 그의 첫 SF영화가 나온다는 소식에 일찌감치 기대를 보내왔다. <애드 아스트라>는 말보다는 이미지로, 화려함보다는 고요함으로 승부하는 묵직한 우주 드라마다. 우주의 지적 생명체를 찾는 작업에 평생을 바치다 실종된 영웅 클리포드(토미 리 존스). 그의 아들 로이(브래드 피트) 역시 뛰어난 우주 비행사가 되어 명성을 잇지만, 아버지에 관한 뜻밖의 진실 앞에 혼란을 느낀다. 제임스 그레이의 전작들에서도 꾸준히 다뤄온 부계 서사가 <애드 아스트라>에 이르러 정점을 찍는다. 달의 표면에서 벌어지는 숨 막히는 총격전은 우주를 그린 많은 영화들 가운데서도 명장면으로 기록될만하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개봉일ㅣ9월 25일
국내 관객수ㅣ277,319 명
쿠엔틴 타란티노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는 개봉 전후로 말이 끊이지 않았다. 단순히 타란티노가 영화광들의 주목을 받는 감독인 탓도 있겠지만, 우려도 따랐던 것이 사실. 할리우드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실제 사건인 '맨슨 패밀리의 폴란스키 가(家)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다는 소식 때문인데, 그간 타란티노식 B급 스토리텔링을 떠올리자면 이 잔악한 현장을 그다지 심각하지 않게 다룰 것이 뻔했다. 그러나 숱한 말들을 뒤로하고 공개된 영화는 그 우려를 비껴갔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는 가장 성숙한 버전의 쿠엔틴 타란티노를 느낄 수 있는 영화이자, 1969년의 할리우드에 부치는 타란티노의 애정 어린 고백이었다. 잊혀 가는 액션스타 릭 달튼(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과 그의 스턴트 배우 겸 매니저 클리프 부스(브래드 피트)와의 은근한 우정을 바탕으로, 1969년을 상기시키는 시대의 조각들이 덧붙여진다. 타란티노의 오랜 팬들이라면 그의 영화에서 처음 느껴보는 서글픈 마음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퍼스트 리폼드
개봉일ㅣ4월 11일
국내 관객 수ㅣ11,990 명
폴 슈레이더 감독은 시나리오 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가 집필한 대표적인 시나리오가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와 <성난 황소>라는 점이 보증하는 사실. <퍼스트 리폼드>는 폴 슈레이더의 각본과 연출로 태어난 작품으로,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됐다. 그동안 감독으로서의 커리어를 꾸준히 쌓아 왔지만 그의 존재감이 다시금 입증된 것은 무척 오랜만이다. 영화는 뉴욕의 한 교회 목사인 톨러(에단 호크)의 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신도들의 고민을 듣는 직업을 가졌지만 정작 자신의 이야기는 어디에도 털어놓을 수 없는 그는 일기에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 어느 날 임신한 신도 메리(아만다 사이프리드)가 찾아와 자신의 남편과 만나주길 청하고, 급진적인 환경주의자인 남편 마이클(필립 에팅거)은 이렇게 엉망진창인 세상에 아이가 태어나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마이클을 만난 이후 환경 문제의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된 톨러 교수는 오염의 주범인 회사가 교회의 최대 후원자라는 것을 알게 되고 혼란스러워 한다. 신은 우리를 용서할 것인가. 허망한 물음이 톨러를 지배한다.
언더 더 실버레이크
개봉일ㅣ9월 19일
국내 관객 수ㅣ3,016 명
데이빗 로버트 미첼 감독은 독특한 전작으로 호평을 받았다. 2015년 국내에 개봉한 공포영화 <팔로우>는 일명 '섹스를 통해 전이되는 저주'를 스크린에 펼쳐 놓았다. 이 대담한 발상과 더불어, 깜짝 놀래키거나 잔인한 장면 대신 느릿한 걸음으로 나를 향해 걸어오는 기묘한 공포감을 조성한 점이 주목을 받았다. <팔로우>에서 시도한 특유의 느린 트래킹은 세 번째 장편영화 <언더 더 실버레이크>에서 역시 큰 역할을 해 낸다. <언더 더 실버레이크>는 불현듯 사라진 이웃 여자의 향방을 추적하는 남자 샘(앤드류 가필드)이 겪는 이상한 미스터리다. 그 과정에서 만난 수상쩍은 사람들과 의미심장한 기호들, 호기심 어린 샘의 시선과 괴상한 몽상들이 뒤섞여 기묘한 분위기를 이끌어간다. 미스터리한 여자의 뒤를 쫓는다는 점에서 알프레드 히치콕의 잔상을, 꿈결같은 환각과 알 수 없는 기호들의 마주침에서 데이빗 린치의 잔상을 발견해볼 수도 있는 작품이다. 제71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됐다.
하이 라이프
개봉일ㅣ10월 30일
국내 관객 수ㅣ2,978 명
전작 <렛 더 선샤인 인>으로 로맨틱 코미디라는 뜻밖의 장르 전환을 했던 클레어 드니 감독이 이번엔 SF영화로 새로운 전향을 했다. 하지만 장르의 포장이 달라졌을 뿐, 섹슈얼리티와 욕망에 관한 클레어 드니의 화두는 이번에도 지속된다. 우주 탐사엔 크게 관심이 없는 <하이 라이프>는 줄곧 우주선 안의 이야기만을 다룬다. 이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전문 우주 비행사가 아니며, 되레 사형선고를 받은 범죄자들이다. 그런데 블랙홀의 회전 에너지를 추출하는 데 목표를 두고 떠난 이 우주선에서는 다른 실험도 함께 행해지고 있었다. 우주선에서 출산과 양육이 가능한 것인가라는 또 다른 목표. 박사 딥스(줄리엣 비노쉬)의 집착과 욕망으로 인해 죄수들은 실험용 쥐가 되고 만다. 한계를 모르는 상상력으로 다분히 철학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하이 라이프>는 올해 극장에서 만난 가장 독특한 이야기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