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패밀리 비즈니스
2020-01-01
글 : 김혜리
<와일드라이프>

배우 폴 다노의 감독 데뷔작 <와일드라이프>는 1960년 미국 몬태나주의 한 가정에 찾아온 해체의 기운을 14살 아들의 눈을 통해 그린 영화다. 아들 조 역을 연기한 호주 출신 배우 에드 옥센볼드는 스크린 위의 연기자 폴 다노가 그랬듯 비밀스럽고 정확한 나이를 짐작하기 힘든 인상이다. 대규모 산불을 포함해 <와일드라이프> 속 주요사건의 절반은 그의 얼굴에 일어난 리액션으로 표현된다. 때로 감독은 조가 보고 있는 대상보다 소년의 표정을 먼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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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도 남지 않은 2019년은 내가 대학에 입학한 해의 내 어머니와 동갑이 된 해였다. 열아홉의 나는, 당시 부모님의 삶이란 거의 완성되고 확정된 상태일 거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지점에 도달한 2019년의 나는 여전히 선택의 갈림길에 자주서고, 모종의 변화를 기다린다. 타인이란 언제나 견고해 보이고 옆방의 소용돌이는 기척조차 감지할 수 없다.

1인칭 내레이션은 없지만 10대 소년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폴 다노 감독의 <와일드라이프>는 사춘기 개인뿐만 아니라 한 가족 전체도 질풍노도의 시기가 있음을 이야기하는 냉철한 드라마다. 그리고 어떤 가족의 성장은 해체로 귀결되기도 한다. 전직 골퍼 제리 브린슨(제이크 질렌홀)은 잘생기고 자신감 있는 남자로 더 나은 생활을 위해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여러 차례 이사를 거쳐 황야와 인접한 몬태나주까지 왔다. 대학에서 만난 제리와 결혼해 직장을 그만둔 자넷(캐리 멀리건)은 1960년 미국 사회가 요구하는 모범적 주부의 모습이다. 그러나 끈기 없는 제리가 직장을 그만두고 산불 진압 일용노동자로 한철을 보내겠다고 결심하자 자넷의 마음을 동여매고 있던 보이지 않는 밧줄이 조용히 끊어진다. 엄마와 둘만 남은 14살의 조는, 지금껏 본 적 없는 화려한 옷을 꺼내 입은 엄마가 다른 남자를 초대하고 시내 아파트를 알아보는 모습을 불안하게 바라보며, 어서 눈이 내려 아빠가 돌아오기만 기다린다. 몬태나를 매년 휘감는 산불은 첫눈이 와야 비로소 잡히기 때문이다. 자넷의 내면을 태우기 시작한 불씨도 인생의 계절이 바뀌기 전에는 꺼지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폴 다노를 단숨에 사로잡았다는 리처드 포드의 원작 소설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1960년 가을 나는 16세였고 아버지는 잠시 직업이 없었고 어머니는 워렌 밀러란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이 서두는 일탈한 아내와 하릴없이 인내하는 남편의 모습을 상상하게 하지만 <와일드라이프>의 실상은 훨씬 복잡하다. <와일드라이프>에서 브린슨 가족의 사춘기는 부모에게 찾아온다. 이상적 남성성을 추구하고 아들에게도 교육해 온 제리는 해고를 경험하면서, 언젠가 반드시 성취하리라 확신했던 삶을 현실이 따라가지 못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공포를 느낀다. 그래서 동굴 대신 산으로 도망친다. 제리가 이끄는 대로 살면 만사형통이라 믿어온 자넷은 남편에게 실망하고 ‘그럼 내가 왜?’라는 물음을 품는다. 남편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으려고 묶어둔 일하는 능력과 현숙한 주부로서 가둬온 매력을, 조용하지만 공격적으로 풀어헤치는 캐리 멀리건의 연기는 전에 본 기억이 없는 여자의 초상을 그린다. 자넷은 정지된 청춘을 다시 원한다. 부모의 질풍노도를 감당해야 하는 보호자는 다름 아닌 10대 조다. 주민 수가 적은 타향 소도시에서 외톨이인 부부에게 유일한 친구는 아들이기 때문이다. 직장 보스를 향한 불만, 배우자의 무책임에 대한 고발, 배우자 아닌 상대와의 시시덕거림 등 보통은 아이에게 알리지 않을 법한 속내를 부부는 경쟁적으로 조에게 털어놓는다. 조는 과도하게 자식에게 친밀한 부모 때문에 고통받지만 다행히도 그로 인해 부서질 만큼 약하진 않다. 두 부부가 함께 있는 거의 모든 장면은 아들 앞에서 일어나고 조의 시점으로 촬영됐다. 자주 집과 학교를 옮겨다닌 소년은 부모가 불화하기 전부터 그들을 본능적으로 관찰하고 귀 기울인다.

자넷과 제리는 3인 집단이 으레 그렇듯 세 번째 멤버인 자식에게 호소하고 지지받으려 한다. 부모와 자식을 보호와 피보호 관계에 놓는 대다수의 영화가 재현하지 않을 뿐, 현실을 돌아보면 매우 사실적인 모습이다. 감독은 1인칭의 회고조 내레이션을 배제함으로써 브린슨 가족에게 몰아닥친 소용돌이를 어디까지나 현재형으로 바라보도록 밀어붙인다. 장성한 조의 보이스오버가 있었다면 관객은 첫째, 어찌됐든 소년이 무사히 성장했다는 보장을 움켜쥐고 영화를 봤을 테고 둘째, 제리와 자넷의 행동은 소년의 이익을 기준으로 러닝타임 내내 심판의 대상이 됐을 것이다. 폴 다노와 조이 카잔(배우 겸 작가이자 다노의 파트너)이 시나리오를 쓴 <와일드라이프>는 데뷔 감독, 게다가 유명 배우인 신인감독의 작품으로서는 드물게 단단하고 차분하다. 스토리는 보편적인 듯 예리하고 모든 숏이 신중하게 디자인됐으며 감독으로서 개성과 자격을 입증하려는 조급증의 기색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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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요, 리키>는 켄 로치 감독의 전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 같이 뉴캐슬을 배경으로 한다. 실제로 감독은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주인공 케이티(헤일리 스콰이어스)가 푸드 뱅크에서 생필품을 얻는 장면을 촬영하다가 일자리를 가진 노동자들조차 임금이 형편없이 낮아 식품을 배급받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고 <미안해요, 리키>를 착안했다고 한다. 택배기사 리키(크리스 히친)와 의료보험공단 방문요양사 애비(데비 허니우드)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영국에서 70만명까지 늘어난 임시직 고용 노동자의 일원이다. 회사가 정규인력을 고용해 임금을 주고 복지를 책임지는 대신, 개인 자영업자와 회사가 계약하는 방식으로 탄력적으로 일하고 성과만큼 가져간다는 외형이다. 성실한 노동자로서 자부심이 강한 리키는 스스로 독립한 업주가 된다는 개념에 끌려 계약하지만, 결과는 단말기 재촉 아래 하루 12시간 노동에 치이고, 휴가를 쓰려면 대리기사를 직접 돈으로 고용해야하는 노예 상태다. 전작에서 복지정책의 구멍으로 추락한 개인들의 사례를 이야기했던 켄 로치는 <미안해요, 리키>에서 확산되는 불안정한 노동환경이 가족 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주목한다. 리키는 택배회사와 계약을 위해 밴이 필요하고 그 비용을 위해 역시 임시 노동자인 아내 애비의 차를 판다. 그러나 영화는 구조적으로 리키가 애비의 희생을 상쇄할 만한 소득을 올리기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분단위로 배송 진도를 점수화하는- 과연 그렇게 경각을 다투는 화물이 얼마나될 것인가- 적자생존 시스템은 리키를 상시적 불안에 빠뜨리고 가족과 공유하는 시간을 잡아먹는다. 반항기의 아들은 참을성이 줄어든 아빠와 반목하고 자칫하면 몰락한다는 가족의 위기감은 소년의 미래에 대한 선택지를 줄인다. 부부가 유사한 노동환경에 처해 있으므로 서로를 이해할 것 같지만 가사노동을 독차지하고 이동수단까지 없어진 아내의 피로는 가중된다. 상냥한 성정을 지닌 애비와 어린 딸은 가족의 여성 멤버로서 빈곤과 갈등 와중에 식구들을 보살피고 위로하는 가외의 짐까지 짊어진다. <미안해요, 리키>의 켄 로치는 어느 때보다 비관적이다. 평균치보다 훨씬 결속력이 강하고 사랑이 깊은 가정이었음에도, 임시직 경제라는 기계의 아가리에 물린 이상 리키 가족은 탈진과 붕괴를 피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두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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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프라이스

제도권 종교에 관한 두 노년 백인 남성의 대화라니, 영화 소재로서 이보다 지루할 순 없을 것 같지만, <두 교황>은 놀랍게도 엔터테인먼트로서 손색이 없다. 당연히 반전의 주역은 독일 출신 베네딕트 16세와 아르헨티나 출신 프란치스코 교황을 각각 연기한, 영국 웨일스 출신의 대배우 앤서니 홉킨스와 조너선 프라이스다. 특히 진보적 추기경 베르고글리오(뒷날의 프란치스코)로 분한 프라이스는, 특유의 표현력 풍부한 눈과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사랑받을 만한 사제의 모습을 표현한다. 베르고글리오는 <Dancing Queen>을 흥얼거리며, 정원사와 대화하고 축구와 탱고에 대한 열정을 숨기지 않는다. 여전히 호기심이 살아 있는 프라이스의 눈은 클로즈업에 힘을 더하고, 진퇴가 섬세한 보디랭귀지는 126분의 상호작용을 쉴 새 없이 흥미롭게 한다. <두 교황>의 조너선 프라이스는 압도적 명연기와 차별되는, 포용하는 명연기의 좋은 예다. 프라이스는 본래 프란치스코의 팬으로, 바티칸 시사 후 교황 본인이 마음에 들어 할 거라고 DVD를 요청한 교황 지인의 반응을 최고의 찬사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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