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많이 맞은 날에는 감기에 걸리지 않아. 오히려 날이 개고 난 후에야 걸리는 법이란다.”
나의 오랜 명상 선생님은 언젠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2019년 한해, <벌새>로 40번 넘는 비행을 하며 해외영화제를 다녔고 때때로 아팠다. 폭풍이 지나가고 나서야, <벌새>를 작업하며 묵혀놨던 많은 감정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모두가 내가 기쁠 거라 생각하는 시기에 가장 아프기도 했고, 관객과 만나는 순간엔 뛸 듯이 기쁘기도 했다. 이 글은 변화했던 그 감정들의 기록이자, ‘벌새’가 세상과 만난 날들의 기록이다.
베를린국제영화제
거대하고 지적인 영화제 (2019년 2월 10~17일 체류)
베를린국제영화제는 부산국제영화제와 더불어 <벌새>가 상영된 국제영화제 중에서 가장 큰 영화제였다. 영화제의 규모나 관객수, 관객과의 대화(GV) 때 관객의 호응도, 표 매진 속도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두 영화제는 큰 영화제였고, 무엇보다 영화광들이 몰려 있는 그 분위기가 뜨거웠다. 해외영화제가 처음이었던 나로서는 부산과 베를린이 굉장한 축제였음을 다른 영화제들을 다녀보며 알게 되었다.
베를린국제영화제는 시내의 포츠담 광장을 중심으로 극장들이 모여 있는데, 소비에트 시대의 거대한 건축양식을 연상케 하는 거리가 인상적이었다. 첫 해외영화제였기에 영문 EPK(보도자료)부터 EFM(유러피언필름마켓) 상영 조율, 엽서와 포스터 디자인까지 할 일이 참 많았다. 또 한 유럽 프리미어인 만큼 영화제 홍보 전문가, 즉 퍼플리시스트의 고용문제로 조수아 PD와 논의를 많이 했다. 첫 작품 <THEY>를 칸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한 조수아 PD는 작은 영화일수록 이런 큰 영화제에서는 퍼블리시스트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예산 문제로 퍼블리시스트 고용은 무산됐고, 대신 조수아 PD의 지인에게 무료 조언을 받았다. 토론토국제영화제, 시애틀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였던 캐슬린 맥이네스 홍보 전문가가 해외영화제 팁을 알려주었다. 그녀가 강조한 몇 가지는 메인 스틸을 고르는 방법, 위험과 긴장이 느껴지는 시놉시스에 관한 실용적 조언이었다. 결국 우리는 국내 시놉시스와 다르게 은희가 병원에 가는 문장을 추가해 영화적 ‘긴장’을 드러내려고 노력했다. 이외에도 <벌새>의 음악감독 마티아 스턴이샤는 자신이 아는 베를린 매체들에 <벌새>를 연결해주려 했다. 이 모든 크고 작은 일들을 진행하며 첫 프리미어 전까지, DCP(디지털시네마 패키지) 사고나 자막 사고에 대한 알 수 없는 불안이 찾아왔다.
<벌새>는 성장영화 부문인 제너레이션 14+(14살 이상의 성장영화 섹션)에서 상영했고, 첫 상영을 베를린의 예술의 전당 같은 세계 문화의 집(Haus der Kulturen der Welt) 극장에서 했다. 극장에서 기술 체크를 했는데, 영화제에서 일하는 남자 스탭의 손에 색색의 매니큐어가 예쁘게 발라져 있었다. 한국을 떠나왔구나, 라는 해방감이 느껴지는 반가운 순간이었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유럽은 생애 처음이었다. <벌새>의 음악감독 마티아 스턴이샤는 조수아 PD의 소개로 만난 베를린 거주 슬로베니아 작곡가다. <벌새>가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는 것에 무척 신난 그는 관광 가이드처럼 베를린 시내 곳곳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나보다 나중에 도착한 배우들이 도착한 저녁엔 제너레이션 섹션 공식 댄스파티가 열렸다. 제너레이션 파티에는 청소년 배우들도 오기에 (박)지후는 다른 나라에서 온 청소년 배우들과 금세 친해져 함께 춤을 추었다. 청소년인 지후가 먼저 떠나고, 베를린 특유의 공장을 개조한 듯한 클럽에서 이승연·김새벽 배우, 조수아 PD, 스크립터 세미와 밤늦도록 춤을 췄다. 베를린에서는 조수아 PD, 새벽씨와 방을 썼는데 어느 날 새벽씨가 길에서 노란 꽃을 주웠다며 호텔 방 생수 통에 꽂아두었다. 나는 그 꽃이 놓인 책상에서 요동치는 감정에 대한 일기를 썼다. 베를린을 떠올리면 그런 작은 순간들이 마음에 남는다.
<벌새>의 첫 상영 레드카펫 당일이었다. 원래 모든 영화의 레드카펫에는 프로그래머가 동반 입장을 하는데, 그날 수석 프로그래머인 마리안느 레드패스가 오지 않았다. 우리 영화를 잘 대접하지 않는 건가 하는 생각에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마음도 잠시, 매진되었던 프리미어 상영에 대한 반응은 고무적이었다. 1천석 극장에서 GV를 했는데, 진보적인 질문도 무척 좋았고 답변할 때마다 관객은 엄청난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그 분위기가 너무 따뜻해서 마치 집에 온 느낌이었다.
2월 16일 제너레이션 섹션 전체 시상식 날, 레드패스가 몸 상태를 이유로 또 불참했다. 영화제측에서는 레드패스의 입간판을 가져와서 그녀의 쾌차를 유머러스하게 기원했다. 그 순간 몹시 부끄러워졌다. 삶에서 자기위주의 생각들에 빠지는 스스로를 발견하며 늘 반성하고는 하는데 이번 사건도 그러했다. 속으로 스스로를 희화화하고 있을 무렵, <벌새>가 갑자기 호명되었다. 제너레이션 14+ 부문 심사위원대상이었다. 상은 청소년 심사위원이 주는 수정곰상, 국제 심사위원이 주는 대상, 이렇게 두개가 있는데 우리는 국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 시상식이 끝나고 다 함께 고급 중식당으로 갔다. 해외 배급사 팀장님이 축하한다고 말하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나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 사실 영화제측에서는 수상여부를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 전날 저녁까지 알려준다고 했는데 아무런 연락이 없어 시상식 날 우리는 모두 관광을 갔다. 다들 관광하다 부랴부랴 시상식에 가느라 시상식 사진 속에서는 모두가 평상복 차림이다. 그날 밤 우리는 몹시 얼떨떨한 상태였다.
베를린국제영화제에는 주연배우뿐만 아니라 배급사 관계자, 스크립터 세미까지 함께 왔다. 내가 기억하는 세미의 모습은 <벌새> 촬영장소인, 폐교된 언남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혼자서 모든 짐을 이고 지고 걸어가는 뒷모습이다. 어느 날 보게 된 그 뒷모습이 너무 맘이 아팠는데, 우리가 이렇게 베를린에 함께 와 있다. 세미가 말했다. “<벌새>에는 영지의 대사처럼 기쁜 일, 슬픈 일이 함께 있고, 여기 함께 와서 참 좋아요.” 마음속에 애잔한 기쁨이 차올랐다.
이스탄불국제영화제
아름다운 도시로 기억될 영화제(2019년 4월 12~17일 체류)
이스탄불국제영화제는 4월에 열리는 영화제로, 베를린 영화들이 대거 초청되는 영화제다. <벌새>가 상영된 국제경쟁 섹션에는 베를린, 칸에서 수상한 <시스템 크래셔>, <시너님즈> <경계선> 등의 영화가 있었다. 베를린 때도 그랬지만 이스탄불국제영화제에서도 여성감독의 영화들이 많았다. 올 한해 영화제들은 경쟁적으로 감독 성비를 맞추려고 노력하는 분위기였다. 3대 영화제(프랑스 칸국제영화제, 이탈리아 베니스국제영화제, 독일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 섹션엔 여전히 여성감독의 비율이 적지만 경쟁 외 섹션에서는 모두 성비를 맞추는 분위기였고, 3대 영화제를 제외한 영화제들은 경쟁 섹션에서도 그 비율을 잘 맞췄다. 그런 해에 <벌새>를 상영하게 된 것은 기쁜 일이었다.
이스탄불국제영화제는 터키에서 가장 큰 영화제지만 마을 축제 같은 느낌을 줬다. 공항에 도착하자 ‘김보라’라고 한글이 적힌 팻말을 든 스탭이 나를 반겼다. 터키 스탭인 일라이다가 유창한 한국어로 인사를 했다. K팝을 좋아하는 터키 여성이었는데, 독학으로 한글을 배웠다고 했다. 세심한 환대가 참 감사했다.
도착한 다음날 영화제 공식 파티를 갔는데, 보스포루스해협을 가르며 요트를 타는 선상 파티였다. 와인을 마셔서 약간 취한 채 해협을 바라보는데, 오르한 파묵의 <이스탄불>에서 자주 묘사되었던 해협을 실제로 보며 유럽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 생각했다. 매일 밤 영화제에 초대된 감독들을 대상으로 한 저녁 모임이 열렸는데, 소규모라 다른 영화인들과 대화를 많이 나눌 수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유럽에서 온 한 감독과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이마 베프> 이야기를 하다가 촬영장에서 일어나는 격렬한 감정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인정투쟁을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촬영장에서 어떤 크고 작은 갈등을 만드는지, 그런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성찰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다음날, 미국 IFP 랩 후반작업 워크숍(10편의 장편을 뽑아 후반 과정을 지도하는 미국독립영화협회의 워크숍)을 함께 들었던 터키 감독 젱크를 만났다. 젱크는 <씨네21> 1238호에 소개할 트라이베카영화제에서 첫 상영된 할루크 빌기네르(<윈터 슬립>의 주연) 주연의 <노아 랜드>라는 장편을 만든 감독이다. 젱크는 나에게 유명한 터키식 렌틸콩 식당을 소개했다. 렌틸콩 수프, 소고기 찜, 절인 야채 요리는 무척 맛있었다. 우리는 앞으로의 영화제 계획, 터키 사회의 보수성, 낭만적 연애 관계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식사를 마치고 밤거리를 걸었다. 강가를 걷는데 기도 소리가 들렸다. 하루에 5번씩 들리는 이슬람교의 기도 소리는 이스탄불이란 도시를 완성하는 무언가였다.
마지막 밤 시상식에서 <벌새>는 국제경쟁대상인 골든튤립상을 받았다. 내 이름이 호명될 때, 이 상이 대상이 맞는지 옆에 앉은 영국 감독에게 재차 묻고 나가서 수상 소감을 말했다. 국제경쟁의 심사위원장인 린 램지 감독이 시상했다. 린 램지는 다정한 얼굴로 영화를 잘 봤다고 덕담해주며 내 손등에 키스했다. 시상식 동영상을 보면 내가 사랑에 빠진 듯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하도 린 램지 감독만 보니까 카메라맨이 정면을 봐달라고 외쳤다. 그 후, 심사위원들이 페이스북을 통해 축하 문자를 보냈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제네시스>의 필리프 르사주 감독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한 터키영화 <시벨>의 주연배우를 비롯해 모두가 이 영화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 마음을 나눠주었다. 영화를 통해 연결될 수 있어 감사했다.
폐막식 후, 이스탄불국제영화제 위원장이 디제잉을 하는 파티에 참석했다. 위원장이 디제잉하는 파티라니! 그런데 시상식 후, 갑작스레 허기가 져서 일라이다와 함께 클럽 근처 케밥집에 갔다.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을 탄 터키영화 <올레이>팀이 있었다. 목례를 하고 케밥을 먹고 숙소로 왔다. 방으로 돌아오자 애인이 문자로 노래 한곡을 보내왔다. 지지 마신의 <Clouds>를 들으며, 영화 같던 이스탄불의 밤이 끝나갔다. 어딘가 모를 안도감이 밀려왔다.
키프로스국제영화제
다정한 마을 축제 (2019년 4월 17~21일 체류)
키프로스국제영화제는 키프로스 최대 영화제지만, 국토가 작다보니 다정한 마을 축제 분위기를 풍겼다. 참석해야 하는 기자회견이나 부대 행사들이 거의 없어 휴양 목적으로 가기에도 좋다. 나를 담당한 스탭 에비는 키프로스는 너무 작은 나라라 모두가 서로를 알고, 그래서 서로 잔 사람이 다 겹친다는 농담을 했다. 에비는 20대 여성이었는데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에비를 통해 키프로스가 북키프로스, 남키프로스로 나뉜 분단국가라는 것, 그에 따른 역사나 키프로스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키프로스 사람들은 외부인에게 굉장한 호기심을 보였다. 도착해서 너무 피곤한데 이들이 계속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시차 때문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다행히 에비는 내가 의사를 분명하게 밝혀줘서 좋다며, 오히려 게스트가 속내를 말하지 않을 때가 불편하다고 했다.
다음날, 에비, 에비의 친구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은 차를 타고 그리스 원형극장 같은 살라미스 원형극장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보는 바닷가 경치는 황홀 그 자체였다. 키프로스는 와인으로도 유명해서 와인 시음 농장에 가서 와인을 마시며 낮 시간을 보냈다. 혼자 다녔더라면 못 갔을 좋은 곳에 데려가준 에비에게 정말 고마웠다. 에비는 내가 감사를 표하자, 자기가 생각해도 내가 혼자 다녔으면 이런 곳에는 못 가고 이상한 관광지나 갔을 거라며 사랑스럽고 호방한 자찬을 했다. 이스탄불, 키프로스에서도 기억에 남는 것은 길고양이들이 평화롭게 거리에 누워 있는 풍경이다. 스페인에 사는 친구가 언젠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스페인에서는 개들도 참 온순해. 왜냐하면 그 나라의 기운을 닮거든.” 한국은 길고양이가 평화롭게 길에 누워 있을 수 있는 나라인가. 답할 수 없다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부산에서 아시아 프리미어, 베를린에서 유럽 프리미어, 그리고 마지막 북미 프리미어를 어디로 할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벌새>가 트라이베카영화제 국제경쟁과 ‘뉴 디렉터스/뉴 필름스’ 시리즈에 동시 초청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해에 화제가 된 예술영화를 25편 내외로 뽑아 모마현대미술관과 링컨센터 영화협회에서 상영하는 시리즈인 ‘뉴 디렉터스 쇼케이스’는 그간 많은 유명 감독들의 데뷔작을 틀었다. 이 쇼케이스가 좋은건 무조건 <뉴욕타임스>에서 상영영화들을 기사화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미 트라이베카에 구두로 상영 의사를 밝혔는데, 베를린국제영화제 때 뉴 디렉터스측에서 연락이 왔다. 뉴 디렉터스에 <벌새>가 떨어졌단 이야기를 듣고 트라이베카 결정을 내렸는데, 잘못된 정보였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다들 너무 상업화된 트라이베카영화제보다는 시네아스트로 인정받을 수 있는 뉴 디렉터스에 상영하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조수아 PD는 <벌새>는 이미 부산과 베를린 수상을 통해 작품성을 인정받았으니 오히려 상업적인 트라이베카에서 북미 프리미어를 함으로써 두 가지 면을 갖춘 영화로 보여지는 것도 북미 배급에 좋을 것같다고 했다. 하지만 이 모든 전략을 떠나 조수아 PD도 새벽씨도 똑같이 이야기하는 것이 있었다. “먼저 약속한 곳이랑 하자.” 사실 그것이 정답이었다. 약속한 곳이랑 하는 것, 그것이 맞았다. 우리는 트라이베카에 확정 답변을 줬고, 후에 트라이베카에서 3개의 상도 타게 되면서 그 결정을 한 사실을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앞으로도 삶의 순간에 이것을 잊지 말자 다짐하면서.
* <씨네21> 1238호에선 트라이베카영화제를 중심으로 더 다양한 영화제 이야기들을 펼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