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아침. 윤성현, 조성희 감독은 디렉터스 체어와 의상을 이고 지고 <씨네21> 스튜디오로 들어섰다. <씨네21> 표지 촬영을 위해 윤성현 감독은 “겸사겸사” 옷을 새로 장만했고 조성희 감독은 전날 “급하게” 머리 염색을 했다. “형, 염색했구나.” 1년 만에 만났다면서도 두 사람은 서로의 변화를 재빠르게 알아챘다.
2008년. 한국영화아카데미 25기 동기로 만난 두 감독은 아카데미 장편영화 제작연구과정을 통해 <파수꾼>(2010)과 <짐승의 끝>(2010)을 만들었다. 이들은 이른바 포스트 ‘박봉김’(박찬욱·봉준호·김지운)으로 명명되기 충분한 영화적 에너지를 선보이며 한국영화계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하지만 이후의 행보는 조금달랐다. 조성희 감독은 <늑대소년>(2012)과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2016, 이하 <탐정 홍길동>)을 만들며 꾸준히 한국 상업영화의 장르적 확장을 꾀했다. 윤성현 감독은 <파수꾼> 이후 오랫동안 ‘신작 준비 중’이라는 소식만 알려왔는데, 2020년 2월 드디어 신작 <사냥의 시간>이 개봉한다. <파수꾼>의 이제훈과 다시 뭉쳐 만든 <사냥의 시간>은 윤성현 감독이 좋아했던 디스토피아적 대체 역사물의 장치를 빌려와 만든 청춘영화이자 추격 액션영화다. 한편, <늑대소년>으로 판타지 로맨스, <탐정 홍길동>으로 탐정영화를 만들었던 조성희 감독은 한국영화 최초로 우주를 배경으로 한 SF영화 <승리호>(가제)를 선보인다.
2020년 한국영화 기대작 <사냥의 시간>과 <승리호>의 감독으로서, 영화계의 소문난 절친으로서, 서로의 믿음직한 팬으로서, 윤성현 감독과 조성희 감독이 마주 앉았다. <씨네21> 신년호의 얼굴로 두 감독을 만난 건, 이들의 영화가 한국영화계에 던지는 유의미한 화두가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영화적인 것은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붙잡고, 한국영화에서 시도되지 않은 것을 시도한 두 감독과 2019년의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냈다.
-<씨네21>의 신년호 표지를 두분이 장식하게 됐는데, 커버 인터뷰 연락 받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들던가.
=조성희_어리둥절했다. 인터뷰할 때도 아닌데 왜 연락을 주셨지? 그래서 윤성현 감독의 <사냥의 시간>을 소개하는 도우미가 돼야지 하는 마음으로 나왔다.
=윤성현_그런 자리 아니라던데. <씨네21>에서 우리를 응원해준다고….
조성희_그냥 하는 얘기지 뭐. 어쨌든 기분은 좋았다. (웃음)
윤성현_나도 처음엔 당황했는데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표지 모델? (웃음) 그러고 집을 나섰는데, 집 앞 로또 매장 가판대에 <씨네21>이 보이더라. 그거 보면서 또 기분이 좋아져서 사람들한테 자랑하고 다녔다.
조성희_윤성현 감독과 함께한다는 데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성현이 영화도 곧 나오는데 거기에 도움이 되면 좋을 것 같았다.
윤성현_왜 자꾸 그렇게 몰아가~!
조성희_<승리호> 개봉은 아직 멀었으니까.
-애초 2019년 개봉이 얘기됐던 <사냥의 시간>이 2020년 2월로 개봉을 확정했다.
윤성현_원했던 스케줄이 한번 틀어지면서 개봉 시기가 변경됐다. 올여름 개봉이 목표였는데, 후반작업을 그 일정에 맞출 수 없었다. <승리호>보다 많진 않겠지만 <사냥의 시간>도 CG가 800~900컷 정도 된다. 편집이며 CG며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고. 그럼 수능 시기에 맞춰 11월에 개봉하자 했는데 <겨울왕국2>가 11월 21일에 개봉한다고 해서 2월로 가게 됐다.
조성희_<승리호>는 11월 초에 크랭크업해서 지금 편집 중이다. 촬영 끝나자마자 몸살이 와서 이틀을 누워 있었는데, 3일째 되는 날엔 이렇게 누워 있으면 큰일 날 것 같아서 다시 나가서 일을 시작했다.
-서로의 작업에 대해 피드백은 잘해주는 편인가. 우선 조성희 감독은 윤성현 감독의 <사냥의 시간> 시나리오를 어떻게 읽었을지 궁금한데.
조성희_시나리오는 안 봤고 현장에는 한번 갔다. 성현이가 현장에서 ‘형, 이런 영화야’ 하면서 1~2분 영상을 보여줬는데 무국적 영화 같았다. 우리나라에도 드디어 이런 영화가 나오는구나 싶었다. 갑자기 영화가 엄청 기대되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영화가 너무 엉뚱하면 어떡하지 싶었는데 너무 근사했다. 이 영화는 절대 그냥 못 넘어갈 영화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한 형이자 동료인 조성희 감독에게 시나리오를 보여줄 법도 한데.
윤성현_어느 누구에게도 시나리오를 보여주지 않는다. 혼자 고민하고 혼자 정답을 찾아가는 편이다. 정리가 안된 상태에서 시나리오를 보여주게 됐을 땐 사람들의 이야기에 휘둘리게 되더라. 그리고 시나리오는 글이지 영화가 아니니까.
조성희_나는 사람들한테 물어보고 사람들이 그렇다 하면 그런 줄 알고 잘 받아들인다. 기본적으로 스스로에 대한 자신이 없어서 그렇다. 성현이는 다르다. 예전에 성현이가 그런 말을 한 적 있다. 한국영화아카데미 다닐 때, 선생님에게 시나리오 피드백을 받고 왔다. “선생님이 뭐라셔?” 물었고 성현이가 말했다. “이건 나밖에 못 고쳐. 나만 알아.” 그게 너무 멋있었다. 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감독은 저래야 되는데. (웃음) 그런 자기 확신을 배웠던 것 같다.
윤성현_자기 확신이라기보다 내 생각들이 흔들리지 않았으면 싶어서 그런다. 영화를 하면서 후회하고 싶지 않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최선을 다해서 만들고, 설령 잘못되면 내가 책임지고 내가 반성하면 되니까. 외부적 요인에 흔들려서 내가 원하는 방향과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되면 더 많이 후회하게 될 것 같다. 형과는 반대로 나는 약하기 때문에 내 생각을 지키고 밀어붙이려 하고, 형은 강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의견을 융통성 있게 받아들인다. 삶의 태도가 훨씬 성숙하다고 할까. 나는 상업영화를 하고 싶다기보다 내가 좋아했던 작품들, <아키라>(1988)나 <블레이드 러너>(1982), <에이리언>(1979), <터미네이터>(1984)같이 상상력이 풍부한 영화들에 대한 선망이 있다. 그런 영화는 예산이 클 수밖에 없고 하고 싶다고 무작정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방법론은 모른 채 하고 싶다는 생각만 크니까 성희 형이 그런 조언을 해줬다. 지금과 같이 경직되어 있으면 네가 가고자 하는 길로 갈 수 없으니 유연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고.
조성희_성현이는 개인적 상상력에서 출발한 영화들을 흥미로워하고 그런 영화를 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사냥의 시간>이 그런 영화라고 생각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상상력에서 출발한 영화.
-<사냥의 시간>은 순제작비 90억원의 상업영화다 보니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만의 방향성을 고수하기 힘든 지점도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
윤성현_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장편영화 제작연구과정으로 <파수꾼>을 만들 때 워낙 외부에서 온 스트레스가 컸기 때문인지 이번엔 외부의 이야기 때문에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거나 하지 않았다. 생각한 것보다 강도가 약했던 것 같다. 투자 과정에선 힘든 부분이 있었지만, 겨우겨우 소생하듯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이 된 이후로는 괜찮았다. 사실 투자사 입장에선 이 영화가 데이터가 없는 위험한 영화일 수 있다. 다른 영화와 비교하기 모호한 영화다 보니 감독을 흔들어서 투자사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도저도 아닌 영화를 만드는 것보다 그냥 감독을 믿고 가자는 느낌을 받았다. (웃음) 다만 <사냥의 시간> 같은 영화는 순제작비 90억원으로는 찍기 어려운 영화라 예산에서 오는 한계와 어려움은 있었다.
-<승리호>는 제작비 200억원대의 대작이다. 점점 예산이 큰 영화를 만들고 있고, 대작영화를 맡겨도 좋은 감독이라는 신뢰를 업계에서 얻은 게 아닌가 싶은데.
조성희_연출자의 역할이 적지 않겠지만 영화는 개인이 만드는 게 아니다. 여러 스탭이 있고 배우가 있고 시나리오가 있다. <승리호>도 아이템에 대한, 작품에 대한 믿음과 야심으로 만들어지게 된 것 같다. 나는 그냥 영화를 만드는 여러 사람들 중 한명이라 생각한다. 제작비 규모에 대한 부담은, 일단 일을 시작하면 부담을 느낄 새도 없다. 업무 강도가 세서 하루하루 주어진 걸 무사히 해내자는 생각뿐이었다. (웃음)
-윤성현 감독은 데뷔작 <파수꾼> 이후 9년 만에 두 번째 영화를 내놓는다.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린 이유가 있다면.
윤성현_<파수꾼>으로 인한 부담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생각해보니 또 없지 않아 있었던 것 같다. 당사자가 성과나 성공을 체감해야지 부담을 느낄 텐데, 당시의 나는 정말 <파수꾼>의 성과를 체감하지 못했다. 다만 영화에 대한 칭찬이 무의식에 녹아들었던 것 같고, 그것이 어느 정도의 신중함을 키운 것 같다. 애초 다음 작품은 <파수꾼>과는 다른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을 만들고 싶었다.
조성희_성현이는 굉장한 완벽주의자다. 스스로 납득을 못하면 힘들어한다. 더 나은 걸 만들기 위해서 시간이 걸렸다고 생각한다. 영화 한편 들어가기가 힘들고, 기회가 보인다 싶으면 그 기회를 붙잡고 싶기 마련이다. 특히 상업영화 데뷔하는 입장에선 더 그렇다. 그런데 성현이에겐 그보다 중요한 게 있었던 것 같다.
윤성현_9년 동안 여러 제안을 받았지만 내가 충분히 흥분감을 못 느꼈던 것 같다. 내가 좋아서 하는 영화인데 내가 즐거워야지 하지 않겠나. 좋아하는 마음으로 하는 일이어서 순수하게 접근했던 것 같다. 조급해하지 않고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게 잘한 일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의 <사냥의 시간>
-<사냥의 시간>과 관련해 <아키라> <터미네이터> <매드맥스> <블레이드 러너> 같은 영화들을 언급했는데, 최초의 이야기는 어떻게 구상했나.
윤성현_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가진 영화들에 애정이 크다. 사이버펑크, 스팀펑크 장르, 대체 역사물의 SF 장르를 좋아한다. 한국에서도 그런 영화를 만들면 재밌지 않을까 해서 시나리오를 썼는데 3년 가까이 준비했던 사이버펑크 영화가 투자가 잘되지 않아 엎어졌다. 그러고 나니 4, 5년이 지났더라. 2016년 초쯤 준비하던 영화를 정리하고 나서 그럼 이제 뭘 하지 생각했다. 당시 ‘헬조선’이라는 말이 유행이었고, 굳이 사이버펑크까지 가지 않더라도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헬조선과 연결지으면 되겠다 싶었다. 거기서부터 시작된 이야기다. 주변 친구들도 다들 삶이 팍팍하고, 돈 외에 중요한 가치는 없는 것 같고, 돈이라는 가치밖에 추구할 게 없는데 돈조차 벌기 어렵고. 그러면 진짜 지옥을 그려보자 했던 거다. 장르적으로.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가져가되 좀더 직선적인 이야기를 해봐야지 하면서.
조성희_아~ 이게 헬조선에서 출발한 거구나.
윤성현_시작은 그랬고, 개인적 영화 취향이 반영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물론 나는 켄 로치와 미하엘 하네케 감독에게도 굉장한 애정이 있다. 반대로 팀 버튼 영화도 좋아하고. 그 안에는 스티븐 스필버그와 리들리 스콧, 제임스 카메론, 마틴 스코시즈도 있다. 분명한 건 켄 로치는 나이 들면서 좋아하게 됐고, 순수하게 영화를 좋아한 어린 시절엔 <에이리언>, <E.T.>(1982), <죠스>(1975), <블레이드 러너> 같은 영화들을 좋아했다. 직선적인 이야기 구조의 영화들. 거기에 헬조선이 더해지는 건데 남미에 갔다와서 큰 충격을 받았다. 인플레이션이 너무 심해서 생수 하나를 사려고해도 화폐를 다발로 내야 하고, 저 멀리서 총격 소리가 들리고, 현지 돈을 달러로 재환전하려니까 달러를 들고 출국할 수 없다 하고.
조성희_그런 장면이 <사냥의 시간>에 나오나? 진짜 헬조선인데.
윤성현_그 안에 청춘들의 이야기가 있고 장르적인 색채가 더해진다.
조성희_재밌겠다!
윤성현_내가 이거 얘기 다 했는데,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나보다. (웃음)
-조성희 감독이 지금껏 만든 영화들을 봐도 현실적 시공간을 기반으로 하는 영화는 거의 없다. <남매의 집> <짐승의 끝> <늑대소년> <탐정 홍길동> 모두 영화적 시공간을 재창조한 작품들이다.
조성희_나는 일부러 영화적 시공간을 만들어야지 해서 만든 것은 아니고 하다보니 그렇게 됐다. (웃음) 다른 이야기를 잘 못한다. ‘나만의 작품 세계’ 그런 건 아니고, 심심한 대답이지만 만들다 보니 그렇게 됐다.
윤성현_나는 어렸을 때부터 찾아보던 영화가 그런 영화들이라. 스필버그 영화 중에서도 어렸을 때 제일 좋아한 건 <듀얼>(1971), <E.T.>, <죠스>인데 <E.T.>에서 자전거 타고 하늘 나는 장면은 볼 때마다 가슴 두근거린다.
조성희_최근에 느끼는 건데, 요즘 10~20대는 그런 영화들이 따분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우리 세대가 보고 자란 영화들, 미국영화들. 예를 들어 나는 <백 투 더 퓨처> 시리즈를 정말 좋아하는데 인터넷 평점을 보면 지루하다는 애들이 많다. 세대가 변했구나, 라는 걸 실감한다. 우리가 재밌게 보고 자란 영화들이 지금의 젊은 세대에겐 두근거림을 주지 못하는 것 같다. 요즘은 두 시간 동안 휴대폰 안 보고 극장에 앉아 있는 게 무슨 도전이잖나. 더 많은 자극과 충격을 원하는 것 같다.
-윤성현 감독은 과거 차기작을 준비하며 <씨네21>의 대담 자리에 나왔을 때도 “한국에선 점점 시네마틱한 영화들이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마침 올해 마틴 스코시즈 감독이 ‘시네마란 무엇인가’라는 거대한 화두를 던지기도 했는데, 두분이 생각하는 시네마란, 시네마틱한 순간이란 무엇인가.
윤성현_영화가 아니면 안되는 것에 대한 고민은 깊은데, 사실 잘 모르겠다. 판타지 장르라고 해서 다 영화적인 게 아니고,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도 시네마틱한 순간이 있는 걸 보면 장르적 영역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또 현재 한국에서 나오는 한국 상업영화와 TV에서 보는 드라마와 무슨 차이가 있을까 고민했을 때, 개인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고 느낀다. 모든 영화가 그렇다는 건 아니다. <기생충>처럼 시네마틱한 영화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영화도 많다. 알폰소 쿠아론의 <그래비티>(2013)나 스필버그의 <듀얼>도 이야기가 복잡한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시청각적 표현이나 섬세한 심리 표현이나 영화의 톤 앤드 매너를 드라마에선 구현하기 힘들다. 생각 정리가 잘 안되지만, 영화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선 계속 고민하고 있다.
조성희_영화만이 할 수 있는 게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게임도 할 수 없고, 드라마도 할 수 없는데 영화는 할 수 있는 것. 아직까진 그런 게 존재한다고 본다.
윤성현_영화는 극장과 같이 존재한다. 차를 타고 영화를 보러 가서 불 꺼진 극장에 앉아 스크린을 바라보는 순간, 그 과정 전체가 영화적 영역에 포함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경험과 체험의 영역과 연결되는 것 같다. 복잡한 이야기 구조 같은 건 TV드라마에서도 볼 수 있다. 말도 안되는 반전의 이야기를 드라마에서 무수히 보지 않나. 드라마 <미생>이나 <나의 아저씨>는 드라마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라 생각하는데, 영화에선 그 수많은 캐릭터의 사연과 역사를 다 훑을 수 없다. 영화는 대하소설이 아니라 좀더 시에 가까운 것 같다. 마틴 스코시즈가 제발 휴대폰으로 영화 보지 말라고 이야기한 것도 안타까운 현실의 반영이라 생각한다. 영화적인 것은 시청각에 대한 고민을 포함한다. 휴대폰으로 영화를 보면, 사운드만 하더라도 영화가 구현하는 최고 수준의 사운드를 투 채널로밖에 들을 수 없다. 작은 화면으로 영화를 보니까 시네마틱한 순간을 경험하는 게 아니라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이야기와 표현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런 이유로 마틴 스코시즈가 휴대폰으로 보지 말라고 말한 게 아닐까 싶다.
조성희_맞다. 영화는 극장을 이용하는 매체다.
-그런 의미에서 <승리호>는 극장에서 봐야 하는 영화인가.
조성희_<승리호>는 사람뿐만 아니라 우주선도 주인공인 영화라서 우주선이 어떤 건지 알려면 극장에서 봐야 한다. 휴대폰으로 보면 이 우주선이 어떤 애인지 잘 모른다. (웃음) 윤성현 감독이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는 과정까지가 영화의 영역에 포함된다고 말했는데, 나는 그만큼 영화가 특별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가진 매체의 특성 중 하나는 넓은 공간에서, 큰 화면을 보고, 큰 소리를 듣는 거다. <승리호>는 그런 큰 화면, 큰 소리를 책임지려고 노력하는 영화다.
-<승리호>는 확장성을 가진 하나의 IP로서 영화 외에 웹툰, 게임 등과 연계할 계획도 있다고 들었다.
조성희_그 부분에 대해선 아는 게 없다. 나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서 영화에만 집중하고 있다. IP 사업은 잘 모르는 영역인 데다 영화 만드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관여할 새가 없다.
-<승리호>는 <늑대소년> 이전에 구상하고 써둔 시나리오다.
조성희_신인감독이 돈도 많이 들어가는 SF 대작을, 게다가 이야기도 덜 다듬어진 영화를 연출하려 했던 건데, 그때는 만들 수 있을 줄 알았다. (웃음) CG 기술의 측면에서도 당시는 만들기 힘든 프로젝트였다. 언젠가는 만들어야지 하고 가지고 있던 이야기였는데, <탐정 홍길동> 이후에 ‘그냥 이거 한번 해볼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하게 됐다. 계속 힘없는 대답을 해서 미안하다. (웃음) <사냥의 시간>도 마찬가지지만 <승리호> 역시 제작에 들어가기까지 지난하고 고생스러운 과정이 있었다. 초고는 <짐승의 끝> 끝나고 썼다. 그 시나리오는 지금 다시 보면 세줄도 읽기 힘들다. (웃음)
윤성현_아마도 초고에선 우주 쓰레기 이야기가 있었고 그걸 수거 처리하는 사람들이 나왔던 것 같다. 그 이야기가 아직도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다. 조성희 감독이 언젠가는 만들 작품이라 말했고, 언제가 언제가 될지 기다렸는데 드디어 그때가 온 것 같아 반갑다. 형이 <승리호> 하는 거 보면서 마음의 위안도 얻었다. <파수꾼> 이후 엎어진 프로젝트를 나도 언젠가 할 수 있겠다는 위안. 아직 <승리호>의 시나리오를 읽진 않았고 보여달라고도 하지 않았다. 영화적인 것에 대해 고민하다 보니까 시나리오를 보고 피드백을 주는 게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탐정 홍길동> 땐 시나리오 보고 엄청 뭐라 했는데 막상 영화를 보니 내가 시나리오에서 보지 못한 게 많더라. 조명의 밝기만으로도 달라지는 게 영화고, 글만 보고는 영화를 알 수 없으니까.
우주 배경의 SF영화 <승리호>
-<승리호>는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첫 우주 배경의 SF영화다. 우주영화, SF라는 장르에 대한 꿈이 예전부터 있었나.
조성희_그럼. 일단 근사하니까. 우주선이 날아다니고 거대한 기계가 날아다니고, 이런 걸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게 흥미롭지 않나. SF영화가 많다 해도 아직까지 한국에선 이런 장르영화가 귀하다. 한국영화가 발전했다 하고, 세계가 인정하는 영화시장이라고 하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해보고 싶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우주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은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텐데. 제작비 문제, 노하우 문제, 이런 장르영화를 한국에서 만들어야겠다는 감독이나 작가들의 의지 문제 등등. 그런데 나는 <승리호>를 만드는 게 큰 모험이나 도전, 개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요즘 관객은 넷플릭스에만 접속해도 무수한 SF영화를 볼 수 있다. 영화에서 우주선이 날아다니는 게 신기한 일이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이제 한국에서도 우주영화가 나올 때가 됐다고 생각하고, 다양한 한국영화 중에서 우주영화 한편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윤성현 감독은 <승리호>의 어떤 점이 기대되나.
윤성현_제일 기대되는 건….
조성희_억지로 얘기 안 해도 된다. (웃음)
윤성현_형이 얘기한 것처럼 한국영화가 조금씩 장르적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부산행>(2016) 이전에는 좀비물이 말이 되냐 했지만 이제는 조선시대의 좀비 이야기도 나오고. 재난영화 <백두산>도 그렇고 장르적으로 나아가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주영화도 마찬가지다. 우주영화가 한편 만들어졌다고 끝이 아니다. 이후 세대가 영향을 받고 발전시켜나갈 수 있다.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가 끼친 영향이 있지 않나. 그 영화가 나옴으로써 할리우드 우주영화도 확장될 수 있었다. <승리호>가 한국에서 처음 만들어지는 우주영화라는 점, 첫발을 내딛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본다. 예전에는 ‘그래 한국영화니까 감안하고 봐야지’ 하는 생각이 있었을지 몰라도 요즘 관객은 그런 태도로 영화를 보지 않는다. 용서하는 마음으로 보지 않고 냉정한 시선으로 본다. 한국의 CG 기술이 충분히 우주를 구현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고, <승리호>도 충분히 설득력 있는 우주영화로 완성될 것 같다. <승리호> 이후로 많은 것이 달라지지 않을까. 조성희 감독은 표현주의적 영역에서 특출난 재능을 가진 감독이고 그런 부분에서 관객을 쉽게 설득시킬 수 있는 감독이라 생각한다. 아마 나보고 <늑대소년>을 만들라 했으면 사람들을 납득시키지 못했을 거다. 우주야말로 정말 어려운 영역 아닌가. 조성희 감독이라면 어련히 잘하지 않을까. (웃음)
-<승리호>와 관련해선 캐릭터 정도만 공개된 상태다.
조성희_죄송하다. 아직은 영화 얘기를 자세히 할 수 없다. 제작사에서 입조심하라고…. (웃음)
-우주영화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는데 <승리호>는 어떤 유형의 우주영화인가.
조성희_하드 SF는 아니다. 가족영화의 느낌이 있고 귀엽고 아기자기하다. 개인적으로는 가족들이 이 영화를 많이 봤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아이들이 재밌게 보면 좋겠다.
-윤성현 감독은 <파수꾼>에 이어 이제훈 배우와 다시 만났고, 조성희 감독은 <늑대소년>에 이어 송중기 배우와 다시 만났다.
조성희_송중기 배우와 다시 만나 편했다. 나를 많이 이해해주는 배우다. 내가 연출을 능숙하게 하는 감독이 아니라 현장에서 허둥대고 산만한데, 중기씨는 그러려니 하고 나를 잘 이해해준다. (웃음) 그런 점이 편하고 고마웠다. 운이 좋게도, 단편 때부터 함께 작업한 배우들이 모두 그랬는데, 이번에도 중기씨를 포함한 모든 배우들이 온화했다. 다들 부드럽고, 밝고, 분위기가 화목해서 배우들에게 너무 감사하다. <사냥의 시간> 현장 놀러 갔을 때 제훈씨를 봤는데 제훈씨는 굉장히 피곤한 얼굴이었다. “제훈씨 오랜만이에요” 했더니 “하, 윤성현 감독은 뭐 하나 그냥 넘어가지 않아요” 그러더라. (웃음)
-<사냥의 시간>이 어려운 작품이었나보다.
조성희_작품이 어려웠다기보다 윤성현 감독이 어려웠던 거다. 윤성현 감독은 영화가 최우선인 사람이다. 영화를 위해 달려가는 스타일이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치열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 치열함 속에서 보람을 느끼게 되고. 제훈씨도 치열하고 혹독한 현장을 즐기는 것 같다. <파수꾼> 때도 만만치 않았다고 들었는데 <사냥의 시간>에서도 아니나 다를까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윤성현_<사냥의 시간> 시나리오 쓰고 이제훈 배우에게 제일 먼저 보여줬는데, 제훈이가 긴가민가하더라. (웃음) 나에 대한 믿음으로 이 작품도 함께한 거라 생각한다. 박정민 배우도 마찬가지고. 평소에 많은 이야기를 공유하기 때문에 비록 8년간 함께 작품을 안 했어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나 싶다. ‘힘든 현장이 되겠구나’ 하는. (웃음) 감독의 비전에 대한 이해와 신뢰가 있기 때문에 실수를 하더라도 용서해줄 수 있는 관계로까지 발전한 것 같다. 감독의 페르소나가 된 배우들이 있는데, 이를테면 봉준호 감독과 송강호 배우처럼 혹은 윤종빈 감독과 하정우 배우처럼. 현장에서 서로를 잘 알고 이해하는 존재가 있다는 건 큰 힘이 되는 것 같다.
-조성희 감독은 <승리호>에서 리처드 아미티지와도 작업했다. 외국 배우와의 작업은 처음이었는데.
조성희_리처드 아미티지가 맡은 인물은 돈이 많은 부자 캐릭터다. 같이 작업하면서는, 한국 배우와도 의사소통이 잘 안되는데 외국 배우와 소통하려니 처음엔 겁이 났다. 근데 이것도 복인지 아미티지 역시 온화한 사람이었다. 온화의 정점! (웃음) 함께 연기하는 한국 배우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려 해서 좋았고, 무엇보다 놀란 건 준비를 정말정말 철저하게 해온다. 놀라울 정도로 연기 준비를 해서 오는데 현장에선 또 너무 유연한 태도를 보인다.
윤성현_미국은 배우의 연기 기반이 메소드다. 그러다보니 기본적으로 준비를 어마어마하게 한다. 대신 현장에선 그 인물이 되어 자유롭게 연기한다. 나도 외국 배우와 꼭 작업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조성희_리처드 아미티지와 사전에 이메일을 많이 주고받았는데, 본인이 생각하는 캐릭터의 역사, 이미지, 레퍼런스 자료를 내게 굉장히 많이 줬다. 미국 재벌의 연설문 같은 것도 발췌해서 보내주고. 그런데 정말 그런 생각을 했다. 영화 만들면서 가끔 성현이 생각을 한다. 오글거리는 얘기지만, ‘성현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같은 생각. 그런데 이번에 리처드 아미티지와 작업하면서, 아미티지와 성현이가 정말 잘 맞겠다는 생각을 했다. 의견도 불꽃 튀게 오갈 것 같고.
예술은, 재창조
-해외 진출과 관련해선 봉준호, 박찬욱 감독 등의 선례가 있는데. 마침 2019년엔 봉준호의 <기생충>이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의 수상 역시 점쳐지고 있는 상황이다. 올해 봉준호 감독과 <기생충>을 보며 후배 감독으로서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궁금하다.
조성희_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이 4강에 간 느낌이었다. 너무 감사하고 신기했다. 진짜 그룹 방탄소년단보다 자랑스러운, 한국영화계의 얼굴이고 재산이란 생각을 했다.
윤성현_<사냥의 시간>에서 함께한 최우식 배우가 <기생충>에 출연해서 나는 <기생충>의 수상을 내 일처럼 지켜봤다.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이 발표되던 새벽에 실시간으로 수상 결과를 확인했다. 무슨 상을 받을까, 왜 시상식 막바지가 되어가는데 발표가 안 나지. 그런데 황금종려상으로 호명되니까 어안이 벙벙했다. 이건 영화의 노벨상 같은 느낌이다. 역사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다. 일본은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의 역사가 있지만 우리는 최초였으니까.
조성희_그런 점에서 통쾌했다.
윤성현_영화과 학생들은 유럽영화사, 미국영화사, 일본영화사를 각각 공부한다. 일본에는 구로사와 아키라, 이마무라 쇼헤이, 오즈 야스지로 같은 감독이 존재하니까. 그런 일본영화의 기둥들이 하나의 사조와 역사를 만들었다. 예술은 재창조라 생각한다. 어느 날 갑자기 김연아 같은 천재 선수가 나타나서 올킬하는 게 예술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스템과 문화가 후대에 영향을 끼친다. 한국영화사에도 뛰어난 감독들이 있었지만 솔직히 자라면서 그들의 영화를 보고 영향을 받진 않았다. 봉준호, 박찬욱, 김지운 감독님의 영화를 보고 자란 지금의 세대는 우리와는 또 다른 문화를 만들 거다. 봉준호 감독님이 김기영 감독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역사가 이어지고 역사가 만들어진다는 차원에서, 계승하고 싶은 한국영화사가 쓰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었다.
-영화제나 상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두분 감독님도 멀지 않은 미래에 칸이나 아카데미에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조성희_우선은 <승리호>가 잘되면 좋겠는데. (웃음)
윤성현_다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게 감독들의 꿈인 것 같다.
-마지막으로 신작 개봉을 앞둔 서로에게 한마디씩 건넨다면.
조성희_<사냥의 시간>에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 확신한다. 성공의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흥행이 됐건 비평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건 훗날 두고두고 회자되는 영화가 됐건, 어떤 식으로든 <사냥의 시간>은 잘될 거다. 모든 난관을 뚫고 영화를 만들어준 윤성현 감독이 고맙다.
윤성현_조성희 감독이 <늑대소년> 이전부터 꿈꿔온 작품이 <승리호>이고, 그 시간을 옆에서 지켜봐왔기 때문에 내게도 <승리호>는 의미가 큰 작품이다. 가장 조성희다운 영화가 나올 거라 생각하고, 관객과도 기쁘게 호흡할 수 있는 영화가 될 거라 확신한다.
<사냥의 시간>
감독 윤성현 / 출연 이제훈, 최우식, 안재홍, 박정민, 박해수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경제난을 겪고 있는 근미래 대한민국. 감옥에서 출소한 준석(이제훈)이 가족 같은 친구 기훈(최우식), 장호(안재홍), 상수(박정민)와 함께 한판 크게 일을 벌인 뒤 한국을 뜨려 한다. 하지만 정체불명의 추격자(박해수)가 나타나 준석과 친구들을 쫓기 시작한다.
<승리호>(가제)
감독 조성희 / 출연 송중기, 김태리, 진선규, 유해진
돈이 되는 일은 무엇이든 다 하지만 언제나 거지 신세인 승리호의 파일럿 태호(송중기), 온 우주를 휘어잡을 기세로 승리호를 이끄는 선장(김태리), 승리호의 살림꾼 타이거 박(진선규), 그리고 로봇(목소리 연기 유해진)이 등장하는 한국영화 최초의 우주 배경 SF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