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 번째 구름>은 <녹차의 중력>과 한몸인 동시에 전혀 다르다. <녹차의 중력>이 온전히 ‘임권택 감독’에 초점이 맞춰진 반면 <백두 번째 구름>은 일종의 대화에 가깝다. <녹차의 중력>이 임권택에 대한 사랑을 담은 영화라면 <백두 번째 구름>은 영화 현장이 주인공인 영화다. 임권택에 대한 영화이자 영화 현장에 대한 기록. 무엇보다 이것은 ‘임권택이라는 영화’에 대한 정성일의 답변이다. 결정되지 않는 순간들이 영화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린 끝에 영화가 되도록 허락하는 것. 아니 영화가 우리를 허락하는 걸까. 1235호 <녹차의 중력> 씨네인터뷰에 이어, <백두 번째 구름>을 향한 말들을 전한다.
-<녹차의 중력>의 마지막, 오랜 기다림 끝에 영화 <화장>의 고사가 진행되고 “이따금 바람이 불고 맑음”이란 자막과 함께 <희망가>가 울려퍼진다. 그리하여 드디어 <백두 번째 구름>에 당도했다.
=임권택 감독의 백두 번째 영화니까 <백두 번째 구름>이다. 그런데 왜 구름인가. 임권택 감독님이 언젠가 그런 말을 하신 적 있다. 영화를 찍으러 돌아다니다가 언젠가는 객사할 것 같다고. 상징적 의미의 객사겠지만 그 말씀을 하시며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보고 계신 모습이 내게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산과 같은 이 사람에게 구름들이 백두번 지나갔구나, 이분에게 영화란 그런 의미구나 하고 눈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 순간 언젠가 내가 만들게 될 이 영화의 운명도 함께 결정됐다.
-인물을 다루는 다큐멘터리 혹은 촬영 현장의 메이킹 다큐멘터리지만 이제껏 본 적 없는 형식이다. 레퍼런스로 삼은 영화들이 있는지.
=영화감독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적지 않게 찾아보긴 했다. 다만 이 영화를 찍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그들에 대한 관심으로, 그러니까 오즈 야스지로에 대한 관심으로 <도쿄가>(감독 빔 벤더스, 1985)를 봤고 구로사와 아키라가 궁금해서 <A.K.: 구로사와 아키라의 초상>(감독 크리스 마커, 1985)을 봤다. 하지만 이번 영화를 만들면서는 이상할 정도로 다른 영화를 떠올리지 않았다. <녹차의 중력>을 먼저 찍고 <천당의 밤과 안개>를 만들 수 있었던 건 내게 큰 행운이었다.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는 결국 대상을 쫓아갈 수밖에 없다. 그외 다른 어떤 것도 참고가 안된다는 당연한 사실을 <천당의 밤과 안개>를 통해 몸으로 깨달은 거다. 의식적으로 외면한 게 아니라 어떤 레퍼런스도 쓸 수가 없었다. 이 영화의 방법을 이끌어준 건 오직 임권택 감독님 한분뿐이었다.
-<녹차의 중력>과 <백두 번째 구름>은 같은 대상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뿌리가 같은 영화지만 사실상 전혀 다른 영화이기도 하다.
=<녹차의 중력>은 오로지 임권택이라는 사람을 향한 영화지만 <백두번째 구름>은 영화 현장에 대한 영화다.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한국영화 현장에서 헌신하는 스탭들에 대한 나의 헌사다. 그게 이 영화의 절반이라고 해도 좋겠다. 가령 <화장>의 마지막 촬영 현장에서 나는 그것이 어떤 장면인지에 대한 일체의 설명 없이 분주히 오가는 스탭들의 모습만 담았다. 사실 그 장면은 그다지 중요한 신도 아니었고 실제 영화에선 쓰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촬영이라는 게 중요했고, 43회차 촬영을 함께해온 스탭들에 대한 존경을 담아 무조건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훈이 쓴 원작 소설의 몇 대목이 문자 이미지로 화면에 그려진다. 거기에 시나리오의 문자가 더해지고, 현장에서의 감독의 표정, 카메라, 배우의 움직임이 불규칙하게 나열되어 있다.
=불규칙이라기보다는 현장에서 규칙을 배워갔다. 영화 <화장>은 소설 <화장>에 대한 임권택의 독후감이라고 볼 수도 있다. <화장>은 영화화하기 매우 힘든 소설이라고 생각하는데 임권택 감독님은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표현했는지가 궁금했다. <녹차의 중력>과 마찬가지로 그런 느낌을 말로 풀어서 설명하는 건 의미가 없다. 소설을 영화로 옮긴다는 건 각색 과정에서 본래의 문장들을 ‘건드리는’ 거다. 긴 내용 중 어떤 문장을 뽑아냈는가, 어떻게 시나리오로 옮겨졌는가, 시나리오가 현장에서 임권택이라는 메소드를 통해 어떻게 구현되는가. 철저하게 그 프로세스를 따라간다는 게 <백두번째 구름>의 첫 번째 구성원리였다. 때문에 김훈 소설의 문장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녹차의 중력>이 오직 임권택에 초점을 맞춘 응시였다면, <백두 번째 구름>은 일종의 대화처럼 다가온다. 소설과 촬영 현장, 카메라로 찍힌 장면과 그걸 바라보는 임권택 감독이 숏과 리버스숏으로 구성되어 있다.
=임권택 감독님은 <취화선>(2002)을 찍을 때까지만 해도 모니터를 잘 안 쓰셨다. <달빛 길어올리기>(2010) 때부터 모니터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셨는데 모니터를 바라보는 감독님의 얼굴을 보면 오케이컷이 확연히 드러난다는 사실이 새삼 흥미로웠다. 내가 어떤 순간들을 골라서 찍은 게 아니라 카메라 스스로 모든 장면을 담아내는 자동성. 다른 말로 하자면 내가 어떻게 느꼈는지가 아니라 카메라가, 다시 말해 영화가 임권택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의 문제. 이걸 하려면 <화장>팀이 구현하고 있는 영화의 장면들과 그걸 보는 임권택 감독님의 얼굴이 필요했는데 어떤 장면들은 완성된 영화에선 빠진 것들도 있고, 완성된 영화와는 일정한 차이가 있다. 민감한 문제인데 기꺼이 <화장>의 장면들을 쓸 수 있게 허락해준 김형구 촬영감독과 스탭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임권택 감독에 대한 입문서 격의 영화는 아니다. 한마디로 이 영화를 보고 임권택 감독이 궁금해지진 않는다. 대신 임권택이 어떤 영화를 만든 분인지 잘 아는 관객에겐 새로운 시선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혁신적이다.
=<백두 번째 구름>은 한편의 작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임권택 감독님의 연출 비밀을 훔쳐가고 싶은 이들에게 도구 상자처럼 쓰였으면 하는 희망도 있다. 임권택 감독님은 인간문화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안타깝게도 전승이 되지 않는다. 내가 현장에서 늘 배우고 싶었던 것, 많은 이들이 배울 수 없다고 탄식했던 것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끊임없이 수정해나가면서 타이밍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전달하고 싶었다. 예를 들면 <화장>의 오 상무 부하직원이 빈소를 찾아 병원 복도를 걸어가는 장면은 스쳐 지나갈 사소한 장면 중 하나다. 하지만 임권택 감독님은 거기서 계속 동선 수정을 요구하며 오케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동선의 앙상블이 임권택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를 여실히 드러낸 순간, 그야말로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동선을 조각해나가는 그 과정에 임권택 영화의 영혼이 담겨 있다.
-<백두 번째 구름>의 마지막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다. <화장>의 마지막 촬영 현장에서 끝나지 않고 <태백산맥>의 촬영 장소까지 찾아가서 임권택의 말을 듣는다.
=<화장> 촬영 마지막날, 눈이 왔다. 프로듀서는 당연히 여기가 끝일거라 생각했지만 나는 엔딩을 찾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 촬영으로부터 1년이 지난 뒤에도 계속 기다렸다. 그러다 감독님이 고향 장성에 내려가서 <화장> 시사회를 한다고 하셔서 무작정 따라갔다. 그 때 감독님이 인터뷰를 했는데 “감독님 영화에서 무엇을 배우면 좋겠습니까”라는 질문에 “영화는 살아온 만큼 찍는 거요”라고 답하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 영화의 엔딩이 결정됐다. 그게 실은 <씨네21> 인터뷰였다. <씨네21>엔 여러 차례 감사하다. (웃음)
-결국 본인은 이번 작업을 통해 임권택 영화의 비밀을 훔친 것 같은가.
=다음 영화를 기대해달라. (웃음) 우선 극영화를 메인으로 준비 중이다. 이번 영화처럼 내가 반한, 내게 영감을 준 감독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병행할 예정이다. 물론 영화가 나를 허락해주어야 가능할 테지만. 차기작이 어떻게 될지 나도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