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 살벌한 손재곤 감독이 동물 탈을 뒤집어쓴 채 돌아왔다. <이층의 악당>(2010) 이후 10년 만에 신작 <해치지 않아>로 돌아온 그의 가장 큰 변화는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아니라 동명의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한 작품을 내놓았다는 점이다. 시나리오작가 출신으로 그가 연출했던 이전 두편의 영화는 당시 한국의 장르영화로서는 신선한 시도를 했던 작품들이다. 동물 탈을 뒤집어쓴 사람들이 동물 행세를 하며 동물원을 개장해 사람들을 속인다는 내용은 설정 자체만으로 황당한 코미디의 상황을 만들지만 그 안에서 소위 손재곤식 비틀기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해치지 않아>는 제목 그대로 무해한 이야기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만하다. 극중 인물과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 모두의 마음이 절대 다치지 않길 바라는 영화랄까. 까칠한 태도로 독설을 내뿜는 냉소적인 캐릭터의 묘를 발견해왔던 손재곤 감독의 영화 세계에 새바람이 부는 것일까. 그 안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새로운 비전은 무엇일까.
-<이층의 악당> 이후 10년 만에 세 번째 연출작을 발표하기까지 공백기가 좀 길었다.
=직접 쓴 시나리오로 제작을 진행하다가 캐스팅, 투자 단계에서 세 작품 정도가 중단됐다. <해치지 않아>는 꽤 오래전에 제안을 받았다가 한 차례 제작이 연기됐고, 다른 작품을 준비하다가 다시 참여하게 된 경우다. 제작사 디씨지플러스에서 먼저 제작을 준비하다가 어바웃필름과 공동 제작하면서 2018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해치지 않아>는 HUN 작가의 동명 웹툰이 원작이다. 직접 시나리오를 쓰다가 이번에는 원작이 있는 작품을 하게 됐다.
=한국의 많은 감독들이 그렇듯이, 직접 시나리오까지 쓰는 건 굉장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어느 시점이 되면 원작이든 리메이크든 제안을 열어두고 생각하게 된다. 나 또한 연출 제안을 받고 원작 웹툰을 접했을 때 이 작품이 지닌 따뜻한 코미디의 정서가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전작 두편의 여운 때문인지 <해치지 않아>라는 제목만 들었을 때 당연히 누군가로부터 상해를 입을 위협이 느껴지는, 즉 보다 장르적인 영화일 거라는 느낌이 있었다.
=우선 작가로부터 마음대로 각색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원작자 입장에서는 쉽지 않은 결정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바꿔버린 것은 아니고 웹툰에서 보여준 코미디 상을 토대로 내가 재미있다고 느꼈던 지점을 조금 다듬는 수준에서 접근했고, 배우들이 캐스팅되면서 그들이 지닌 개성에 맞게 자연스럽게 변형되기도 했다. 이전 작품들은 범죄 스릴러에 어울릴 법한 상황을 코미디 장르에 이식하는 과정에서 신경질적이면서 비뚤어진 캐릭터들이 날카롭게 충돌하는 모습, 그리고 말로 비꼬는 식의 코미디 대사를 주로 썼다. 이번에는 원작의 틀 안에서 다듬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이전 영화들과는 접근이 다를 수밖에 없다.
-안재홍, 강소라 두 배우의 캐스팅이 영화의 톤 앤드 매너를 결정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다. 망해가는 동물원 동산파크의 원장 역에 박영규 배우를 기용한 점이나 이전 영화들과는 다소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는 김성오, 전여빈 배우 등 배우들의 앙상블 연기가 영화의 ‘무해함’을 강조한다.
=안재홍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재미있고 친근한 모습이다. 그런데 변호사 태수는 지금 인생에서 어려운 시기를 맞이했다. 그는 정말 고군분투해야 하고, 열등감에 시달리는 날카로운 모습도 보여줘야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안재홍은 어딘가 예민해 보이고 다소 위험해 보이는 인물을 연기하고 있었다. 기존의 코미디 연기와는 다른 그만의 연기를 보고 싶다는 생각에 캐스팅을 제안했다. 강소라 배우에게서 느껴지는 이미지는 <써니>에서 보여준 건강하고 긍정적인 당당함이다. 거기에 더해 드라마 <미생>에서 그녀가 보여준 연기 모두를 담고 싶었다. 박영규 선생님의 시트콤 코미디 연기는 연륜과 신선함을 보여줄 수 있는 강점이 있다. 장르영화에서 주로 활약했던 김성오 배우의 모델 같은 면모, <죄 많은 소녀>와 드라마 <멜로가 체질>에서의 전여빈 배우의 모습 또한 감독으로서 이전과는 다른 연기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담긴 캐스팅이었다. 전여빈 배우는 사실 우리 영화에 먼저 캐스팅됐는데 개봉이 늦어지는 바람에 발견과 발굴의 영광을 다른 작품이 가져갔다. (웃음)
-영화는 변호사인 태수가 재벌들의 시중을 드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가 동산파크의 새 원장으로 부임하게 된 것도 성공을 향한 개인의 욕망이 앞선 결과다. 극중 태수가 자신의 물주나 다름없는 사모펀드 ‘벨류파이어하우스 윌리엄 앤 개브리얼’을 혀를 굴려가며 또박또박 발음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로 자본과 성공을 향한 개인의 욕망이 불러일으킨 참사를 희화화하려는 의도가 담긴 게 아닐까, 궁금했다.
=함께 시나리오를 쓴 작가 중에 기자 출신이 있다. 로펌 생활에 대해 잘 알고 있더라. 그에게서 요즘 변호사라고 다 떵떵거리면서 사는 게 아니다, 적은 월급 받으면서 전전긍긍하는 사람도 있다, 라는 이야기를 듣고 흥미가 생겼다. 그런 변호사가 절실한 상황에서 동물 탈을 쓰고 동물원을 운영하자는 과격한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드라마적으로는 캐릭터의 동기가 분명해진다. 다만 창작 단계에서의 순서가 조금 다르다. 계급과 계층간의 갈등을 영화에 의도적으로 담으려 했다기보다는 매스미디어에서 늘 접했던 현실 문제가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간 것 같다. 집필 과정에서는 의도가 먼저가 아니라 정보가 먼저였다.
-망해가는 동물원, 동산파크는 영화의 세계관 내에서만 존재하는 곳이긴하나 그 시각적 구현을 위해서는 실제 많은 동물원 시스템에 대한 조사와 탐구가 이뤄졌을 것 같다.
=답사와 자료 조사를 꽤 오래 했다. 웬만한 전국의 동물원은 모두 가본 것 같다. 시에서 운영하는 형편이 좋은 동물원부터 개인이 운영하는 사설 동물원까지 답사를 많이 다녔다. 열악한 방사장 환경 때문에 정신병을 앓고 있는 듯한 곰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도 난다. 아무래도 동물원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다보니 일반적인 동물원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변화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를 처음 준비하던 때와 비교해도 그 온도 차이가 확 달라졌으니까. 이제는 동물들의 권리 보호에 앞장서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동물원에 관한 기사가 나오면 부정적인 댓글이 많이 달린다. 그런 반응을 보면서 이 영화를 만들려는 목적이 무엇인지, 관객은 이 영화에서 무엇을 보고 싶어 할까 등의 문제를 오래 고민했다. 결국 <해치지 않아>를 보려고 온 관객은 사람이 동물 탈을 쓰고 변장했을 때 발생하는 코미디를 보고 싶어 할 거다. 물론 섣불리 결론을 내려 어떤 사안을 주장하는 것은 위험한 태도지만 동물원에 관한, 나아가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는 코미디를 즐기고자 했던 관객에게도 함께 보여주고 싶었다.
-결국 제목이 뜻하는 ‘해치지 않겠다’는 말은 두 가지 안전을 보장하는 사회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즉 고용과 자연 모두를 해치지 않겠다는 뜻으로. 실제 태수의 대사에서도 CEO는 생살여탈권을 쥔 사람이라는 언급이 나오기도 하듯 말이다.
=중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제목이다. 원작 웹툰에서는 영화의 제목 쓰임새와 조금 다른 의미가 담겨 있다. 원작의 내용 전체를 시나리오에 녹여내지 못했다. 아무튼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문제를 부각시키려 했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지금의 이야기를 하게 된 것 같다. 관객이 내 전작과는 다른 유형의 코미디도 재미있게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드라마의 몰입은 물론, 주인공들이 처한 현실도 공감을 얻어낸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