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속 고착된 시선을 해방하는 현란한 얼굴의 비전에 대하여
2020-03-12
글 : 김소희 (영화평론가)
현재진행형의 그림

존재 이전에 응시가 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시선의 대상을 보여주기 이전, 아직 형상이 되기 전인 자국들과, 대상과 화지 사이 부지런히 시선을 오가는 여성들의 얼굴 몽타주로부터 시작한다. 그녀들을 지도하는 목소리는 그 실체를 드러내기 전에 화면 밖 목소리로 먼저 도착한다. “날 천천히 관찰해”라는 말이 들려오면, 지시하는 목소리의 주인이 다름아닌 관찰 대상임이 드러난다. 화가 마리안느(노에미 멜랑)는 학생들에게 미술 선생인 자신을 그려보게 한다. 지도하는 말이 눈앞의 모델에게서 들려올 때 그 말은 뻔한 훈계가 아니라 이상한 마력으로 작용한다. 이는 시선의 주체와 대상 사이의 능동/수동이라는 오랜 허구적 구획을 무너뜨린다. 그림의 대상은 고정된 사물이 아니라 지금 내가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를 꿰뚫어보는, 나를 마주한 시선이 된다. 그러나 영화는 교차하는 시선의 바깥에 다른 층위의 시선을 개입시킨다. 그림 그리는 여성들 뒤로 그림 하나가 마리안느를 바라보고 있다. 학생이 우연히 발견하고 꺼내둔 그림으로 줌인하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마치 그것이 가진 마력을 수행하고 전달하려는 것 같다. 그림에서 비롯된 회상 이미지는 마리안느의 능동적인 회상이기보다는, 그림이 기억해주기를 요구하며 스스로 드러남으로써 작동시킨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느낌은 그림 속 이미지가 전해주는 것이기도 한데, 깜깜한 어둠 속 한 여성의 치맛단에서 번지는 불이 그림에 기이한 현재진행형의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기 때문이다.

선험적 응시

회상 안에서 우리는 그 그림의 실체를 마주하게 된다. 실제과정을 목격한 뒤에도 그림이 주는 기이한 느낌은 손상되지 않은 채 보존된다. 그것은 얼마간 음악의 힘이기도 하다. 어느 밤, 여성들만이 모인 축제에서 캠프파이어가 벌어진다. 불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목소리로 화음을 쌓아 노래하기 시작한다. 일정하고도 강렬한 목소리의 리듬은 감정을 고조시키고 라틴어 노랫말은 가사라기보다는 일종의 주문처럼 들린다. 목소리의 기이한 분위기 속에서 엘로이즈(아델 에넬)와 마리안느는 불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위치에 서게 된다. 이때 불 가까이에서 두손을 포갠 채 정지해 있던 엘로이즈가 천천히 불길 반대편으로 걸어나왔을 때 그녀의 치맛단에 불이 붙어 있다. 마리안느는 마치 그림이라도 감상하듯 그 광경에 붙들려 있다. 상황에 앞서 그림을 먼저 마주한 관객도 그 순간을 기시감 속에서 바라보게 된다. 현재 진행하는 사건은 마치 미리 도착한 그림에 대한 재현처럼 보인다. 마리안느는 누군가가 불을 끄기 위해 달려왔을 때에야 비로소 깨어나 엘로이즈에게 다가간다. 이 마법같은 순간의 작동으로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불이 붙은 치맛단과 이를 포착한 그림은 타오름과 여성과 초상화라는 동일성으로 인해 또 다른 그림 하나를 연상시킨다. 엘로이즈의 저택에 도착한 마리안느는 이튿날 베일을 걷어낸 거울 속에서 뒤집어놓은 초상화를 발견하게 된다. 그림은 얼굴 부분이 비어 있는 얼굴 없는 초상화다. 분간할 수 있는 것은 짙은 초록색 드레스와 포개진 손이다. 그것은 엘로이즈의 것일 수도 있고, 혼인을 앞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엘로이즈 언니의 것일 수도 있다. 아니, 비슷한 포즈 속에서 얼굴만 바꿔치기 당한 수많은 여성의 초상화일 수 있다. 어느 밤 마리안느는 초상화를 다시 꺼내들고는 촛불을 비춰 자세히 들여다본다. 그러던 중 그림 표면에 불이 붙으면서 그림이 타오르게 된다. 이때 불이 붙은 부분이 절묘하게도 가슴께 달린 옷자락 끝부분이어서 타고 있는 것이 그림이 아니라 실제 천이요, 실제 몸인 것 같다. 처음에는 당황하던 마리안느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는다. 난롯불 속에 놓인 채 한없이 타오르는 초상화는 마침내 자신의 자리를 찾은 것 같다. 죽은 그림이었던 초상화는 타오르는 순간에만 살아 있는 그림이 된다. 그림은 마치 스스로 태워지기를 원한 것 같다.

지금까지의 이야기에서 비슷한 패턴을 발견했을 것이다. 나는 영화 속에서 우연히 ‘발견된’ 대상은 존재하지 않고 운명적으로 ‘발견되기를 선택한’ 대상만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중이다. 여기에서 포인트는 우연과 운명을 가르는 것이 아닐뿐더러 그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다만 ‘B가 A에 의해 발견되었다’ 대신 ‘B가 A에게 발견되기를 선택했다’라고 말할 때 A와 B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무엇보다 영화가 ‘발견되기를 선택한’ 대상을 가정해보자고 끝없이 주술을 건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그러한 선택이 대상을 인식하는 데 어떤 전환점을 마련하는가를 예증한다. 영화에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야기를 인용하는 시퀀스를 보자. 백작 부인(발레리아 골리노)이 집을 비운 어느 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 그리고 하녀 소피(루아나 바야미)는 금지명령을 어기고 뒤를 돌아본 오르페우스의 행동을 비난할 것인가, 이해할 것인가를 두고 토론을 벌인다. 그러다 엘로이즈가 흥미로운 해석 하나를 내놓는다. 이야기의 초점을 오르페우스의 행위에서 에우리디케의 선택으로 옮기는 것이다. 이는 이야기 속에서 수동적인 존재로 비켜나 있던 에우리디케를 주체자로 세우는 전복적인 해석이다. 그와 동시에 영화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영화는 ‘시선’을 이야기할 때 늘 수동성의 자리에 놓이게 마련인 ‘대상’의 자리를 선험적 응시의 자리로 뒤바꾸면서 ‘대상’에 관한 인식의 변화를 도모한다.

퍼포먼스로서의 회화

물론 이 선험적 응시의 자리에는 여성들보다 먼저 혼인한 남성의 집에 도착해 그림의 실제 주인을 기다리던 초상화의 시선도 포함될 것이다. 영화는 다수였던 남성 화가가 아니라 여성 화가가 초상화를 그렸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를 탐구해 보여준다. 마리안느는 백작 부인으로부터 딸의 정혼자에게 보낼 초상화를 의뢰받아 한 섬에 도착한다. 마리안느가 배를 타고 출발할 때의 장면은 제인 캠피온의 <피아노>(1993)의 변용이자 재해석처럼 보인다. 초상화를 그릴 도화지가 담긴 나무 목판이 거센 물살로 인해 바다에 빠지자 거침없이 바다에 몸을 던져 목판을 건져올리는 마리안느의 행동은,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자 억압이기도 했던 피아노와 함께 물속에 빨려들어갔던 에이다(홀리 헌터)의 상황에 대한 변용이다. 에이다의 피아노는 너무 무겁기 때문에 그녀는 늘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던 반면, 마리안느의 화구는 어깨에 들쳐 멜 정도로 가볍다. 에이다가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의 결혼을 위해 뉴질랜드에 도착했다면, 마리안느는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혼인할 누군가를 위해 이곳에 도착했다는 것 역시 아이러니한 전환이다.

수도자의 삶을 살다가, 죽은 언니 몫의 운명을 떠안게 된 엘로이즈가 혼인을 원치 않기 때문에 마리안느는 화가임을 숨기고 산책 친구의 명목으로 동행하며 그녀를 관찰해야 하는 특수한 상황에 놓인다. 이러한 제약은 마리안느의 작업을 독특한 것으로 만든다. 그림 그리기는 눈앞의 대상을 실시간으로 그리는 행위가 아니라 그녀의 얼굴 곳곳을 기억해두었다가 화폭에 펼쳐내는 시차적 작업이 된다. 즉 그리기는 기억하기와 동일한 층위에서 작동된다. 영화는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몰래 관찰하는 행위를 각별하게 묘사한다. 촬영감독 클레르 마통은 촬영술을 통해 관찰하는 응시의 시선을 역동적 퍼포먼스로 만드는 데 기여한다. 첫 산책 장면에서 카메라는 마리안느의 옆얼굴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 그녀가 관찰을 위해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자, 마리안느에게 완벽히 가려져 보이지 않던 엘로이즈의 옆얼굴의 일부가 그제야 모습을 드러낸다. 마리안느가 다시 정면을 바라보자 엘로이즈의 얼굴은 자취를 감춘다. 마리안느가 다시 고개를 돌리자 잠시 후 시선을 느낀 엘로이즈가 약간 뾰로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마리안느를 쏘아본다. 조금 긴 시간이 지나고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이번에는 엘로이즈가 마리안느를 보고 있다. 얼굴이 포개진 순간은 영화 속 유사한 장면들을 떠올리게 하지만, 무엇보다 이 장면과 가장 닮은 건 개기월식 현상이 아닐까 싶다(클레르 마통이 촬영한 다른 영화 <애틀랜틱스>에서는 실제 개기월식 장면이 등장한다). 감추기와 드러나기를 반복하는 두 얼굴의 겹침은 마치 한 신체를 공유한 두개의 얼굴처럼 기이하게 보인다.

앞서 언급한 장면이 카메라와 함께한 퍼포먼스였다면, 소피의 임신중절 수술을 재연하는 장면은 회화 작업에 내재한 퍼포먼스성을 드러낸다. 소피가 갓난아이가 기어다니는 침대 위에서 임신중절 수술을 받을 때,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벽 쪽에 서서 이를 지켜보고 있다. 마리안느가 그만 고개를 돌리자,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에게 똑바로 보라고 권한다. 그날 밤 엘로이즈는 자리에 누운 소피를 일으켜 임신중절 수술 경험을 그림으로 남기자고 제안한다. 소피는 다리를 굽힌 채 매트 위에 눕고 엘로이즈는 그 앞에서 수술하는 시늉을 하고, 마리안느는 전체적인 자세를 교정한다. 엘로이즈의 제안은 어찌보면 폭력적이고 무례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결국 이 장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건 이 작업이 트라우마로 고착될 경험을 예술적 놀이로 바꾸어내고 목격자였던 두 여성이 경험자로서 동참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이 장면을 두고 재현의 층위에 들지 못했던 삶의 기록 차원에서 설명했다. 어쩌면 소피가 훗날 임신중절 경험을 돌이킬 때, 그날의 공동 작업도 함께 기억할지 모른다. 덧붙여 그 순간 하나의 그림이 화가 개인의 작품이 아니라 참여자들의 기획, 연기, 연출의 기여가 포함된 합작품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를 통해 그리기 행위의 단일성을 해체한다.

어쩌면 마리안느의 첫 번째 실패는 필연적으로 예정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림의 필연적인 참여자여야 할 모델이 자신이 맡은 역할을 몰랐기 때문에, 그 그림은 애초에 성립할 수 없었다. 엘로이즈가 마리안느를 뒤로하고 바다에 뛰어들 듯이 달려나가던 첫 산책 장면을 잠시 떠올려보자.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에게 “수년간 꿈꿔왔어요”라고 말한다. “죽음요?” 엘로이즈가 묻는다. “달리기”라고 마리안느가 답한다. 첫 번째 초상화에서 두 번째 초상화로의 이동은 곧 죽음에서 달리기로 건너가는 이행처럼 보인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첫 번째 초상화를 두고 격론을 벌인다. 엘로이즈가 자신과 하나도 닮지 않았다고 평하자, 마리안느는 초상화를 그릴 때의 ‘규칙과 관습과 이념’이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자 엘로이즈는 ‘생기’와 ‘존재감’은 없느냐고 꼬집는다. 두 초상화 사이의 여정은 남성적인 시선에서 여성적인 시선으로의 이행이기도 하다. 남성적 시선은 통제하고, 여성적 시선은 참여를 기꺼이 수용한다. 결국 여성적인 시선을 말하는 이야기가 사랑의 이야기로 번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령의 형상이 말하는 것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사랑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그림을 통해서다. 나아가 셀린 시아마는 그리기가 곧 사랑하기라고 선언한다. 어떻게 사랑하지 않는 대상을 그릴 수 있냐고, 어떻게 사랑하지 않는 대상을 오랫동안 관찰할 수 있냐고, 어떻게 오랫동안 관찰해서 알게 된 대상을 마침내 사랑하지 않을 수 있냐고 영화는 묻는다. 영화 속 여성들은 남성에 대한 시선과 관찰을 제한당한다. 사랑은 시선에서 온다는 것을 믿을 때, 여성에게 가능한 사랑은 오직 퀴어다. 그러므로 왜 퀴어냐가 아니라, 왜 세상은 여성들에게 퀴어적인 사랑만을 가능케 했을까를 물어야 한다. 여성 화가에게 남성의 누드를 그리는 것을 금지하면서 여성 화가의 활동을 제약한다는 마리안느의 진술을 차치하고서라도, 여성의 활동은 대부분 실내로 제약되었으며, 심지어 남편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혼인해야 했다.

어쩌면 여성은 남성을 사랑하기보다 유령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 더 쉬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여성 평자들에 의해 레즈비언 서사로 전유되었던 히치콕의 <레베카>(1940)는 이를 잘 보여주는 텍스트다. 조앤 폰테인이 연기한 여자는 아내와 사별한 부유한 남자와의 혼인으로 남자가 살던 저택에 오게 된다. 남자의 아내였던 레베카는 죽음으로 인해 삭제되고 억압되었으나, 저택은 그녀를 기억하며 그녀의 존재감을 체화한 채로 남아 있다. 여자는 레베카의 존재를 인식하면서 두려움과 억압, 호기심과 동경의 감정으로 저택을 탐험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마리안느가 낯선 저택에 도착하는 도입부에서 그 안에 무서운 비밀과 위험이 숨겨져 있을 거라는 어떤 예감을 하게 되는 것도, 이제껏 남성 소유의 영화 속 저택이 늘 그 속에 여성에 대한 억압과 죽음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남성은 의도적으로 배제되었으나, 여성에 대한 억압과 죽음은 존재한다. 엘로이즈의 모습을 한 유령은 이따금 마리안느의 등 뒤에 나타난다. 유령에 대해 가능한 해석은, 혼인을 앞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언니의 혼령이 엘로이즈의 모습을 빌려 잠시 나타났다는 것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실제로 엘로이즈가 그와 똑같은 모습으로 등장하는 바, 유령의 형상은 그저 회상의 표시라고 보는 것도 타당하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평온한 표정의 유령은 마리안느의 뒤에서 나타났다가 마리안느가 돌아볼 찰나에 사라질 뿐, 위해를 가하거나 어떤 요구를 한다거나 비밀을 숨기고 있는 것도 아니다. 전체 이야기를 통과한 뒤 다시 유령의 출몰을 생각할 때, 그것은 억압된 것의 귀환이 아니라 에우리디케 이야기의 재연처럼도 보인다. 이후 마리안느가 전시회에서 발표하는 그림 속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에우리디케의 모습이 어딘가 유령의 형상을 연상시킨다는 점도 이러한 감상을 부추긴다. 유령은 비가시적 존재로서 동성애를 은유하는 것으로 종종 쓰여왔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유령은 의미로 기입되는 것을 중지하고 일종의 퍼포먼스로서의 유령되기의 수행을 보여준다. 엘로이즈가 유령과 똑같은 차림으로 나타날 때 환상과 실제, 현재와 회상, 유령과 존재를 감싸던 얇은 막은 흔들린다.

무엇보다 유령되기를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장면은 따로 있다. 마지막에 이르러 영화는 잊지 못할 하나의 현란한 얼굴을 향해 다가간다.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이 흐르는 가운데 카메라는 한번도 재현된 적이 없던 관객의 얼굴을 엘로이즈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녀의 시선은 무언가를 보는 것같지만, 화면에서 보이지도 않고 실제로 무언가가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오직 유령으로서 음악만이 존재한다. 그 얼굴은 음악과 싸우는 것도 같고, 얼굴의 층위에서 멜로디에 동참하는 것도 같다. 그 얼굴은 고정된 포즈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숨을 가쁘게 쉬며 마구 달린다. 눈을 감았다가 뜰 때, 눈물을 흘릴 때, 슬픔과 환희와 고통과 즐거움과 회한과 망각이 동시에 우글거린다. 그 얼굴은 고정되지 않고 시시각각 변화한다. 그녀의 얼굴을 향해 줌인하며 좁혀드는 카메라는 그 시선이 마리안느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블랙홀 같은 얼굴 속으로 도취한 듯 빨려 들어간다. 초상화의 고정된 얼굴성을 파괴하는 움직이는 대상-얼굴로서 동영상의 시대는 하나의 얼굴을 타고 지금 막 도래한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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