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토피아로부터]
학생인데요
2020-01-29
글 : 이동은 (영화감독)
일러스트레이션 : 박지연 (일러스트레이션)

“학생, 나 이것 좀 도와줘.” 종로3가 지하철역 계단을 오르는데 한 어르신이 제법 무거워 보이는 짐을 들어 보이며 도움을 청했다. 어르신의 말에 민망했던 건 내가 짐을 들어주기에 적당한 근력을 지니지 않아서가 아니라, 바로 “학생”이라는 호칭 때문이었다. 어르신, 저는 결혼해서 자녀를 두었다면 그 아이가 학생 소리를 들을 나이인데 학생이라니요.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요.

김지운 감독의 데뷔작 <조용한 가족>(1998)에서 안개 산장을 방문한 낯선 손님(기주봉)이 산장집 아들에게 묻는다. “학생, 학생은 고독이 뭔지 아나?” 송강호 배우가 연기한 아들은 이에 특유의 톤으로 답한다. “난 학생 아닌데요.” 종로3가역 어르신께 이렇게 단호하게 오류를 교정해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혹시나 어르신께서 내게 호의를 사기 위해 미리 치르신 사례일 수도 있었기에 감사한 마음으로 학생이란 호칭을 날름 받아 삼켰다.

<조용한 가족>이 개봉한 그 시절 난 다니던 대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집 근처 슈퍼마켓에서 장을 잔뜩 보고 계산을 하려는데 계산원이 말했다. “3만원 이상 구매하시면 김장철 사은행사로 김장 배추를 드리는데, 몇 포기 드려요?” 그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말이 이렇게 튀어나왔다. “전 학생인데요.” 계산원은 잠시 멈칫하더니 곧 “네, 네” 하며 대수롭지 않은 듯 나의 말을 넘겼다. 김장 배추는 그렇게 전달되지 않았다. 난 정중하게 사은품을 거절하는 말 대신 불쑥 학생이라는 사실을 피력하고 말았던 자신이 부끄러워 슈퍼마켓을 서둘러 빠져나왔다.

학생으로 인식되고 싶었던 슈퍼마켓에서의 외침과 달리 당시 난 학교가 싫어 도망치듯 학교를 일찍 졸업해서 사회로 나왔다. 막상 이후로도 ‘학생인 듯 학생 아닌 듯 학생 같은’ 시기를 한참 더 보내며 학생 언저리를 배회하곤 했지만, 진정한 결실은 종로3가 지하철역 계단에서 비로소 이루게 되었다. 나는 학생이다.

얼마 전 누군가가 그랬다. 자신이 비로소 이제 더이상 학생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순간은 지루한 졸업식에서 하품을 하던 때도 아니고, 정들었던 교정을 쓸쓸하게 바라보던 순간도 아닌, 그나마 누리던 학생 할인이 다 끝났음을 알아차렸을 때라고. 뭐 학생이면 어떻고 학생이 아니면 또 어떤가. 길거리에서 누군가가 “학생!”이라고 부르면 반사적으로 뒤돌아보는 학생이든 “학생 아닌데요”이든. 공부하는 모든 사람은 어느 시기에 있든 간에 넓은 의미에서 어쩌면 학생이 아닐까. 대학 정시도 끝이 나고 각 대학에서 합격 발표를 하는 요즘이다. 특히 2월에 졸업을 앞둔 학생들은 앞으로 저마다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는 시기다. 학생이라는 신분으로, 그리고 학생과 비슷한 마음으로 저마다의 인생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건너가는 이들을 생각한다. 세상의 모든 학생에게 응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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