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블레이드 러너>의 컨셉 디자이너 시드 미드의 작품 세계
2020-01-31
글 : 김현수
미래를 디자인한 예언가
<블레이드 러너 2049>

<블레이드 러너> <에이리언2> <엘리시움>의 미술 컨셉을 디자인했던 산업디자이너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시드 미드가 지난해 12월 30일 86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평생을 디자인하고 꿈꿔왔던 2020년 이후의 미래가 어느덧 현실이 된 지금, 미드가 세상에 남긴 수많은 꿈의 디자인과 아이디어들이 퍼즐처럼 곳곳에 흩어져 모습을 드러낼 날을 기다리고 있다. 물론 그가 예언이라도 한 것처럼 진작에 실현된 것도 있지만 여전히 갈 길이 먼 분야의 것들도 많다. 신년호를 만들고 지난 몇주간 그의 부고 기사를 쓰지 못해 아쉽던 차에 마침 국내에도 시드 미드의 작품 세계를 다룬 책 <시드 미드의 무비 아트워크: 비주얼 퓨처리스트> 공식 한국어판이 출간됐다. 미래를 디자인한다는 뜻의 ‘비주얼 퓨처리스트’라는 직함을 달고 살아왔던 시드 미드를 기리는 마음을 담아, 그가 지구인들에게 남기고 떠난 흔적을 이 책에 실린 사진과 함께 되짚어보자.

<엘리시움>의 자동차. 시드 미드는 다양한 자동차 디자인을 남겼는데 <엘리시움>의 컨셉에 맞춰 디자인한 이 차량은 특이한 서스펜션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앞쪽 바퀴 위로 공기역학을 고려한 도어가 쌍을 이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Elysium TM & © 2013 TriStar Pictures ndustries, Inc. All rights reserved.

산업 디자이너로 출발하다

디자이너 시드 미드는 2020년 새해 아침을 보지 못했다. 지난 2019년 12월 30일(현지시각) 오전, 3년 동안 림프종과 맞서 싸웠던 그는 캘리포니아주 파사데나의 저택에서 숨을 거뒀다. 그는 생전에 영화 <스타트렉>을 시작으로 <블레이드 러너> <트론> <에이리언2>, 최근의 <엘리시움>과 <블레이드 러너 2049>에 이르기까지 지난 수십년간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SF영화의 컨셉 디자인을 담당해왔다. 그의 업적을 기리는 뜻에서 의미를 부여하자면, 그가 40여년 전 디자인했던 2020년을 하루 앞둔 날 떠났다는 사실이 깊은 감회를 불러 일으킨다. 디자이너로서 지금의 명성을 안겨준 그의 대표작 <블레이드 러너>의 시대배경이 2019년이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미래지향적으로 삶의 이상향을 디자인에 반영해왔던 그가 딱 한번 디스토피아로서의 음울한 뒷골목을 디자인했던 작품이 바로 <블레이드 러너>였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오프월드’로의 입성을 꿈꾸며 인간과 로봇이 뒤섞여 구원을 바라던 ‘근사하게 망가진 미래’는 다행히 오지 않았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 심화되는 계급 갈등과 양극화, 지구온난화와 환경파괴를 겪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행인 것은 <블레이드 러너> 이후 시드 미드가 지금껏 보여준 2020년 이후의 미래 풍경이 절망보다는 희망을 좇는 세계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일찌감치 지상과 상공을 모두 누리는 삶을 디자인했고, 인간 삶의 반경이 지구에서 우주로 확장되기를 바랐다. 그는 언제나 멋진 기계를 디자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꼭 필요한 세계 전체를 디자인하는 데 역점을 둔 아티스트였다. 그가 남긴 <블레이드 러너>는 어떤 의미에서는 결코 도래해서는 안되는 미래에 대한 경고였는지도 모른다.

<블레이드 러너 2049>의 호텔. 드니 빌뇌브 감독이 의뢰해 디자인한 이 호텔은 극중 쇠락한 카지노와 함께 운영되던 곳으로 설정되어 있다. 재미있는 점은 현관 유리에 대문짝만하게 ‘행운’이라는 한글이 쓰여 있다는 점이다. Blade Runner 2049, © 2017 Alcon Entertainment LLC.

시드 미드의 디자이너로서의 출발점은 영화가 아니라 산업디자인이었다. 그는 1959년,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회사 포드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디자인 전문학교 ‘아트 센터 칼리지 오브 디자인’을 졸업한 그는 포드사에서 근무했다. 당시에는 산업 제품의 크롬 재질과 색감을 선명하게 구현하기 위해 목탄이나 연필 같은 전통적인 도구 대신 에어브러시나 왁스 펜 같은 걸로 채색하는 방법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가 렌더링(채색) 작업을 하는 방식은 이때 자리 잡았는지도 모른다. 이후 그는 주로 자동차와 유람선, 제트기 등의 교통수단 디자인에 참여했다. 특히 자동차에 대한 그의 애정은 남달랐다. 그는 자동차에 대해 “자동차는 현실과 판타지를 뒤섞으며 완성된다. 크롬 도색의 자동차 표면은 주변 환경을 수백 가지 색으로 반사해서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당시 그의 작업은 할리우드 진출의 포석이 되었다.

<에이리언2>에 등장하는 USS 클라크호. ALIENS © 1986 Twentieth Century Fox. All rights reserved.

우주선을 디자인하다

1970년, 개인 디자인 회사를 차린 시드 미드는 이후 필립스를 비롯해 소니, 미놀타, 미쓰코시, 반다이 등의 회사와 작업했고 인터콘티넨털 호텔 등의 건축 렌더링 작업에도 참여했다. 그가 필립스와 작업하며 만들었던 책자를 우연히 보게 된 <사운드 오브 뮤직>(1965)의 로버트 와이즈 감독은 미드에게 자신이 준비하는 영화의 컨셉 디자인을 의뢰한다. 그 영화가 바로 TV판 <스타트렉>이었다. 그는 미드에게 “지금껏 누구도 본 적 없는” 디자인을 요구했다. 미드는 ‘비저’라는 이름의 거대한 우주선을 디자인했다. 극중 비저는 우주를 떠도는 소행성 크기의 거대한 우주선. 미드가 디자인한 비저는 마치 괴상한 피부를 가진 외계인 같은 표면으로 이뤄져 있었다. 그의 우주선 디자인 작업은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에이리언2>로 이어진다. <에이리언> 시리즈 전체에 등장했던 수많은 기계장치들과 비교해도 <에이리언2>에 등장했던 USS 슬라코호는 존재감이 단연 돋보였다.

슬라코호는 <스타트렉> 시리즈의 매끈한 우주선 디자인이나 <스타워즈> 시리즈의 웅장한 기체 디자인과는 거리가 먼 기능성 위주의 디자인이었다. 그의 디자인 작업을 모아 소개한 책 <시드 미드의 무비 아트워크: 비주얼 퓨처리스트>에 소개된 미드의 해석에 따르면, 그는 “슬라코호 디자인에 서사적 긴장감을 주기 위해서 중세 도시 구조의 실루엣을 본떠 만들었다”.

그가 디자인한 우주선은 <2010 우주 여행>에서도 쓰였다. 피터 하이엄스 감독이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의 속편을 만들겠다며 제작한 영화로, 모성 탐사를 위해 떠난 디스커버리호의 실패 후 9년 뒤의 사건을 그린 영화다. 미드는 이 영화에서 이온엔진으로 추진력을 얻어 중력이 존재하는 우주선을 그렸다. 사실 그가 우주선을 디자인하기 이전에는 대개 공기역학을 무시한 디자인이었다. 미드가 생각하기에 대기가 존재하지 않는 우주에서 우주선은 굳이 유선형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시드 미드의 디자인은 할리우드를 조용하게 뒤흔들었다.

<스트레인지 데이즈>의 뇌파 신경 자극기. STRANGE DAYS © 1995 Twentieth Century Fox. All rights reserved.

미래의 도구를 디자인하다

시드 미드는 특정 제품과 기계장치의 독자적인 디자인보다 가상의 환경 전체를 디자인하는 것을 즐겼다. 그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가상의 미래 사회에서 사람들은 어떤 것을 필요로 하며 무슨 생각을 하며 살게 될까. 이런 미드의 상상력과 영화적 재미가 맞아떨어져 만들어낸 장치 중에 대표적으로 캐스린 비글로 감독의 <스트레인지 데이즈>에 등장하는 뇌파 신경 자극기가 있다. 사람의 뇌에 직접 지시를 내리거나 감각을 전달할 수 있는 장치로 머리를 감싸는 일종의 헤드셋 형태다. 그가 상상한 생명체와 기계의 결합은 <코드명 J>의 생물 역할 물고기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인터넷에 모든 걸 의존하며 사는 인류가 통신 환경 장애로 신경쇠약증후군에 걸려 괴로워하는 시기에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에 등장하는 돌고래는 사이보그의 일종으로 묘사된다. 초창기에 그가 컨셉 디자인에 참여했으나 제작이 무산되어 빛을 보지 못한 작품 중에 사이보그 디자인에 대한 미드의 생각이 드러난 작품이 있다. 그는 <토피카>란 제목으로 알려진 프로젝트에서 인체공학과 산업디자인을 로봇 디자인에 결합하는 실험을 했다. 일종의 아이언맨 슈트 같은 모습을 한 로봇 디자인은 외골격 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보조장치와 밸브, 유압장치가 달려 있는 형태다. 움직임이 인간처럼 자유로워 보인다. 시드 미드는 훗날 도미노 요시유키 감독의 의뢰로 ‘턴에이 건담’이라는 혁신적인 기체도 만들었는데, 기존의 애니메이션에서 묘사됐던 로봇의 전형성을 완전히 바꾼 충격적인 디자인이었다. 그리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존 바담 감독의 <조니 5 파괴작전>의 로봇 ‘넘버5’도 시드 미드의 디자인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이는 군사용 로봇으로 설정되어 있으나 인간적인 면모를 갖게되는 캐릭터로, 탱크 형태의 수직구조로 이뤄져 있는 기체. 눈을 크게 만들어 인간적인 면모를 부여하려 했던 시드 미드의 디자인 방향이 잘 드러난다. 인간과 기계의 융합은 시드 미드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다.

<블레이드 러너>의 상징과도 같은 주인공 데커드의 차량 ‘스피너’는 전면부의 휠이 도드라지게 강조된 것이 특징이다. Blade Runner © 1982 The Blade Runner Partnership. All rights reserved.
시드 미드가 채색한 <블레이드 러너>의 거리 풍경. 그는 자신이 디자인한 차량에 어울리는 거리까지 디자인했다. 건물의 네온사인 하나하나에 모두 정확한 의미를 담은 외국어가 쓰여 있다. Blade Runner © 1982 The Blade Runner Partnership. All rights reserved.
시드 미드가 <블레이드 러너>에 참여하며 처음 디자인한 차량 중 하나다. 그는 극중 등장하는 택시를 비롯해 모든 차량의 차체를 디자인할 때 버려진 소품을 재조립해 덧붙이는 방식으로 이뤄졌을 거라 상상하며 만들었다. Blade Runner © 1982 The Blade Runner Partnership. All rights reserved.

미래의 공간을 디자인하다

닐 블룸캠프 감독의 <엘리시움>에서 철저한 계급사회로 나누어 살아가는 미래 사회 역시 시드 미드의 디자인에서 비롯된 세계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구분이 뚜렷한 상황에서 부자들의 신세계 ‘엘리시움’은 우주정거장 형태로 디자인되어 중력이 없는 우주에서도 상하를 구분할 수 있다. 그것은 영화에서 시각적으로 아름답지만 비극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공간이란 기능을 한다.

이제 그의 대표적이자 최고작인 <블레이드 러너>의 공간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다. 앞서 소개한 시드 미드의 지난 작업은 <블레이드 러너>에서 보여준 디자인의 변주 혹은 확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래 그는 자동차 디자인 작업 정도만 의뢰를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에드워드 호퍼 그림의 쓸쓸한 분위기에 어울릴 법한 택시를 한 대 그리던 중, 그는 그 시대에 있을 법한 폐품과 부품의 조립으로 이뤄진 택시를 그리는 김에 뉴욕의 타임스스퀘어와 홍콩, 상하이의 밤거리를 뒤섞은 듯한 뒷골목 디자인도 그렸다. 차에 어울리는 배경이 있어야 한다는 미드의 생각이 리들리 스콧 감독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는 애초 계약한 날짜 이상의 초과근무를 하며 데커드의 방도 설계했다. 자동화된 주방과 침실의 모양새는 기차 객실에 있는 화장실 디자인에서 착안했다. 이 영화에서 시드 미드의 가장 대표적인 디자인 작업을 하나 꼽으라면 단연 날아다니는 자동차 ‘스피너’다. 휠이 전면부에 집중되어 있는 독특한 구조는 지금도 전무후무한 디자인이다. 곤충의 몸체와 상어의 날카로운 지느러미, 서핑보드를 닮은 지붕 등 여러 아이디어가 뒤섞여 탄생한 스피너는 산업디자이너로서의 그의 경력이 아니었다면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을 디자인이다. 그가 애초 주문대로 스피너만 그리고 현장을 떠났다면 지금의 시드 미드와 <블레이드 러너>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시드 미드 디자인의 핵심은 미래를 향한 상상력이 공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조건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주변 환경을 함께 디자인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분리된 조각을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무언가가 놓여 있을 미래의 환경을 디자인하는 것. 드니빌 뇌브 감독은 <블레이드 러너>의 속편인 <블레이드 러너 2049>를 만들면서 극중 데커드가 은둔해 있는 호텔과 카지노 건물의 디자인을 시드 미드에게 맡겼다. ‘네오 키치’를 컨셉으로 웅장하고 을씨년스러운 건물을 디자인한 그는 이번에도 마냥 우울한 디스토피아 재현에는 관심 없는 듯 화려한 폐허의 공간을 선사했다.

그는 2018년에 쓴 자서전 <미래를 기억하다>에서 자신의 디자인 작업을 두고 “기술을 대체하는 아이디어”, “너무 일찍 도착한 리얼리티”라는 표현을 써서 말했다. 디자인 예언가로서의 시드 미드는 무한한 상상력을 스크린 위에 펼쳐 보임과 동시에 미래의 중요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도 묻게 한다. “우리가 사람을 만들 수 있다면 우리는 그들을 식기세척기처럼 대할 텐가?” <블레이드 러너>를 세상에 남기고 떠난 시드 미드의 질문에 진짜로 대답해야 할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필모그래피

2017 <블레이드 러너 2049> 2013 <엘리시움> 2011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 2005 <타임코드> 2003 <더 코어> 2000 <미션 투 마스> 1995 <코드명 J> 1995 <스트레인지 데이즈> 1994 <야마토 2520> 1990 <우주가족 젯슨> 1990 <스타 파이어> 1986 <에이리언2> 1986 <조니5 파괴 작전> 1984 <2010 우주여행> 1982 <블레이드 러너> 1982 <트론> 1980 <스키조이드> 1979 <스타트렉>

사진 비엘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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