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가족을 닮아간다는 것의 불안 담은 <작은 빛>이 사진과 영상을 이용하는 방법
2020-03-12
글 : 김병규 (영화평론가)
사진이 건네준 것

<작은 빛>은 뇌수술을 앞둔 진무(곽진무)가 어머니의 집을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어머니의 집 벽면에는 여러 장의 사진이 액자에 걸려 있다. 대부분 가족이나 친척들의 사진으로 추정되는데, 그중에는 어머니의 초상도 보인다. 특이한 건 여럿이 모여 찍은 사진은 드물고 대부분이 독사진이란 것이다. 그런 사진들을 뒤로하고 진무는 벽 옆면에 붙은 광고사진을 보고 질문한다. “저 사진은 뭐야?” 어머니는 천연덕스럽게 자기 젊은 시절과 닮지 않았냐고 되묻는다. 다음 장면에서 영화는 굳이 그 광고사진을 직접 보여주기도 한다. 일견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단순히 리얼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인위적인 배치와 대화가 불현듯 스쳐 지나간다.

진무가 던진 질문처럼, 광고사진은 왜 그 자리에 붙어 있던걸까. 게다가 영화가 그 사진에 잠시 눈을 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말 젊은 시절 어머니와 사진 속 연예인의 모습이 닮아서일지도 모르지만, 카메라가 진무의 반응을 비춘다거나 어머니의 옛 사진을 보여주진 않기 때문에 이 말이 얼마만큼의 신뢰성을 담보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단순한 유머로 받아들여도 무방한 장면일 테지만, 사진을 둘러싼 이 짧은 대화에는 서사의 맥락과는 무관한 다른 긴장도 드리워져 있다. 그건 현실의 얼굴이 과거에 찍힌 사진 또는 영상에 담긴 또 다른 얼굴과 나란히 눈에 들어오면서 자아내는 닮음과 차이의 불안이다. 왜냐하면 <작은 빛>은 가족의 삶에 비친 현실의 빛을 수용하는 영화이면서, 또한 가족을 닮아간다는 것의 불안에 관한 영화이고, 가족을 닮아가는 그 얼굴이라는 요소를 서로 다른 시간적 배경에 놓인 사진과 영상의 질감 위에 재배치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결국은 닮고야 만다는 불안

벽 위에는 익숙한 사진과 낯선 사진이 함께 있다. 벽면 한쪽에 인물의 정확한 신원을 알지 못하는 관객에게도 분명히 어머니의 얼굴로 인지되는 초상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어머니가 자신의 젊은 시절과 닮았다고 말하는, 그러나 닮음의 여부와 정도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없는 다른 이의 사진이 있다. 진무는 어머니의 초상을 향해서는 묻지 않지만, 생경하게 눈에 들어온 광고사진에 대해선 입을 연다. 여기서 진무가 꺼내든 질문은 닮았지만 다른 두 얼굴의 예민한 차이를 감지하는 작은 신호를 불러낸다. 물론 자신의 젊은 시절과 연예인의 광고 이미지가 닮았다고 말하는 어머니의 답변은 사소한 농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차이가 육안으로 식별되지 않거나 카메라의 시선으로는 결코 확증할 수 없는 수준으로 심화된다면, 얼굴이 일으키는 이미지의 불안은 그걸 바라보는 주체의 존재론적 조건을 흔드는 사태로까지 확장된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추상적 이미지로 창문 바깥의 풍경을 포착한 영화의 도입부는 이러한 사태를 언뜻 예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닮음’에 대한 언급은 <작은 빛>에서 연출자 스스로가 유독 강박적으로 제기하는 테마다. 진무는 누나 현(김현)에게 어머니와 아버지를 닮아간다는 말을 번갈아 듣고, 아버지보다 많은 나이로 아버지의 양복을 입고 캠코더 앞에 선다. 누군가를 닮아가는 것과 누군가와 닮은 것은 미묘하게 다른 문제를 지시한다. 부모를 닮아간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 시간의 흐름에 굴복하는 몸의 변화를 자각하게 한다. 진무의 몸은 스스로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부모의 외형을 닮아가고, 수술의 부작용으로 인해 기억을 잃을지 모르는 사태를 직면하고 있다(그의 신체에 미치는 두 가지 사태는 카메라가 포착하는 외관으로는 결코 확인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것이 사진이 환기하는 닮은 것에 대한 불안이 우리를 포획하는 부분이다. 진무는 아버지를 회피해왔지만, 이제는 그를 닮았고, 그의 기억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양면적인 감정에 선다.

카메라는 인간의 눈처럼 세계를 기록한다. 그러나 카메라의 렌즈는 기억을 동반하지 않는 시선이자, 주체가 명시되지 않는 시점이며, 과거에 입회할 수 없는 동시성의 이미지를 구성한다. 프레임 내부의 이미지는 기억과 시점이 부재한 채로 전시되는 세계다. 역설적인 것은 그런 이미지의 운동을 통해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의 세계가 확장된다는 것이다. 진무가 캠코더를 들고 영상을 담아내는 건 서사적으로는 기억상실에 대비해 가족들의 기록을 남겨두는 행동일 테지만, 사진과 가족이 부여하는 ‘닮음’이라는 관계를 의식해보면 주로 사진으로 표상되는 부모와 ‘닮은’ 삶을 거절하고 다른 질서의 시선과 몸짓을 구성하려는 시도로 비친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병상에 누운 진무는 가족들에게 아버지가 촬영한 사진을 보여주며 서로 다른 반응을 듣는다. 가족들은 대부분 그 사진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부분적으로 기억할 뿐이다. 영화는 사진에 박제된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을 철저히 회피하면서, 사진에 담긴 경험을 공유한 이들의 누락된 기억을 환기시킨다. 여기서 사진과 영상의 함의는 이중적이다. 한편으로 사진은 그들이 함께했고 이제는 소실되어버린 기억과 직면하게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영상의 몽타주는 사진을 감싸고 있는 중첩된 기억을 끌어들여 사진의 바깥, 프레임의 주변부를 맴돌던 주체들이 새롭게 교류하는 계기를 만들어낸다.

영상 속의 얼굴과 몸짓을 마주하는 건 사진을 바라보는 것과 다르게 특별한 감각을 불러일으키는데, 가령 진무의 어머니는 자신을 촬영한 캠코더 영상을 뒤늦게 확인하면서 “내 얼굴을 이렇게 자세히 보는 건 처음”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영화는 어머니의 집 벽면에 정면으로 걸린 그녀의 초상을 노골적으로 보여주지 않았던가. 이들은 사진에서 발견하지 못한 것을 영상으로부터 체감한다. 이 대목에서 영상과 사진은 미묘하게 대립하고 교차한다. 진무가 캠코더를 들었을 때, 프레임에 포착된 가족들은 일관되게 캠코더의 시선에 거절의 제스처를 보인다. 사진에 찍히는 것은 그리 어색한 일이 아니지만, 영상에 담기는 것은 어딘가 꺼림칙하게 느껴진다. 이는 영상을 찍히는 일에 익숙지 않은 소시민적 인물이 보이는 자연스러운 반응이지만, 이미지의 불안이라는 층위에서라면 사진적 닮음의 차원을 넘어서 평소에는 자각하지 못한 감정과 몸짓마저 드러내 보이는 영상의 역량에 관한 미묘한 두려움이기도 하다.

바라보기를 멈추지 않는다

<작은 빛>이 과거의 기억과 향수를 불러내는 범용한 영화적 소품으로 사진을 활용했다면, 닮은 것과 다른 것의 미세한 차이를 관통하는 이미지의 불안이 활성화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영화는 아버지가 찍은 사진을 뒤늦게 돌려보는 순간은 담아내지만, 기억과 향수를 동반하는 사진의 표면을 보여주는 것은 끝까지 유예하고 있다. 사진이 끝내 등장하는 건 영화의 마지막에서다. 진무는 창고에서 아버지의 낡은 카메라와 사진을 발견한다. 돌이켜보면 <작은 빛>의 여정은 아버지의 사진에 접근하기 위한 아들의 영상으로 전개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부재는 봉합되는 대신 메워지지 않는 틈새를 환기한다. 아버지의 얼굴은 직전 장면에서 형체를 식별할 수조차 없는 시신 이미지로 눈앞에 나타났다가 돌연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진의 표면으로 되돌아와 이미지와 기억의 긴밀한 뒤얽힘을 제공하며 우리를 이중적인 불안에 휩싸이도록 이끈다. 사진 속의 당신은 지금의 나와 닮은 걸까? 또는 미라가 되어버린 시신의 흔적에서 내 모습과 닮은 부분을 찾을 수 있을까?

독특하게도 진무는 아버지의 젊은 시절 모습이 담긴 사진들마저 캠코더로 찍는다. 형편없는 화질의 캠코더 영상은 사진에 비친 얼굴을 흐릿하게 뭉개버린다. 진무는 아버지의 얼굴이 기록된 사진의 세부와 흔적을 들여다보는 대신 사진의 표면 위로 캠코더의 거친 질감과 흔들림을 덧댄다. 비루하고 조악하지만, 사진의 흔적과 영상의 질감은 하나의 숏 안에서 남다른 간격을 두고 물질화되고 있다. 이는 사진이 드리우는 이미지의 불안에 대응하는 카운터 이미지이기도 하다. 잠시 뒤 방 안에서 카메라가 찍히고 깜빡이는 빛이 새어나온다. 이 장면에서 사진과 영상은 유사하지만 다르게, 대립하면서 한몸을 이룬다. 그러고 보면 <작은 빛>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도 이와 비슷한 원리로 작동했었다. 진무가 형광등 스위치를 켰다 끄는 신호에 맞춰 가족들 각각의 일상 공간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장면이다. 이 장면의 매혹은 인물들이 가진 삶의 소박한 진정성과는 무관하다. 이 순간은 영상과 대립하면서, 영상의 내부에 잔존하는 사진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암전과 빛의 반복이라는 영사기적인 은유로 역설하고 있다.

영화의 절반이 지나갈 즈음에 진무는 빛이 드리운 곳을 통과해 그림자가 진 곳으로 들어와 아버지의 묘지를 눈으로 본다. 영화의 마지막 순간. 진무는 아버지의 유해를 손에 들고 어둠이 진 자리에서 빛이 펼쳐진 곳으로 걸어온다. <작은 빛>은 삶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그 단순한 왕복 운동에 모든 것을 거는 영화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얼마간 도식적으로 비치는 그런 경로의 횡단이 전부는 아니다. 그 사이를 모든 이들의 발걸음이 잇는다. 가족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묘지의 이장을 위해 산을 오르내린다. 아무도 없는 빈 풍경에서 모든 사람이 화면에 나타나고, 다시 사라질 때까지 카메라는 멈춰 서서 가족의 행렬을 지켜본다. 가시적인 대상이 사라지는 순간까지 그것을 바라보는 체험, 불안에 사로잡히면서도 우리가 보이지 않는 세계의 풍경을 주시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영화라는 움직임의 연쇄가 제공하는 여정의 매혹이라 할 수 있다. 차례로 프레임에 진입하고 퇴장하기를 반복하는 집단의 행렬을 바라보는 일은 한장의 사진 또는 한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과는 다른 체험을 제공한다. 모두가 지나간 자리에 침묵과 풍경, 흔들리는 바람과 빛이 서정적으로 감돈다. 스탠리 카벨의 말을 빌리면 이 장면들은, “영화의 움직임 속에서 사진의 피사체는 다시 해방된다. 과거를 드러내는 외관 안에서, 노스탤지어의 고리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표현한다. 이 시퀀스는 모든 책임을 완수하는 현실의 결말일까? 혹은 수술을 앞두고 잠이 든 진무의 꿈일까? 그게 아니라면 집단적 움직임의 시작과 끝을 포획하려는 영상의 열망일까?

<작은 빛>에서 인물들의 몸은 피할 수 없는 변화와 상실을 겪으면서 동시에 사진과 영상이라는 또 다른 몸을 빌려 이미지의 속성으로 재편해 전시되고 재생되기를 반복한다. 잠든 어머니의 뒷모습을 비추던 캠코더의 시선은 그 자신의 얼굴과 마주하는 순간을 지나쳐 사진에 담긴 아버지의 얼굴에 이른다. 서로 다른 세 이미지는 그토록 바라보기 힘들거나 대면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었으나, 이제 간신히 수긍할 수 있는 삶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이미지의 불안은 사진 또는 영상의 단일한 표면으로는 확증할 수 없는 것, 그것과 연관된 기억의 차이에서 산출되는 불확정성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절대적인 기원을 추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작은 빛>은 절대적인 기원의 형상이 부재한 자리를 온갖 표상의 미끄러짐과 실패와 반복으로 대체한다. 정면에 걸린 초상이 옆면에 걸린 닮은 사진으로, 진무가 촬영하는 어머니의 등에서 또다른 가족들의 얼굴로, 마침내 스스로의 얼굴을 붙잡은 영상과 아버지의 사진을 포착한 조악한 영상으로 전이되는 것이다. 응답하지 않는 대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불안을 수반한다. 영상을 찍는다는 건 그런 불안을 무릅쓰고 보는 것을 중단하지 않는 행위다. <작은 빛>은 박제된 사진과 흔들리는 영상의 틈새에서, 필연적인 변화와 상실에 노출된 현실의 몸과 영원히 변하지 않는 모습을 간직하는 이미지 사이에서 불안과 함께 삶이 지속될 것임을 본다. 카메라를 든 시선은 이러한 불안을 응시하면서 다시 한번 삶을 추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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