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스티븐 달드리 / 출연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 / 제작연도 2002년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갔을 때, 마트에서 개봉한 지 몇해가 지난 영화의 DVD를 10달러도 안되는 가격에 판매하고 있었다. 영화를 좋아하니까 영어 공부를 핑계로 가끔 DVD를 한장씩 사모으곤 했다. <디 아워스>도 그렇게 보게 된 영화 중 하나였다. DVD에는 한글 자막이 당연히 없었는데,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이 영화를 완전히 이해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건 정말 마법 같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내 영어 실력은 형편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어른이 되었다는 기쁨으로 스무살을 정신없이 보내고 스물한살이 되었을 때 갑자기 우울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어느 순간 내 나이가 너무 많게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어이가 없어서 돌아가서 한 소리 해주고 싶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스물셋이 되었을 때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부모님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어학연수를 떠났다. 조금 즐거웠다가 다시 고민에 빠졌다가 사춘기 같은 나날을 보내던 중 <디 아워스>를 만났다. 그 당시엔 영화 속 세명의 여인들이 견뎌온 시간을 짐작도 할 수 없는 나이였다. 서른살도 내게는 영원히 오지 않을 먼 시간처럼 느껴졌으니까. 대사를 100%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영화가 내 마음속 깊숙이 파고들 수 있었던 건 세 인물을 연기한 배우들의 힘이었던 것 같다. 그녀들의 눈빛을 보는 것만으로 참 많은 위로를 얻었다. 줄리언 무어가 마치 평범한 날들 중 하루처럼 남편의 생일 케이크를 만들 때나, 니콜 키드먼이 어린 조카를 품에 안고, 주인공을 죽이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른 인물을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할 때 막연하게나마 그녀들의 지난 삶이 느껴졌다. 메릴 스트립은 딸에게 이런 말을 한다. 어느 날 새벽에 잠에서 깼는데 이제부터 행복한 일들이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그런데 그런 일들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고, 똑같은 날들이 이어졌다고 말이다. 그 후에 또 뭔가 말을 덧붙인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정확한 대사를 찾아볼 수도 있겠지만, 쓸데없이 심각했던 스물셋의 나는 저 대사만으로도 큰 위안을 얻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쓰면서 봉투에 <디 아워스> DVD를 함께 넣어 보냈다.
누군가로부터 어떤 영화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으면, 그 영화의 제목을 듣거나 볼 때마다 그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정말 친하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이상하게 그가 좋아한다는 영화만큼은 잊히지 않는다. 예를 들면 평소에는 잊고 사는 옛 직장의 부장님이라든지, 졸업 후 연락이 끊긴 같은 수업을 들었던 친구라든지. 어떤 영화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다른 것으로 설명되지 않는 그 사람에 대한 어떤 부분을 알게 해주는 것 같다. 스물셋의 내가 친구에게 <디 아워스>를 보낸 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당시의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한가람 영화감독. <아워 바디>(2018)를 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