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그 오롯한 진경(眞景)의 혼풀이, <취화선>의 최민식
2002-05-08
글 : 박은영
사진 : 이혜정
장승업으로 살다 돌아오다

<취화선>의 장승업으로 살다 돌아온 최민식은 지쳐 있었다. 장승업의 영혼을 미처 떨쳐내지 못한 듯 보였다. 그 자신이 즐기는 표현대로, 배우의 일이 남의 영혼을 불러다 보여주는 무당의 일과 같다면, 그는 지난 1년 가까이 장승업의 영혼을 끌어안았고, 지금은 그 유난히 힘들었던 굿판을 접고 기진해, 숨을 고르고 있는 중이다. <취화선>에서 그가 연기한 장승업은 정말이지 복잡하고 어려운 인물이었다. 출생이 천했고 배움이 없었지만 천재적인 예술가였고, 시대와도 사회와도 불화하며 떠돌다 사라져버렸다. 매력적이지만 모호했다. 시대극이라거나 실존 인물의 일대기라는 부담도 있었을 터. 그러나 최민식을 통해 부활한 장승업은 불꽃같고 이슬 같다. 광기와 괴벽, 그 이면의 순수와 고독까지, 한 예술가의 혼이 최민식을 통해 오롯이 살아나고 있다.

장승업에 대한 오해

술과 여자를 좋아했다는 것만 부각되고 있는데, 그건 유별난 게 아니죠. 장승업이 술과 여자만 좋아했나요? 꽃, 새, 벌레, 거미줄에 맺힌 이슬방울에도 빠져드는, 그런 사람이에요. 그런 순수함이 시대적 배경과 안 맞았다 뿐이지, DNA가 이상해서 꼴통짓 하고 다닌 게 아니거든요. 잔머리를 못 굴린 거지, 기인은 아니라고 봐요. 내가 장승업 속으로 들어갈 때, 나 역시 그렇게 돼야 했구요. 나부터 하얘져야지, 안 그러면 그 거짓말이 고스란히 드러나요.

장승업의 여복

매향이나 소운이보다는 진홍이한테 애착이 많이 가요. 지지고 볶고 살지만, 그래서 장승업에게 걸맞은 여자 같거든요. 그리고 김여진씨 얘긴 꼭 하고 싶어요. 드리블하다가 체스트 패스를 하면, 대개 여배우들은 예쁜 척하느라고 못 잡거든요. 울화통 터지죠. 김여진씨한테는 어떻게 던져도 자유자재로 받아내는 게, 호흡이 척척 맞았어요. 그런 건 누가 가르쳐준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요. 첫 리허설 때 “야, 이 드런 놈아!” 하고 소리치는 걸 듣는데, 어찌나 기분이 좋았는지.

장승업에서 나오기까지

얼마 전에 천도제를 지냈어요. 제가 그분 역할을 빌미로 먹고살게 됐으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영화로 장승업이라는 인물이 이렇게 세간에 화제가 됐는데도, 후손이라고는 누구 하나 나타나는 이가 없잖아요. 인생이 참 쓸쓸한 거죠. 어디 제삿밥이나 제대로 잡수셨겠어요? 영감님 잘 가시라고, 보내드리고 나니까, 빚 갚은 것 같네요. 하늘에서도 술 많이 잡숫고, 그림 많이 그리시고, 나도 좀 귀엽게 봐주십사, 인사드렸지요.

<취화선>에서 유난히 귀에 밟히는 대사가 있다. 그려 달라는 그림은 안 그리고 빈둥대는 장승업 왈, “달라지고 싶어서 그래. 지들 보고 싶은 것만 그림 안에서 보는데, 거기 발목 잡히면, 내가 그놈들 손에 놀아나는 거야. 반복은 곧 죽음이야.” 순간적으로 장승업이 아닌 최민식이 보였다면,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다. 사실 <파이란>의 강재로 살아냈을 때, 이 시대 최고의 배우로 추어올려졌을 때, 이보다 더 좋을 수 없겠다 싶었을 때, 그는 별안간 초심 회귀 선언을 했다. 다름 아닌 임권택 감독과의 작업을 통해서였다. 최민식은 “숙련된 노장의사에게 지금 내 상태가 어떤가 종합검진을 받아볼 참”이라고 그랬다. 대체 그는 어떤 속병을 키우고 앓아왔다는 걸까. 속시원한 처방전을 받아내긴 한 걸까.

종합검진 계기

순전히 나 개인을 위한 작업이었어요. 거장이 세상을 보는 눈, 예술을 보는 눈이 어떤 건지, 진짜 알고 싶었거든요. 창작가는 몸뚱이로 자길 표현하는데, 그러다보면 자극이 필요해요. 저, 자극적인 말 들어본지 오래됐거든요. 이런 거 고쳐라, 이런 게 문제다, 이런 얘기. <구로 아리랑> 때는 아무리 기다리게 해도 불평 안 했어요. 근데 지금은 그러거든요. 머리 컸다 이거죠. 처음 시작할 때 마음으로 돌아가보자 그런 건데, 이번에도 ‘나’가 튀어나오더라구요. 무언의 가르침을 많이 받았죠. 영화를 한다는 건 삶을 표현하는 거라는 말씀, 실감했구요.

종합검진 결과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 X도 아니구나. 완전히 발가벗겨진 기분이랄까. 허물투성이에 상처투성이, 간덩이도 부어 있고, 뭐 하나 성한 거 없이 다 고장나 있더라구요. 중증환자죠. 치료하고 회복할 수 있는 길이 보이긴 해요. 무조건 제대로 하는 거죠. 그동안 유혹과 위기의 순간이 많았어요. 돈에, 흥행에. 내 신조가 흔들려 휘청거리기도 했고, 다운당했다 일어나기도 했구요. 어차피 매 안 맞고 살긴 힘들죠. 맞고 버티는 게, 살면서 중요하다는 걸 알았어요. 그럴 맷집이 이제 생긴 거 같아요.

변하지 않은 것

제가 추구하는 연기는 선경(仙景)보단 진경(眞景)에 가깝죠. 근데 저, 판타지도 좋아해요. <사랑과 영혼> 처럼 꿈과 환상을 그린 영화, 진경을 잊게 만드는 영화도 좋아요. 그것도 미덕이니까요. 하지만 배우로서는 나를 통해서 우리 살아가는 얘기를 하는 게 더 좋죠. 인간사를, 더 구질구질하게 파고 들어가 들춰내고 까발리는 영화, 사람이 보이는 영화에 동참하고 싶다는 거죠. 그것이 추악한 모습이든, 아름다운 모습이든간에.

최민식은 지난 봄 프랑스 도빌에서 열린 아시아영화제에서 <파이란>으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시가 300만원이 넘는 고급 코냑 루이 13세를 부상으로 받았다. 술 좋아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최민식이지만, 아직 시음은커녕 개봉조차 안 했다. 송해성 감독 같은 술친구들이 “형,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는 둥 온갖 말로 어르고 협박하고 꼬드겨도, 꿈쩍 안 했다. 아직까지다. 그동안은 어찌어찌 참을 수 있었다 쳐도, 칸영화제까지 가는 이 마당에, 굳이 축배를 아낄 이유가 있을까. 하지만 최민식의 생각은 다르다. 자축 파티를 하기엔 너무 이르다는 것이다. 더 기쁘고 소중한 순간이 오면 그때 축배를 들리라, 그렇게 미뤄두고 있다. 배우 최민식이 스스로 만족하고 축하하는 날, 관객인 우린 얼마나 더 아찔하고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될까. 그런 기다림이라면, 지루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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