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안드레아 아놀드 / 출연 나탈리 프레스, 대니 디어, 조디 미첼, 몰리 그리피스 / 제작연도 2003년
글에 생명력을 담으려 카메라를 샀다. 처음 의도와 다르게 카메라 안에서 형형색색 쏟아져 나오는 활기에 빠져들어 풍경을 수집하듯 촬영하고 편집해나갔다. 더 생생하게 담기 위해 망원렌즈에서 광각렌즈로 거리가 가까워질 때쯤 문득 눈앞에서 다채롭게 살아 있는 것들이 카메라 안에서 죽어간다는 죄책감에 빠져들었다. 돌파구가 필요했고 해답으로 서사를 만들어나갔다. 하지만 내가 써낸 서사 안에서의 인물들은 언제나 수동적이고 저항할 수 있는 의지를 갖추지 못한 채 끝내 갇히고 말았다. 암전 속에서 무력하다고 느껴질 시기, 안드레아 아놀드 감독의 단편영화 <말벌>을 보았다.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카메라 안에서 명멸 없이 발광하는 생명력을 느꼈다. 나는 이 영화를 한 픽셀씩 분리해나가면서, 다채롭게 살아 있는 것들이 카메라에 담기고도 생명력을 잃지 않는 법에 대해 고민했다.
영화의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실업자이자 4명의 아이를 둔 23살 싱글맘 조(나탈리 프레스)는 우연히 만난 옛 남자친구 데이브(대니 디어)의 데이트 신청을 받고 일상생활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떨쳐낼 수 없는 삶 때문에 쉽지 않다. 영화의 첫 장면, 잠옷 차림의 조는 4명의 아이와 함께 자신의 딸을 혼낸 중년의 여성을 찾아가 머리채를 붙잡고 싸움을 한다. 기세 좋게 싸움을 걸었지만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바닥으로 고꾸라진 조는 벌떡 일어나 다시는 자신의 딸을 건들지 말라며 경고한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좀처럼 조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거리를 두고 도덕적 판단을 하고 있을 방관자의 시선으로 그녀들을 바라볼 법도 한데 오히려 그녀들과 함께 바닥을 뒹굴며 멀리 떨어진 방관자들을 바라본다. 이처럼 카메라가 인물을 바라보는 것과 다르게 멀리 바라본 풍경은 바람에 흔들리는 빨래, 유모차를 끌고 가는 사람들, 한가롭게 앉아 있는 개, 이 평범한 풍경들은 200mm 망원렌즈로 촬영되어 카메라와 밀착되어 있는 조의 공간과 거리감을 만든다. 하지만 그런 카메라가 조를 멀리서 바라볼 때가 있다. 조는 데이트를 위해 약속장소인 주점 밖에 아이들을 놔두고 데이브와 사랑을 나눈다. 그 순간 카메라의 시선은 조를 질책하기보다 어쩌면 조가 당연하게 누렸어야 할 삶의 모습을 인정하듯 주점에서 데이브와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멀찍이 바라본다.
카메라가 서 있는 공간과 조가 서 있는 공간의 짤막한 분열이 영화를 사랑하게 했다. 카메라가 도덕적 딜레마에 빠져 인물에게서 죄의식과 구원을 찾으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들 곁을 지키며 살아 있는 그대로의 생명력 가득한 삶을 담아내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영화가 생명력만 담아내고 있는 건 아니다. 이들을 잠식시킬 수 있는 불안 또한 끊임없이 역설한다. 그리고 그 불안을 끝내 해소시키지 않는다. 그런데도 카메라는 마지막 장면에서 시동이 잘 걸리지 않는 데이브의 차를 타고 가는 조와 아이들을 떠나보낸다. 그들 옆에서 호위하듯 지키던 카메라가 아직 정확히 해소되지 않은 불안을 가지고 카메라 밖, 여정을 떠나는 그들을 보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조가 불안을 이겨낼 힘을 카메라 안에서 확인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살아있는 것들이 카메라를 관통해서 지나가는 찰나의 순간, 나는 어떤 태도로 마중할 것인가? 영화를 보고 생긴 이 질문을 카메라를 드는 매 순간 끊임없이 되뇐다.
●조민재 영화감독. 무주산골영화제에서 뉴비전상,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한 데뷔작 <작은 빛>(2018)을 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