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언컷 젬스>가 인물과 세계의 부조리를 보여주는 방법
2020-03-12
글 : 박지훈 (영화평론가)
작은 괴물이 사는 곳

사프디 형제의 <굿타임>(2017)에 대해서 이용철 평론가는“<굿타임>은 달릴 때보다 멈춰 설 때가 더 많은 영화”라고 비평했고, 나는 리뷰에서 이렇게 썼다. “코니(로버트 패틴슨)는 미친 듯이 질주하지만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르기에 뱅글뱅글 맴돈다.”

그런 영화들이 있는 것 같다. 미친 듯이 달리고 있는 것 같은데, 문득 주위를 돌아보니 다시 출발점에 서 있는 영화. 봉준호의 영화가 그렇다. 봉준호의 영화는 어리석은 자들에 대한 영화이며, 어리석은 자들은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자들이다. 이러한 개인의 부조리는 부조리한 세계와 공명한다.

이런 영화들을 카프카적인 영화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카프카의 <소송>에서 기소당한 요제프 K는 자신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변신>도 마찬가지다. 카프카의 소설은 주인공의 시점에서 세계를 보기 때문에 세계의 부조리는 즉각적으로 드러나지만, 주인공의 부조리함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예컨대 부조리한 세계 속 <소송>과 <변신>의 주인공은 모두 부조리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이기도 하다. <소송>에서 요제프 K는 법 앞에서 한번도 제대로 맞서 싸우지 않았다. 그저 기일의 연기 같은 우회로를 찾기 위해 힘썼을 뿐이다. <변신>의 그레고르는 자신이 벌레로 변한 것이 모든 불행의 시작이라고 생각할 뿐, 자신이 변신하기 이전부터 권위적 가부장으로서 가족에게는 벌레와 다름없었음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프디 형제의 영화에서 사태는 달라진다. 사프디 형제의 영화는 제3자의 관점에서 주인공을 보고 있기에 주인공의 부조리가 비교적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즉, 그들의 질주가 실은 거짓 질주임을, 모든 위기는 그들이 스스로 자초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카메라가 속해 있는 세계의 부조리는 상대적으로 쉽게 보이지 않는다.

카프카적인 영화

<언컷 젬스>의 오프닝에서 카메라는 하늘에서 내려온다. 하늘에서 사람들에게로, 다리가 부러진 사람을 보여준 뒤, 동굴로 향하는 두 사람을 따라간다. 그리고 동굴에서 발견된 보석을 클로즈업한다. 카메라는 보석의 내부로 들어가고 그곳에는 소우주가 펼쳐져 있다. 그리고 그 소우주는 한 인간의 장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카메라는 다시 장 밖으로 나온다. 이러한 카메라의 이동은 욕망의 이동과 궤를 같이한다. 광부의 욕망이 하워드(애덤 샌들러)의 욕망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욕망은 개인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실재하는 바이러스처럼 이동하고 있다. <언컷 젬스>는 일종의 바이러스에 대한 영화이며 동시에 바이러스의 눈으로 본 세계에 대한 영화다. 인물들이 보석을 바라볼 때 미지의 존재를 다루는 SF나 공포영화의 음악이 흘러나오는데, 이는 시각적 지시와 음향적 지시의 불일치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 불일치가 관객에게 지속적인 불안감을 일으킨다. 보이지 않는 것의 존재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 오프닝은 영화를 축약하고 있다. 두 광부는 동료의 고통을 외면한 채 동굴에서 보석을 채취한다. 어두운 동굴은 두 광부의 욕망의 통로이며, 하워드의 장과 연결된다. 이 어두운 통로들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영화를 살펴보자. <제3의 사나이>(1949)에서 남자의 추악한 욕망과 비밀이 모두 드러나는 장소는 어두운 하수도다. 하수도와 장은 찌꺼기가 배출된다는 점에서 유사하며, 장에서 배출된 찌꺼기는 하수도로 모인다는 점에서 하수도는 이 사회의 장과 같다. 즉, 하수도는 개개인의 장과 연결된다. <제3의 사나이>의 비열한 남자는 사회의 배설물이며, 봉준호의 영화에서는 괴물 혹은 살인자로 시각화된다. 이 하수도에서 사람들은 스스로의 배설물에 고통받고 있다. 즉, 핍박받는 민중과 핍박하는 권력은 구별되지 않는다.

<언컷 젬스>는 배제하는 자와 배제당하는 자의 교환과 증식을 보여준다. 예컨대 드매니(라케이스 스탠필드)에 의해 입장을 거부당했던 하워드는 그 후 늙은 채권자의 입장을 거부한다. 모든 인물들은 주변인이 되며, 영화의 카메라는 프레임으로 인물의 얼굴을 자르거나 다른 신체를 난입시킴으로써 중심의 부재상태를 만들며 인물에 대한 주변화 기능을 수행한다. 영화는 <굿타임>의 결말처럼 배제의 이미지로 채워진다. 이중문으로 바깥과 분리된 보석 가게는 배제와 분리가 일어나는 장소다. 동시에 하수도처럼 욕망이 드러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인물들은 그곳에서 욕망을 내보이고, 사기와 협잡,살인과 절도가 일어난다. 작은 괴물, 그렘린의 모형은 이 공간에 대한 상징물이다. 보석 가게 내부의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하워드의 사무실이 있다. 이곳은 하워드가 아이처럼 울먹이는 퇴행의 장소다. 가장 안쪽의 공간에서 하워드는 더 거대한 욕망을 드러낸다. 거대한 욕망의 기저에 퇴행적인 어른이 있는 것이다.

<언컷 젬스>의 운동은 <굿타임>에서처럼 원운동을 그리고 있다. 하워드는 보석 가게, 집, 애인 집, 전당포를 순환한다. 그러나 하워드의 욕망이 점점 더 커짐에 따라, 더 많은 사람들이 공범자로 연루되고 하워드의 운동 또한 확장한다. 이 원운동은 파멸을 피하기 위한 질주가 아니라 더 큰 파멸을 향한 질주다. 다만 하워드는 질주에 몰입해 있기에 자신의 종착지를 보지 못한다. 하워드의 죽음은 영화의 초반부터 예견되고 있지만, 그는 대장암을 걱정할 뿐 그를 죽음으로 이끌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하워드는 <소송>의 요제프 K처럼 자신의 변제기를 유예할 뿐, 자신의 위기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는다. 하워드의 위기를 보는 것은 정작 다른 사람들이다. 보석에 홀려 있던 KG(케빈 가넷)는 자신의 질주를 멈추고서야, 하워드의 위기를 본다.

홀린 자들의 끝없는 증식

모든 사건의 촉매처럼 보이는 보석은 실은 맥거핀에 가깝다. 보석은 외부의 사건을 촉발하는 것이 아니라 하워드의 내면을 보여줄 뿐이며, 하워드는 그저 관성에 따라서 반복적인 운동을 하고 있을 따름이다. 보석이 있든 없든 하워드는 아르노(에릭 보고시안)의 돈을 갚지 않았을 것이며, 어떤 수를 써서든 돈을 마련해 도박을 했을 것이다. 일확천금의 꿈에서 시작된 하워드의 욕망은 결국 하워드를 파멸로 이끌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워드의 욕망은 순수한 자신의 것이 아니다. KG가 보석에 홀렸던 것은 그가 보석에서 수많은 과거의 이미지들을 봤기 때문이다. 이 이미지는 KG의 주관적 환상이 아니다. 하워드도 KG가 본 것과 똑같은 이미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 이미지는 실재하는 것이며, 객관적인 것이다. 하워드와 KG는 똑같이 보석에 홀린 자들이다. 홀린 자들의 끝없는 증식, 이것이 <언컷 젬스>가 보여주는 것이다.

하수도라는 땅속 줄기는 각각의 욕망들과 이어져 있다. 하수도는 욕망이 모이는 곳일 뿐만 아니라, 역류하여 개개의 욕망을 만들어내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개인의 욕망은 유사하게 만들어진다. 영화의 마지막, 하워드의 죽음은 단지 한 인간의 파멸이 아니다. 무한히 증식하는 욕망의 결말이며, 홀린 세계의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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