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매드맨>과 <핸드메이즈 테일>, 공포영화 <인비저블맨>으로 이어지는 엘리자베스 모스의 필모그래피는 그 자체로 하나의 메시지가 된다. 여기에 제인 캠피온이 제작·연출을 겸한 TV시리즈 <탑 오브 더 레이크>를 더할 수도 있겠다. 모스는 지난 10여년간 21세기를 살아가는 10대들에게 대중문화 속 페미니스트 아이콘으로 각인되기 충분한 캐릭터들을 연이어 연기해왔다. 여기서 이런 가정법의 질문도 가능해진다. <매드맨>과 <탑 오브 더 레이크>와 <핸드메이즈 테일>이 없었다면모스는 <인비저블맨>의 세실리아가 될 수 있었을까? 혹은 엘리자베스 모스가 아니었다면 <인비저블맨>은 지금과 같은 호평을 받을 수 있었을까?
<겟 아웃> <어스> 등을 성공시킨 블룸하우스의 공포영화 <인비저블맨>은 엘리자베스 모스가 구축한 이미지와 연기력에 크게 기댄 영화다. 영화는 세실리아(엘리자베스 모스)가 자신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는 남편 애드리안(올리버 잭슨 코언)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하는 이야기다. 애드리안은 자살로 죽음을 가장한 뒤 ‘인비저블맨’이 되어 세실리아를 스토킹하고, 세실리아는 투명인간이 된 남편과 사투를 벌인다. 사투는 너무도 외롭다. 투명인간과의 싸움에 앞서 투명인간을 볼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는 주변 사람들과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내 죽은 남편이 날 괴롭히고 있어요. 당신의 눈엔 보이지 않나요?” 세실리아의 외침은 그저 정신 나간 여자의 소리처럼 들릴 뿐이다.
허버트 조지 웰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투명인간 이야기는 그동안 무수히 리메이크되어왔다. 블룸하우스가 제작하고 리 워넬 감독이 연출한 <인비저블맨>은 오래된 투명인간 이야기를 시대의 흐름에 맞게 새로고침한다. 관음적 욕망에 초점을 맞춘 투명인간 이야기가 아니라 감시와 억압, 불신과 편견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여성의 분투가 중심이 되는 이야기로 중심축을 옮겼다. ‘과연 그녀를 믿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이 장르적 장치로 활용되는 것 또한 “장르영화는 현안을 관찰하는 좋은 렌즈가 된다”(<가디언>)는 모스의 말을 빌려 설명할 수 있다. 그러니까 칼을 들고 나에게 달려드는 한명의 남자를 상대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적과 싸우는 것이다. 모스는 세실리아의 고군분투가 ‘보이지 않는 존재’와의 싸움임을 강조하며 이런 인터뷰를 했다. “우리는 가부장제에서 살고 있다. 당신이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면 그중 일부는 가부장제에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하퍼스 바자>)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여성의 싸움은 이처럼 우리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세실리아의 투쟁은 곧장 드라마 <핸드메이즈 테일>을 소환한다. 누군가로부터 감시당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인비저블맨>의 세실리아와 <핸드메이즈 테일>의 준/오프레드는 닮았다. 마거릿 애트우드가 1985년에 발표한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하는 <핸드메이즈 테일>은 트럼프 시대의 미국에 대한 우화로도 읽힌다. 모스가 연기하는 준과 드라마 속 시녀들이 착용하는 붉은 망토와 하얀 두건은 이 시대 여성들의 저항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어 현실과 연결된다. 여성의 몸을 국가가 통제하려는 시도가 있을 때마다 현실의 여성들이 <핸드메이즈 테일>의 시녀들처럼 옷을 입고 항의의 행진을 하는 것이다. 모스가 프로듀서로도 참여한 <핸드메이즈 테일>은 가부장제와 성경을 근본으로 한 전체주의국가 길리어드가 미국을 장악하고, 임신이 가능한 여성들이 소수의 남성 사령관의 집에 시녀로 들어가는 설정에서 이야기의 가지를 뻗어간다. 모스는 평범한 회사원에서 어느 날 갑자기 시녀가 되어버린 주인공 준 오스본을 연기하는데, 시녀의 임무는 오직 사령관의 아이를 낳는 것이다.
드라마는 준의 각성과 변화, 저항과 투쟁을 따라간다. 모스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 유독 빛난다. 충혈된 큰눈 아래 드리운 다크서클과 복잡한 심경을 전하는 미간의 주름은 기어이 삼켜야만 하는 말들을 대신할 때가 많다. 공포에 질려 창백해진 모스의 얼굴은 우리를 공포로 얼어붙게 만든 납득이 불가능한 세상을 되비춘다. 어둠은 문자 그대로의 밤뿐 아니라 시대의 어둠까지 포함한다. 암흑의 시대에 세상과 싸우는 위험하고 용감한 여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정의와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용인된 억압에 반항하는 여자. 세실리아와 준은 그런 여자들이다.
그리고 세실리아와 준에 앞서 페기가 있다. 1960년대 뉴욕 광고회사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매드맨>에서 모스는 광고회사의 비서에서 카피라이터로 성장하는 페기 올슨을 연기한다. 유능한 크리에이터 돈 드레이퍼(존 햄)의 공사다망함만큼이나 페기의 성장을 지켜보는 재미로 <매드맨>을 사랑한 팬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남자들의 한심한 추파와 농담 속에 출퇴근하던 뉴 걸이 일과 사랑에 주도적인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도, 하다못해 촌스러운 패션이 진화하는 것도 사랑스러웠다. <매드맨>의 페기는 차별이 만연했고 여성 카피라이터도 전무했던 시대에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는 여성캐릭터로 드라마의 한축을 담당했고, 때론 수채화같은 투명한 표정으로 때론 불투명한 유화 같은 단단한 표정으로 말을 거는 엘리자베스 모스에 의해 시즌 끝까지 생생한 모습으로 존재했다.
인기 여부에 따라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시즌제 미국 드라마의 특성상 배우들은 개인의 사정 때문이건 작품의 사정 때문이건 중도에 하차하는 경우가많다. 7번째 시즌까지 이어진 <매드맨>에서 한 시즌도 빼먹지 않고 자신의 존재감을 공고히 다진 것처럼, 모스는 회를 거듭할수록 궁금해지고 믿음직스러워지는 배우다. 모스가 ‘피크 타임 TV드라마의 퀸’으로 불리게 된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웨스트 윙>에서부터 그랬다. <웨스트 윙>에서 모스는 조사이어 바틀렛 대통령의 막내딸 조이 바틀렛으로 출연, 각본가인 에런 소킨이 조이의 이야기를 더 써나가도록 만들었다. <어스>를 함께한 조던 필 감독은 모스의 재능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 있다.“감독으로서 엘리자베스 모스와 함께 일해서 가장 멋진 점은 실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세련된 연기의 도구들을 가지고 있다. 무척이나 아름답고, 특별한 뉘앙스를 풍기며, 균형감이 무너진 듯 어딘가 이상하지만 멋진. ‘좀 다른 걸 시도해볼까?’ 했을 때 모스는 언제나 당신이 상상하기 가장 어려운 옵션을 꺼내 보인다.”
모스는 6살 때 연기를 시작했다. 1990년부터 부지런히 TV드라마에 출연해 <웨스트 윙>이라는 히트쇼를 만났고, 영화는 1999년 제임스 맨골드의 <처음 만나는 자유>가 첫 시작이었다. <갈매기> <트루스> <하이-라이즈> 같은 작품에서 보여준 멋진 앙상블 연기, <더 원 아이 러브>에서의 스마트한 1인2역, <탑 오브 더 레이크> <더 키친> <그녀의 내음> 등 여성 캐릭터 중심 영화에서의 뜨거운 활약상 등 모스의 필모그래피는 묘한 일관성 때문에 더 흥미롭다. 자신의 키보다 더 커 보이게끔 작품 속 여성들을 품어온 모스의 차기작은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의 <넥스트 골 윈스>, 웨스 앤더슨 감독의 <프렌치 디스패치>다. <핸드메이즈 테일>의 네 번째 시즌도 곧 공개될 예정이다. 차기작의 목록만으로도 엘리자베스 모스라는 용감한 배우의 여정을 쭉 함께하고 싶어진다.
<매드맨> 시즌1 첫 번째 에피소드
엘리자베스 모스는 <탑 오브 더레이크>와 <핸드메이즈 테일>로 2014년과 2018년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아쉽게도 <매드맨>으로는 상을 받지 못했다. TV에서도 영화에서도 큰 인지도를 얻기전에 출연한 <매드맨>은 모스에게 새로운 기회를 열어준 작품이다. 순진하고명랑한 기운을 뿜는 신입 비서 페기가 어떻게 성차별적 농담을 쏟아내는 남자들로 득시글거리는 광고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성장하게 되는지 이때만 해도 정말 알 수 없었다. 입사 직후 산부인과에서 피임 수술을 받는 모습에서 진작 페기의 진취적 실행력을 눈치챈 이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페기 올슨과 엘리자베스 모스의 드라마틱한 성장, 그 시작을 목격하게 되는 순간은 다시 봐도 기분이 좋다.
영화 2020 <인비저블맨> 2019 <키친> 2019 <어스> 2018 <그녀의 내음> 2018 <미스터 스마일> 2018 <갈매기> 2017 <더 스퀘어> 2016 <록키 블리더> 2016 <하이-라이즈> 2016 <트루스> 2014 <더 원 아이 러브> 2014 <리슨 업 필립> 2012 <온 더 로드> 2009 <들어는 봤니? 모건부부> 2008 <엘카미노> 1999 <처음 만나는 자유> TV 2017~20 <핸드메이즈 테일> 2013~17 <탑 오브 더 레이크> 2007~15 <매드맨> 1999~2006 <웨스트 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