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장국영이라 우기는 이 남자는 그냥 걸어와도 될 걸 꼭 사뿐히 점프 한번을 한다. 내 마음을 다 아는 것처럼 이야기를 들어주다가도 외로움과 사랑을 구분하라 일침을 가한다. 멀리 우주에서도 응원하겠다며 홀연히 돌아서는 그를 언제라도 다시 만나고 싶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장국영(김영민)은 찬실(강말금)에게 그런 존재다. 일과 연애 모두 갈 곳을 잃은 찬실이 다시 손전등을 들기까지, 장국영은 묵묵히 그의 곁을 맴돈다. 장국영을 연기한 배우 김영민은 최근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의 ‘귀때기’로 주목받은 데 이어 드라마 <부부의 세계> 방영을 앞두고 있다. “언젠가 겪고 싶었던 일을 지금 겪고 있다”는 그는 자신이 찬실과 같았던 시절을 곱씹었다.
-<씨네21>과의 인터뷰가 무려 12년 만이다. 2008년 <경축! 우리사랑> 개봉과 함께 진행한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인데, 2020년 <찬실이는 복도 많지>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어느새 영화를 27편 찍었더라.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수의 작품 안에서 심각한 역도 참 많이 했는데, 두 영화는 모두 유쾌한 작품이다. 밝은 영화로 다시 만나니 좋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찬실에게만 보이는 대화 상대인 장국영을 연기했다. 러닝셔츠를 입고 앞머리 한올을 살짝 꼰 모습이 <아비정전> 속 장국영과 똑 닮았더라.
=의상과 헤어만큼이나 움직임도 장국영 같았으면 해서 <아비정전>을 다시 봤다. 장만옥을 향해 양아치처럼 건들건들 걷는 모습이 자유로워 보이더라. 그 느낌을 살리려 걸음걸이 연습을 많이 했다. 내가 진짜 장국영이라고 우기고 싶었다.
-후반부엔 얇은 재킷이나 검은색 긴팔 티를 입고 나온다. 더는 한겨울 칼바람에 배우를 러닝 바람으로 둘 수 없었던 김초희 감독의 뜻이었다던데.
=김초희 감독이 미안했던지 “선배님, 춥지 않으세요? 다른 옷 입어도 되는데…”라고 계속 물었다. 난 쭉 러닝을 입어도 상관없었는데. (웃음) 결국 감독의 배려로 옷을 바꾼건데, 영화를 보니 그러길 잘한 것 같다. 찬실이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는 진지한 신인데 내 맨살이 보였다면 집중이 어렵지 않았을까.
-평소에도 장국영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던데 외모든 연기 스타일이든 진짜 닮고 싶은 배우는 따로 있는 게 아닌지 궁금하다.
=난 장국영이 좋다. (웃음) <해피 투게더>에서도 정말 잘했고, <동사서독>의 반항적인 이미지도 잘 소화하지 않았나. 사실 그런 모습을 닮고 싶다는 생각보단 이 배우가 나이 들어가며 깊어지는 모습을 더 볼 수 있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그가 있었다면 분명 우리 영화를, 찬실이를 응원했을 거다. 혹시 모르지. 내가 장국영 역이라 하면 만나줬을지도.
-영화 속 장국영은 미스터리한 존재다. 그를 귀신, 유령, 영혼, 찬실의 꿈 혹은 상상 속 인물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이 캐릭터를 어떻게 이해하고 연기했나.
=장국영은 그저 영화를 사랑한 한 영혼이고 그래서 찬실의 마음, 생각, 영감, 무의식, 철학 등등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여겼다. 그건 곧 찬실 안에서 스스로를 응원하고 위로하는 존재인 것이다. ‘나’를 응 원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장국영의 대사를 뱉으며 본인도 위로받았을 것 같다.
=영화 촬영을 2018년 겨울에 했는데 드라마 <나의 아저씨>로 알아봐주는 분들이 많았던 시기다. 감사한 나날을 보내는 와중에 “정말 원하는 게 뭔지 알아야 행복”이라는 장국영의 대사를 보니 생각이 많아지더라. 연극, 영화, 드라마 중 무엇을 선택해야 더 행복할지 되묻기도 하고. 물론 쉽게 결론은 나지 않았고, 고민도 하다 말았지만 책, 여행, 영화가 가지는 힘이 이런 게 아닐까. 나를 밑바닥까지 보게 하는것. 그렇게 또 다른 세상이 나에게 밝혀지는 거다.
-연기는 어떻게 시작했나. 고등학교 2학년 때 연극에 빠졌다고 들었는데.
=사춘기도 겪지 않은, 그냥 친구들과 놀기 좋아하는 애였다. 돌아보면 사춘기와 함께 연극을 시작한 것 같다. 형의 친구가 서울 YWCA 연극 서클 ‘센’(scène)의 창단 멤버인데, 거기에 나를 데려갔다. 그땐 삐딱하고 치기어린 태도로 연기를 대했다. “우리가 대학로보다 잘할 수 있어!” 이러면서.
-평범한 학생을 사로잡은 연기의 매력이 뭐였나.
=무대 위에서 호흡이 딱 생긴 순간이 있다. 다른 배우가 나를 밀치는 신이었는데 연습했던 것과 다른, 진짜 짜증 섞인 감정이 올라오더라. 그게 관객에게도 전해지는 게 짜릿했다. 노래 가사처럼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혼자서 객석에 남아 조명이 꺼진 무대를 본 적’도 있다. 공연 후 극장을 청소하다 홀로 남았는데 그때 본 무대가 아직도 기억난다. 이게 뭐지 싶었다. 그때 느낀 감정들이 지금의 나를 이 모양이 꼴로 만든 건가 싶기도 하고. (웃음)
-군 제대 후에야 서울예대에 입학해 연기를 전공했다. 입시를 준비하며 마음고생을 했을 것 같은데.
=아무도 안 알아준다는 느낌이 항상 있었다. 그래서 대학로 공연도, 전문적인 연극 공부도 더 해야겠다고, 하고 싶다고 느꼈다. 가난한 집 삼형제 중 둘째인데, “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세요”라고 부모님에게 얘기해준 형이 특히 고맙다. 형과 동생은 내가 잘되면 잘 되는 대로 안되면 안되는 대로 늘 지켜봐줬다.
-졸업 후 연극, 영화, 드라마에서 20년 넘게 종횡무진했다. 연극판에선 이미 이름난 배우였지만 <나의 아저씨>를 만나 비로소 대중에게 각인되었고 최근 <사랑의 불시착>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요즘 기분이 남다를 것 같다.
=내내 치열했고 불안정했다. 세상과 만나기 위해 스스로에게 너무 많은 질문을 던졌다. 내 색깔, 내 철학을 갖기 위해 나를 쪼는 시절을 보냈다. 돈도 잘 못 벌고 번 돈으로는 술이나 마신 때지만 지나고 나니 고마운 시기였다고나 할까. 요즘은 나를 귀때기로 알아봐주시니 감사하다. 이럴 때일수록 ‘너 지금 뭐 하고 있니’라고 물으며 나에게 집중하려고 한다. 찬실이처럼.
-찬실은 말한다. “내가 좋아하는 일만은 나를 꽉 채워줄 거라 믿었어요. 그런데 잘못 생각했어요. 채워도 채워도 그런 걸로는 갈증이 채워지지 않더라고요. 목이 말라서 꾸는 꿈은 행복이 아니에요.” 김영민에게 연기란 어떤 꿈인가.
=선배들이 항상 “너를 위해서 연기하니? 관객을 위해서 연기하니?”라고 물었다. 난 둘 다다. 내 만족을 위해 연기를 하는 것도 맞지만 내가 참여한 작품을 본 관객이 작품을 보기 전과 조금이라도 달라지길 원한다. 그들 중 누군가의 변화로 세상이 바뀔 수도 있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배우가 되길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