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번셔 연대의 무모한 돌진을 중지시킨 스코필드(조지 매케이)가 블레이크(딘 찰스 채프먼)의 형을 찾아 야전병원 막사에 당도하는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 몰입을 압박하던 서스 펜스와는 분리된 감정이 영화 바깥에서 침투해 들어왔다 해도 좋겠다. 막사 저 멀리 희미하게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을 때부터 스코필드의 서성이는 걸음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내심 아니길 바라면서도 저 노골적인 수미쌍관의 장소가 스코필드의 여정이 마무리될 지점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스코필드가 막사를 둘러보는 순간부터 기이한 움직임이 감지된다. 영화 내내 스코필드에게 밀착해 있던 비현실적인 카메라가 문득, 아니 거의 유일하게 스코필드에게서 잠시 떨어져 홀로 어디론가 향해 날아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스코필드가 환자들의 침대를 빙 둘러가는 사이 카메라는 부상자들로 가득 찬 침대 위를 지나 막사 중간을 관통하듯 직진한다.
스코필드의 동선과 분리된 카메라의 목적지는 당연히 저 멀리 꽃밭 위에 홀연히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다. 나무에서 눈뜬 남자가 한바탕 소동을 끝내고 다시 나무에서 눈을 감는 이야기.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도식적인 형식은 이 영화의 위치를 엄혹한 실화에서 한편의 동화로 치환시켜버린다. 전장의 참혹함은 한여름 밤의 꿈과 같은 찰나의 시간으로 포장되고, 우리가 목격한 모든 비극들은 귀향을 바라는 병사의 낭만적인 사건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그렇게 영화를 보는 내내 경탄하며 두근거렸던 내 마음도 극장을 나서는 순간 한여름 밤의 꿈처럼 날아가버렸다. <1917>에 대한 호기심 역시 거기서 끝났다.
끊어지지 않는 카메라는 무엇을 원하는가
뒤늦게 <1917>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한 건 1242호에 실린 김소희 평론가의 분석이 굳은 머리를 두드려 깨줬기 때문이다. <1917>을 처음 봤을 땐 실감나는 재현과 카메라의 기교에 넋이 빠졌다. 화면을 자르지 않고 시작부터 끝까지 한 테이크로 시간과 공간을 담아내고자 했던 원 컨티뉴어스 숏, 거기에 위성처럼 인물 주위 360도를 회전하는 카메라가 더해져 전장의 모든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재현한다. 이 영화 앞에 ‘체험’이라는 수식어가 자주 등장하는 건 그 때문이다. <1917>은 적어도 기술적으로 상찬받아 마땅한 영화라고 느꼈고 나 역시 몇몇 장면에서는 (말 그대로 물리적으로) 올해 가장 놀라기도 했다. <1917>의 기술적 성취가 그저 놀람에 머물지 않고 초기 영화가 품었던 가능성, 예를 들면 지가 베르토프의 기계적 시각을 연상시킨다는 김소희 평론가의 탁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로저 디킨스의 직진하는 카메라처럼 나도 에둘러 가지 않겠다. <1917>을 보고 난 후 들뜬 마음이 차게 식었던 건 카메라의 노골적인 욕망 때문이었다. 내 질문은 간단했다. 이 영화에 왜 원 컨티뉴어스 숏이 필요했는가. 스코필드와 블레이크, 두 병사의 여정을 끊어지지 않는 카메라로 따라가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1917>의 매 장면은 컨베이어벨트 위 정돈된 부품처럼 매끄럽게 조립되고 연결되어 빈틈이라곤 찾기 어렵지만 그건 완벽한 영화 기계의 구현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결국 영화 내부를 아무리 뒤져봐도 롱테이크의 필연성은 발견하기 어려웠다.
목격하면서도 믿기 힘든 시각적 쾌감을 제공하는 <1917>의 진짜 주인공은 사실 인물이라기보다는 카메라다. 그 꼼꼼함과 완성도는 로저 디킨스의 유려한 롱테이크 그 자체가 영화의 목적인 것처럼 보일 정도다. 이야기와 플롯에 필요한 형식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찍은 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 추론. 다시 말해 <1917>은 끊어지지 않는 카메라의 욕망을 실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기획된 프로젝트다. 요컨대, 서사와 이야기를 위한 카메라가 아니라 카메라를 위한 서사다. <1917>은 끊어져서는 안되는 숏에 봉사할 수 있도록 직진하는 이야기를 구성하고, 빠져나갈 구멍 없이 관객을 잡아끌고 가기 위해 360도로 인물 주위를 훑는 카메라의 움직임을 허락한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이건 일종의 마술 공연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관객은 놀람을 통해 영화에 몰입하는 한편, 끊임없이 트릭과 비밀을 궁금해하며 온전한 감상으로부터 분리되는 이율배반적인 상태에 놓인다.
관객의 위치와 감각의 분리에 대해선 뒤에서 다시 다루기로 하겠다. <1917>의 이러한 마술적인 기교와 장치들이 영화의 가치를 떨어트린다고 생각진 않는다. 아니 오히려<1917>에서 미학적 가능성 혹은 예술을 향한 씨앗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건 초기 영화의 기능들에 뿌리를 둔 이 영화의 기술적 시도들 덕분이다. <1917>은 그려진 영화가 아니라 찍는 영화로서의 물리적 한계에 도전한다. 로저 디킨스에 따르면“<1917>에서 실제로 물리적인 아날로그 롱테이크는 최장 7분 남짓”이다. 나머지는 교묘한 트릭으로 카메라가 끊어지지 않는 것 같은 착시를 유도했다. 그런 의미에서 <1917>은 원 컨티뉴어스 숏이 아닌 롱 컨티뉴이티 숏에 가깝다. 이 영화에서 시간과 공간이 연결된다는 건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의 결과라기보다는 ‘연결시키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산물이다. 우리는 의외로 쉽게 이 영화의 편집점과 트릭들을 발견할 수 있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1917>이 전달하는 퍼포먼스의 경이로움이 깎여나가진 않는다.
일부 CG나 편집의 트릭을 활용하면서까지 로저 디킨스가 도달하고자 했던 건 끊어지지 않는 카메라가 주는 원초적인 운동성이다. 디지털로 그리는 영화가 시각의 경이를 채우고있는 현재, <1917>은 구태여 물리적인 연결(그것이 비록 환영이라 할지라도)을 통해 초기 영화가 품었던 운동의 경이를 복원시킨다. 우리가 현재의 시점으로 과거를 바라보는 과정에서 착각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초기 영화들 역시 당시 관객에겐 어트랙션 혹은 마술쇼의 연장으로서 시각적 쾌감에 충실했다는 점이다. 지가 베르토프의 영화는 ‘카메라 움직임’이라는 개념을 추상적으로 사유하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기계적 이미지와 카메라의 운동이 주는 직관적인 충격,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현상 그 자체에 집중하는 영화다. 이를테면 이야기를 담아내는 정확한 형상이 아니라 리듬과 프레임,외화면과의 대화에서 파생되는 ‘대화’를 포착하는 게 중요하다. 영화에서 이른바 ‘체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상태는 바로 이와 같은 해석이 무의미한 지점에서 출발한다. 자유로운 움직임 또는 해방된 감각들.
반면 현대 영화들은 지나치게 내러티브에 종속되는 경향이 있다. 오랜 시간 길들어진 습관이라고 해도 좋겠다. 내러티브 영화에 학습된 관객은 플롯에 지나치게 많은 환상을 품는다. 영화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가. 우리는 영화에서 무엇을 봐야 하는가. 메시지와 내러티브에 과잉된 의미를 부여해온 습관은 영화의 ‘움직임’에 족쇄를 채운다. 이야기는 생각보다 대단하지 않다. 우리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움직임을 목격하기 위해서 영화를 관람할 수도 있다. 그 연장에서 <1917>의 내러티브가 빈약하다는 지적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인물이 A에서 B로 이동하는 것. <1917>의 플롯은 단순하게 말해 그게 전부다. 하지만 관점에 따라서 이건 약점이 아니라 서사로부터의 해방을 이끌어낼 열쇠가 될 수도 있다. 인물의 이동과정에서 발생하는 움직임, 특히 카메라의 움직임이야말로<1917>의 본질이며 그것을 중심으로 영화를 구성했다고 해서 폄하될 이유는 없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의외의 순간들을 이끌어내기도 한다는 점이 이 영화의 비범한 면모 중 하나다. 가령 스코필드가 포탄이 터지는 전쟁터 한복판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장면은 서로 다른 방향들의 충돌을 일으킨다. 이때 발생하는 순수한 운동의 쾌감을 극대화시키는 것은 중간에 스코필드와 병사가 부딪치는 순간마다 멈칫하는 짧은 호흡이다. 운동은 장애물을 통해 비로소 실체를 드러내는 법이다. 실제 촬영 현장에서 엔지나 다름없었을 그 충돌들 덕분에 스코필드의 질주는 비로소 생명을 얻는다. 이러한 움직임은 단지 동작에 그치지 않고 장소의 이동, 공간의 이동, 감각의 이동, 나아가 시간의 이동으로 확장된다. 혹자는 그걸 ‘체험’이란 표현 안에 압축하기도 한다.
체험의 정체
여기서 다시, 김소희 평론가가 제기한 의문, “이 영화는 과연 21세기적 엔터테인먼트 체험으로 관객을 유도하는가. 도리어 시각에 매몰된 고전적 관람 경험으로 관객을 이끄는 쪽에 가깝지 않은가”로 돌아가보자. 김소희 평론가의 글은 내가 어렴풋이 더듬던 개념을 구체화시킨 흥미로운 비평이었지만 이 질문에 대해서만큼은 좀더 파고들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김소희 평론가는 고전적 재현 방식에 뿌리를 둔 <1917>의 가능성과 21세기 관객의 관람 방식의 괴리를 짚어내며 <1917>의 가능성을 탐구해 들어갔다. 일정 부분 동의한다. 로저 디킨스의 고집에서 그와 같은 탐미적인 접근을 발견하고 싶은 건 평자로서의 나의 욕망이기도 하다. 다만 동시에 나는 이것이 초기 영화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현대의 시선처럼, <1917>이 스크린 위에 재현한 구체적인 사태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개념화시킨 건 아닌지 스스로 의심해본다. 적어도 내게 <1917>의 카메라는 관객 앞에 전장을 재현한다기보다는 관객을 전장 한가운데 소환하는 쪽에 가깝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두 가지 방식 사이의 간극은 크다. 전자가 시각적 재현과 그 한계를 인지하고 움직임 그 자체를 목격하는 ‘행위’라면, 후자는 무한대의 이미지를 활용하여 디자인한 ‘감각’에 가깝다. 전자가 외화면의 영역과 픽션의 관계를 탐구하는 쪽이라면, 후자는 가상현실이라는 자리를 확보하고 즐기는 철저한 유희다. 정리하자면, 전자가 (초기 영화가 추구했던) 영화적 체험을 목표로 하는 반면 후자는 (관객의 분리를 전제로 한) 게임, 혹은 마술쇼의 리얼리티를 추구한다.
<1917>이 의도와 관계없이 불러일으키는 착시는 여기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1917>을 보고 전장의 ‘체험’이란 수식어를 쉽게 갖다 붙이지만 이 단어는 좀더 섬세한 취급이 필요하다. <1917>이 스크린 위에 구현하는 전장은 안전한 가상현실과 다름없다. 샘 멘데스 감독은 영화의 역사가 축적해온 여러 가지 몰입의 방식들을 사용하지만 역설적으로 로저 디킨스의 현란한 카메라는 이 몰입의 메커니즘에서 관객을 근본적으로 분리시킨다. 다시 말해 <1917>이 재현하는 전장이 아무리 생생해도 그것은 재현된 시공간이라는 두터운 벽을 절대 넘지 않는다. 로저 디킨스의 카메라가 관객의 멱살을 잡고 빈틈없이 끌고 가겠다는 본래의 의도와 달리 몰입의 방해요소로 작용하는 이유는 단절을 허용치 않는 카메라의 욕망이 모든 요소들을 앞서기 때문이다. 사실 이건 몰입을 방해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영화와 다른 방식의 체험에 가깝다. 우리는 그 표현 방식을 이미 알고 있다. 바로 비디오게임이다. 물론 그것이 <1917>의 의도는 아닐 것이다. <1917>의 촬영은 근본부터 영화적인 것, 아날로그적인 향수에 집착한다. 그럼에도 그 의도와 달리 점점 영화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진다. 나는 이와 같은 괴리가 오늘날 영화와 게임의 관계를 설명해줄 단서라고 믿는다. 이것은 오늘날 극장이 어떤 공간, 무엇을 위한 장소로 변모해가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지점이기도 하다. 하나의 임무가 끝나고 여전히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병사 스코필드처럼, 리얼리티는 이제 영화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사실보다 사실적인 재현은 역설적으로 관객의 자리, 사유의 호흡을 앗아가는 쪽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여기서 영화와 게임의 매체적인 차이를 거시적으로 다루기엔 지면의 한계가 있다. <1917>이 게임에 가까운 감각으로 소화되는 이유를 딱 한 가지만 꼽자면, 바로 외화면을 인지하고 다루는 방식 때문이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2차원 평면 위의 예술이다. 그것을 3차원 혹은 현실로 확장하는 것은 관객의 사유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보여주지 않는 것은 언제나 보여주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 화면 바깥, 제시된 정보 바깥 영역이야말로 픽션의 힘을 발생시키는 원동력이다. 이것은 비단 공간의 외화면에 국한되지 않고 시간의 외화면, 나아가 관객을 향한 빈자리로 확장된다. 가령 두 인물이 대화할 때 단 몇초의 침묵이 영화 전체의 상태를 끌고 갈 수 있다. 어쩌면 영화는 그 침묵의 순간을 물질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영화의 매혹은 침묵의 빈자리, 쓸모없는 시간, 사이의 공간을 발생시키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반면 게임이 가상현실을 구축하는 기본은 가능한 한 모든 정보를 빽빽하게 채워넣는 것, 달리 말하면 화면 바깥의 영역을 남겨두지 않는 것이다. <1917>은 제한된 시점으로 인물의 뒤통수를 따라가지 않는다. 종종 물리적인 법칙마저 무시하며 인물 주위를 위성처럼 돌면서 모든 풍경을 샅샅이 잡아주는 카메라는 침묵하는 법을 망각한다. 그리하여 로저 디킨스의 카메라는 미지의 영역을 확장하는 대신 즐길 만한 가상의 현실을 구축한 뒤 그곳에 안전하게 머무른다.
세번의 엔딩, 그리고 영화의 죽음
<1917>의 카메라는 끊어지면 죽을 것처럼 꾸역꾸역 상황을 이어간다. 혹은 죽음 뒤에야 정지와 침묵을 허락받는다. 1시간 즈음에 기절한 뒤 불쑥 출연하는 암전숏처럼 말이다. 적지 않은 영화에서 롱테이크는 자르고 붙여져 재구성된 시간, 그러니까 편집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어왔다. 편집이 사건과 사건의 사이에 놓은 시간, 그러니까 잉여로운 순간들을 모두 생략하고 사건들을 점으로 연결시킨다면 롱테이크는 이 잉여의 시간들을 부활시켜 ‘사이’를 채워넣는다. 앞서 말한 침묵과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1917>의 롱테이크, 원테이크는 그 목적과 방향이 전혀 다르다. 이 영화는 지속되는 시간, 시간의 동시성을 전달하는 듯 연기를 하지만 실은 그건 트릭이자 환상에 불과하다. <1917>이 원하는 건 오직 시간의 동시성이 가져다주는 효과다. 다른 말로 리얼리티, 그러니까 전장 한복판에 던져진 것 같은 생생함. 물론 모두가 느끼는 바와 같이 이것은 위장이다,
블레이크가 칼에 찔려 사망한 뒤에 기다렸다는 듯이 등장하는 영국군과 스미스 대령(마크 스트롱)은 롱테이크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나 다름없다. 블레이크가 급격한 출혈로 죽는 과정도 마치 빨리감기를 한 것처럼 빠른 속도로 얼굴에 혈색이 사라지는데, 이 영화의 트릭과 환상이 노골적으로 깨지는 지점은 이 밖에도 곳곳에 흩어져 있다. <1917>은 실시간, 그러니까 시간의 동시적인 연결이 아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동이 트기 전 8시간 안에 벌어지는 이야기를 2시간 안에 담아내는 영화는 어딘가를 압축해야 한다. 중간에 기절과 암전숏을 넣은 중요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원테이크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리얼타임이라는 환상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물리적으로 시간을 점프할 필요가 있으니까 한번 끊어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1917>은 원 컨티뉴어스 숏이라는 형식을 통해 이를 실시간의 감각으로 위장한다. <1917>의 구성요소와 카메라의 의지는 영화적이다. 하지만 카메라의 욕망과 달리 모든 결과는 비영화적이다. 아니, 영화를 향한 욕망이 커질수록 역설적으로 간극은 점점 벌어진다.
필사적으로 이어가는 카메라와 달리 <1917>의 서사는 수시로 정지하고 고이고 맴돈다. <1917>에는 무려 세번의 엔딩이있다. 블레이크의 죽음과 함께 영화는 한번 끝난다. 블레이크와 스코필드의 버디무비였던 첫 번째 영화가 실시간으로 전장을 누비는 리얼리티 필름을 흉내낸다면 스코필드 혼자 적진을 돌파하는 두 번째 영화는 환상적인 장면들과 극적인 분위기로 채워져 있다. 불타는 마을, 시리도록 차가운 강물, 흩날리는 꽃잎까지 마치 지옥에서 천국까지 오가는 단테의 <신곡>처럼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순간들이 펼쳐진다. 이 두 번째 여정은 19세기 미국 민요 <방황하는 나그네>가 울려 퍼지는 숲속에서 끝난다. 나무에서 시작해 숲에서 끝나는 이야기. 하지만 영화는 땅에 안착한 무거운 카메라를 기어이 다시들고 스코필드를 한 그루 나무가 있는 곳까지 끌고 간다. 이 기계적인 단절, 분리된 무대들에 비하면 영화 중반 스코필드의 기절과 함께 일어나는 카메라의 암전은 아무것도 아니다. 영화는 거대한 기계처럼 작동하고 매끈하게 연결되어 있는듯 보이지만 실은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이쯤 되면 <1917>의 멈추지 않는 카메라 운동은 마치 죽음에의 공포에 저항하는 부질없는 발버둥처럼 보인다. 어쩌면 그 죽음의 또 다른 이름은 영화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