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허준호에 관한 검증된 사용법 중 하나는 그를 ‘비장의 무기’로 등장시키는 것이다. 2016년에 영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드라마 <뷰티풀 마인드>로 6년여의 공백을 깨고 나타난 허준호의 새로운 전성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주인공에게 실질적인 힘을 실어주거나 정신적 지주로 기능하는 조력자의 예(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이하 <천문>),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 <킹덤>), 자신의 프로페셔널에 지극히 충실한 악당의 예(<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퍼펙트맨> <결백>), 순박하고 평범한 초상을 대변하는 소시민의 예(<이끼> <국가부도의 날>)까지 허준호가 연기한 표본들은 육중한 두드림으로 스크린에 안착했다. 1986년에 영화 <청 블루 스케치>로 데뷔한 허준호는 날렵한 개성이 두드러지는 성격파 연기로 1990년대에 믿음직한 주조연으로 자리잡았다. 드라마틱한 마스크 덕분인지 그는 동시대 현실의 층위를 살짝 비껴나간 판타지, SF, 시대극의 적임자이기도 했다(영화 <화산고> <중천> <신기전>, 드라마 <주몽>).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 시즌2의 시청 가속도에 불을 붙인 장본인인 안현 대감 역시 장르적 피사체로서 허준호의 매력을 염두에 둔 작가의 의도가 십분 발휘된 경우다. 충신의 죽음, 그리고 낯선 부활. 질주 본능을 드러내 보이며 새 시즌의 활주로를 열어젖힌 허준호의 추진력은 힘이 셌다. 여전한 흥분을 안고, 거주지인 미국에서 숨고르기 중인 배우 허준호에게 편지를 띄웠다. 응답은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고 몇의 주고받기가 대화를 풍성하게 이었다. “제가 맡게 되는 역할에 객관적이고 솔직해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게 잘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매 작품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 외에 다른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자주 환한 감사와 열의, 절도 있게 단련된 성실함을 드러낸 배우 허준호의 현재를 여기에 전한다.
-2016년 복귀 이후로는 활발히 활동 중이시죠. 최근 영화 <결백>은 코로나19로 개봉이 연기됐고 류승완 감독의 신작 <모가디슈>는 촬영이 끝났습니다. OCN 드라마 <그들이 있었다>의 출연 확정 소식도 들려오네요. <킹덤> 시즌2 이후 휴식 중인데 요즘 뭘 하고 지내시나요.
=주어진 작품들 하나하나가 제겐 너무 감사해요. 그래서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또 나름대로 중간중간 잘 쉬어가며 하자는 생각이에요. 평소엔 주로 운동을 많이 하고요. 요즘은 코로나19로 비상인만큼 집에만 있어요. 대신 그동안 못 본 작품들을 실컷 보고 있습니다.
-<킹덤> 시즌2 속 조정의 권력다툼 구도에서 안현 대감은 그 인물의 정확한 심중이나 진위를 알 수 없어 긴장감을 만드는 주체입니다. 세자의 대부 같은 역할이면서 , 생사초에 관한 비밀도 품고 있기에 안현대감의 행보를 향한 확신을 갖기 쉽지 않았어요. 경계에 서 있는 인물을 연기할 때 배우는 주로 어떤 요소들을 고려하게 되나요.
=주어진 상황 그 자체에 충실한 연기를 하는 것이 제가 할 일이에요. 기본적으로는 작가님과 감독님이 그려주신 세계관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임합니다. 이번 작품은요, 무엇보다 대본에 충실하려 했어요. 작품에 관해서라면 제가 작가님, 감독님만큼 깊이 이해하기는 힘들다는 전제하에 계속 질문을 던지면서 해결하는 편입니다. 그다음부턴 무조건 주어진 상황이 지금 제가 처한 현실이라 믿고 이입합니다.
-과거 인터뷰에서 드라마 <주몽>의 해모수 연기를 설명하면서 신화적 고증이나 시대극에 어울리는 말투에 집중하기보다는 일단 인물이 ‘사람’이 되게 하고 싶었다고 말하셨죠. 그래서 일부러 간단히 해석했다고요. 비슷한 느낌으로 최근 허진호 감독의 <천문>에서 조말생을 연기할 때도 말투나 제스처에 현대적인 느낌을 자유롭게 가미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시대극과 현대극을 떠나서 우선은 작품 속에서 인물이 그려내야 하는 약속이란 게 꼭 있어요. 완성된 대본 안에 배우의 연기가 들어가는 과정 중에, 굳이 무리한 것을 더하지 않는 편입니다. 최초의 약속에 더 충실하려고 해요. 일부러 대사톤에 관해 얘기했던 <주몽>의 경우 그 당시 ‘실제 사람들이 정말 그렇게 말을 했을까?’라는 의문이 시작이었어요. 그렇듯 항시 ‘왜?’라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나머지는 디렉션에 의지하면서 캐릭터를 풀어가고요.
-외환위기로 타격을 입은 소시민을 연기한 <국가부도의 날>과 조직 보스를 연기한 <퍼펙트맨>은 비슷한 시기에 간극이 큰 캐릭터를 보여준 경우라 흥미로웠습니다. 대표하는 군상이 뚜렷한 스테레오타입의 캐릭터들일 수 있는데, 막상 배우가 연기한 결과물을 보면 주관적 해석 덕분에 인물의 매력이 살아났다는 느낌이 들어요.
=감독님의 디렉션이 가장 우선이에요. 제가 하는일이라면 최대한 결론이 보이지 않을 수 있는 어떤 지점을 찾는 것?
- ‘결론이 보이지 않을 수 있는 지점’ 은 어떤 뜻일까요.
=인물에게 예상 가능한 지점이 있다면 그걸 연기로 피해갈 수도 있어요. 관객의 입장으로 봤을 때 ‘이럴 수 있겠다’ 싶은 부분이 최대한 보이지 않도록 또는 대본에서 제시되어 있는 상황을 오히려 역으로 보이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여러 가지 변수에 대해서만큼은 늘 고민하는 편이에요.
-리더, 조력자, 형, 보스 등 주로 실질적인 권력관계에서 상위에 있는 인물들을 연기하는 편입니다. <킹덤> 시리즈나 <60일, 지정생존자>처럼 최근엔 주인공이 내면적으로 의지하고 따르는 사람을 연기한 경우에 반응이 무척 좋았어요.
=모두 저와는 전혀 다른 인물들이에요. 본래의 저는… 성격이 급하고 참을성과 집중력이 부족한 편이라 대본을 보면서 늘 많이 배우고 있다고 봐야겠지요.
-배우 수업의 시간들이 천성을 바꿔놓은 부분이 있다고 느끼세요?
=위축… 이라는 표현이 맞는 말일지는 모르겠습니다. 배우란 자연인으로 살아가기에는 많은 제약이있으니 저절로 위축된 성격이 후천적으로 생기지않았나 생각합니다.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기다림과 인내를 배웠어요. 어렸을 땐 이런 필수 조건을 모르고 그저 달리기만 하지 않았나, 그런 생각도 해봤어요.
-잠시 떠났던 배우가 돌아와서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는데 계속해서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다면, 그건 그 배우에게 대중이 보고 싶어 하는 무언가가있다는 신호 같습니다. 제가 보기엔 기꺼이 따르고 싶은 카리스마를 향한 갈증이 있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보는지 궁금해하고 긴장하는 편이에요. 오랜만에 다시 돌아왔는데도 작품을 할 수 있도록 제안을 주는 분들에게 믿어주신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이죠. 스스로의 특징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저 자신을 잘 알지 못해요. 대신 보답한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할 생각만 합니다.
-요즘 업계와 현장의 새로운 분위기를 체감한 지점이 있다면요.
=요즘 스탭들, 배우들이 길의 격을 높여놓았다고 말하고 싶어요.
-길의 격이요?
=네. 제 기준에서 돌아온 현장은 ‘정말 풍족해졌다’라는 생각이 우선이었고요. 앞으로 펼쳐질 길은‘점점 더 좋아지겠다’가 지금의 생각이에요. 지금의 현장을 만든 분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어요. 배우의 경우도 요즘 후배들은 지혜가 있는 것 같아서 보기가 좋습니다. 멋있어요. 옛날의 저는 ‘가리지 않고 뭐든 다 하는 배우’였어요. 돌이켜보면 그냥 열심히만 했어요. 좀 무식하다 싶을 정도로.(웃음)
-동료들과는 주로 어떻게 지내시나요? 굳이 폭넓은 사교에 힘쓰는 성향은 아닌 것 같지만 특히 최근에는 많은 후배들이 동경하는 마음으로 따를 것 같습니다.
=잘 지내려고 하고만 있죠. 더 살갑게 대해주지 못해 미안할 때가 많습니다. 마음은 안 그런데….
-서울예대에서 무용을 공부하다 같은 학교에서 연기로 전공을 바꿨고 처음엔 뮤지컬쪽에 관심을 보이셨죠? 과거 영상들을 찾아보니 기회가 있으면 무대에서 노래도 종종 부르셨더라고요. 연기할 때와는 또 다르게 매우 천진한 기쁨을 즐기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노래나 무대 공연에서 얻는 희열이 따로 있나요.
=다 똑같아요. 다만 무대에 서는 건 배우들이 꼭 겪어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렌즈 안에서만 해야 하는 연기와 온몸으로 해야 하는 무대연기가 합쳐져서 나오는 효과란 게 분명 있으니까요.
-배우로서 느낀 최초 혹은 최고의 흥분은 무엇이었습니까.
=특별한 건 없고 관객, 시청자의 박수와 칭찬이죠.
-배우가 되기 위해 자신을 비워내는 과정 중에 제거해야 했던 부담이나 억압 같은 것이 있었나요.
=‘허준호는 없다’는 생각? 그게 최우선이에요. 그렇게 역할 안에 들어가려고 해요.
-인터뷰를 거의 안 하시죠? 사생활은 물론 연기론에 대한 언급도 잘 하지 않는 편입니다.
=‘난 이렇다’라고 어필하기보다는 그저 있는 그대로 바깥의 평가를 받아야 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더욱 제 생각을 말하는 게 조심스럽죠.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 뭘 어떻게 봐달라는 이야기도 월권이 아닐까, 생각해요.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보여지는 게 제겐 중요합니다.
-<씨네21>과 <국가부도의 날> 커버 스타 인터뷰 당시,“예전에는 배우를 다시 못할 줄 알았다. 내 삶이 내 뜻대로 안되더라. 언젠가 영화로 돌아오고 싶었는데…”라고 말하셨어요.
=그때는 현실 상황이 그렇게 보였던 것 같아요. 누가 오래 안 한 배우를 다시 쓸까요? 배우들은 숙명적으로 흥행을 염두에 둬야 해서 더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최근 몇년 사이 영화나 드라마 홍보 활동 중의 모습을 찾아보면 뭐랄까, 평화로운 상태가 느껴졌습니다.
=이런 얘기, 정말 감사하고 신기하기도 하네요. 개인적으로 신앙을 가지면서 많은 게 바뀌었어요. 일단 참을 줄도 알아가고 있고…. (웃음)
-지금껏 흥행이나 인기에 대한 야심을 드러내는 배우는 아닌 것처럼 보였어요. 배우 생활만큼이나 개인적 삶의 행복이나 자유가 동등하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있었나요.
=저 역시 일에 대한 욕망, 욕심 같은 게 있었죠. 다만 현재 시점을 이야기하자면… 모든 것을 하늘의 뜻에 맡기고 일에만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여건이 이제는 생겼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외모에 관한 언급이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입가를 감싼 굵직한 주름이 유독 강인하고 멋스러운 분위기를 줍니다. 배우는 세월에 따라 맡을 수 있는 역할과 연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으니 나이듦에 대해서도 느끼는 바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이 나이는 저도 처음이라. (웃음) 배우로서 나이 드는 것의 좋은 점은 시야가 넓어지기 시작했다는 게 아닐까 싶어요. 젊은 시절에 비해 다양한 캐릭터가 주어지는 것도 사실이고요. 고민이 있다면, 몸이 점점 느려진다는 것?
-첫 연기상인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을 안긴 영화가 <테러리스트>지요. 그해 <씨네21>이 창간했고, 25주년 창간 기념호를 앞두고 허준호 배우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와! <씨네21> 창간 25주년을 정말 축하드립니다. 저에겐 항상 배우로서 저를 대해주고 만나주었던 <씨네21>입니다. 지금의 만남에도 감사드리고요. 부디 앞으로도 오래오래 자리 잡아주시길 바랍니다.
영화
2020 <모가디슈> 2020 <결백> 2019 <천문: 하늘에 묻는다> 2019 <퍼펙트맨> 2018 <국가부도의 날> 2018 <인랑> 2017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2010 <이끼> 2008 <신기전> 2006 <중천> 2005 <강력3반> 2003 <실미도> 2001 <화산고> 1995 <테러리스트> 1994 <해적> 1986 <청 블루 스케치>
TV
2020 <킹덤> 시즌2 2019 <60일, 지정생존자> 2019 <킹덤> 시즌1 2018 <이리와 안아줘> 2016 <뷰티풀 마인드> 2006 <주몽> 2006 <사랑과 야망> 2004 <부모님 전상서> 1999 <왕초> 1998 <보고 또 보고> 1995 <아스팔트 사나이> 1995 <젊은이의 양지> 1993 <걸어서 하늘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