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찬실이는 복도 많지'와 할머니의 집이라는 공간에 대하여
2020-04-22
글 : 박정원 (영화평론가)
영화라는 집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보며 느낀 첫인상은 영화가 ‘예쁘다’는 것이었다. 미추의 개념에서 비롯된 아름답다는 느낌이라기보단 귀여움이라거나 흐뭇함쪽에 가까운 마음이었던 것 같다. 매력적인 주인공 찬실(강말금), 그녀를 스쳐 지나가는 여러 인물들, 그녀가 오가는 여러 장소들, 시네필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소품들과 대사들…. 무엇 하나 비뚤어진 것이 없게 느껴질 만큼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러웠다. 그런데 엔딩 시퀀스까지 보고 난 후 오프닝을 떠올려보니 새삼 이 영화의 기저에 전혀 다른 정념이 깃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찬실은 왜 눈물을 흘렸을까

높은 볼륨의 쇼팽의 <장송 행진곡>과 함께 시작하는 영화는 우스꽝스러울 만큼 갑작스러운 죽음을 포착한다. 그 죽음은 다름 아닌 찬실이 수년간 프로듀서로 일했던 지 감독(서상원)의 죽음이다. 물론 죽음으로 시작하는 영화들은 많다. 혹은 이 영화를 하나의 성장 서사로 받아들인다면, 주인공의 기존 세계나 과거를 상징하는 인물로서 지 감독의 죽음을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도 있을 테다. 그런데 이 영화 속 죽음은 그게 끝이 아니다. 일자리를 잃은 찬실은 언덕 위의 어떤 할머니(윤여정)의 집에 세를 얻어 산다. 사연을 듣자 하니 할머니는 지금은 혼자 살고 있지만 원래는 딸이 있었고 그 딸은 이른 나이에 죽었다. 그리고 그 딸의 방에는 자신이 오래전 세상을 떠난 배우 장국영이라고 주장하는 귀신(김영민)이 있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해 직업을 잃은 찬실이 먼저 ‘죽은’ 딸을 그리워하는 할머니의 집에서 ‘귀신’과 대화를 나눈다. 오프닝에서 흘러나오던 <장송 행진곡>의 당당한 서글픔에서 예측할 수 있듯,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는 희망이 넘쳐흐르는 ‘복’보단 차라리 으스스한 죽음의 기운이 맴돌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러므로 영화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할머니의 집이라는 공간이다. 할머니의 집은 주인공 찬실의 거처라는 점에서 자연스레 영화의 중심 공간이 되기도 하지만, (지 감독이 죽는 프롤로그와 장국영이 홀로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에필로그를 제외한다면) 영화의 처음과 끝에 자리한 ‘회귀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주목하게 된다. 요컨대 영화의 시작, 감독의 죽음으로 자신의 인생이 ‘망했다’고 말하는 찬실이 이삿짐을 들고 도착한 곳이 할머니의 집이면서, 찬실이 일련의 방황과 여정을 끝마친 영화의 마지막, 소피(윤승아)와 김영(배유람)을 포함한 친구들이 찬실과 함께 모인 공간이 할머니의 집인 것이 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한 이가 자리를 잡은 곳, 죽은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이가 살고 있는 곳, 정체를 알 수 없는 유령이 머무는 곳.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할머니의 집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토끼굴처럼 모호해서 신비롭고 또 한편으론 이유를 알 수 없이 서글픈 감각을 품은 공간, 혹은 그런 감각을 촉발시키는 공간으로 존재한다.

사실 할머니의 집이라는 공간이 보다 특별하게 느껴진 것은 영화 후반부의 한 장면 때문이었다. 주민센터에서 한글을 배우던 할머니가 시 쓰기 숙제를 해야 한다며 찬실에게 도움을 청한다. 삐뚤빼뚤 서투른 글씨로 쓴 할머니의 시를 찬실이 읽는다. “사람도 꽃처럼 다시 돌아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시를 읽은 찬실이 울음을 터트리다 얼굴을 손으로 가린다. 그 순간 두개의 질문이 떠올랐다. 하나는 찬실은 왜 울었을까, 였다. 당신보다 하루라도 더 살고 싶었던 자신의 소망을 이뤄주고 먼저 죽은 지 감독을 떠올리는 뒤늦은 눈물이었을까. ‘망했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삶에 대한 막막함의 눈물이었을까. 지나가버린 시간에 대한 아픔의 눈물이었을까. 좋아하던 남자에게 고백을 거절당한 부끄러움의 눈물이었을까. 아니면 죽은 딸에 대한 할머니의 그리움이 애틋해서 흘리는 눈물이었을까. 이 모든 것이 합쳐졌을 수도 있고 어느 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다른 질문은 찬실이 그녀가 좋아하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속 여인들처럼 얼굴을 가리고 울고 있다는 것을 찬실도 알고있을까, 였다. 영화 속엔 찬실의 영화적 취향을 드러내는 대사나 그와 관련된 소품들이 적잖게 배치되어 있으며 그녀가 좋아하는 감독 오즈에 대한 언급 또한 일본식 술집에서 김영과 첫 데이트를 하는 장면에서 노골적으로 등장하지만, 어쩐지 술집에서 대놓고 이야기를 꺼내던 찬실을 볼 때와 달리 할머니의 시를 읽고 얼굴을 가린 채 눈물 흘리는 찬실을 볼 때 다소 뜬금없게 오즈가 겹쳐지며 미묘한 감응이 느껴졌다. 그건 얼굴을 손으로 감싸는 구체적인 제스처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다른 공간들과 달리 할머니의 집에만 깃들어 있는 정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어쩌면 할머니의 집이라는 공간은 만지거나 감촉할 수 없는 ‘찬실의 영화’를 물질화한 곳이 아닐까. 지 감독과의 술자리도 아니고, 영화배우 소피의 집도 아니고, 영화감독을 꿈꿨으나 현실적 이유로 가르치는 일을 하며 돈을 버는 김영의 공간도 아닌, 영화엔 관심 없는 어떤 할머니의 언덕 위 작고 낡은 집. 평온하고 고요하지만 알 수 없는 죽음의 기운이 맴도는 그 녹슬고 오래된 집에서 찬실이 한때는 분명 존재했으나 이제는 기억 속에 남아 상실되어가는 것들을 부둥켜안은 채 사라지지 않게하기 위해 버텨내고 있던 것은 아닐까. 그건 당연히 찬실이 좋아하는 구체적인 영화와 영화감독, 영화인에 대한 노스탤지어와 애도를 일컫는 것이지만 영화와 함께 흘러가버린 찬실의 지난 삶에 대한 스스로의 위무도 포함된다.

찬실이는 영화를 만들어갈 것이다

앞서, 할머니의 집을 ‘회귀의 공간’이라고 했지만 엄밀히 말해 이는 틀린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 함께 일한 후배 스탭들과 소피와 김영이 찬실을 만나러 할머니의 집으로 찾아오기는 하지만 영화가 거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방의 불이 나가자 찬실과 친구들은 새 전구를 사러 어두운 밤길을 나선다. 찬실과 친구들은 밤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에 대해 이야기하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 장면에서 끝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이던 영화는 돌연 찬실로 하여금 친구들을 앞세워 걷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이 든 손전등으로 친구들을 비춰주며 잠시 걸음을 멈춘 찬실은 몇 마디 다짐을 한다. 눈을 감은채 관객을 향해 마주 선 찬실이 어쩐지 길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느껴진다. 찬실이 말했듯 ‘달은 모습을 바꿀 것이기 때문에’ 거대한 외부의 빛을 절대적 지표 삼아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영화 내내 바지런히 어딘가로 움직이고 종종걸음으로 달려가고 때론 다른 곳으로 튕겨나오던 찬실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방향을 되새김질하듯 영화의 시간을 지연시키고 움직임을 멈춘다. 찬실은 집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 뜻밖의 밤 산책이 만들어낸 산뜻하고 다정한 기운이 스크린 밖으로 사라진 후, 어떤 막막함과 두려움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대면해내리라는 작지만 단단한 염원의 빛이 찬실에게 있기에 다음 신에서 극장 속 장국영이 보고 있는 영화가 찬실의 영화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지나간 과거의 무수한 죽음과 소멸을 기억하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마주하기 위해 찬실은 그녀의 영화를 만들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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