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런트 라인]
드라마 '킬링 이브', 인간성을 도려내니 인간이 보이네
2020-04-29
글 : 김소희 (영화평론가)
[김소희 평론가의 프런트라인]

<킬링 이브>는 무엇보다 캐릭터를 위한 드라마다. 캐릭터를 큐레이션한다는 생각으로 두 캐릭터로부터 떠오르는 인물의 잔상을 붙잡아보았다. 이브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전혀 다른 패턴의 살인사건 속에서 빌라넬의 스타일을 발견한 것처럼, 그렇게 해보고자 한 거다.

우리 시대 (비)인간의 형상들

좋아할까, 말까. 아니 좋아해도 될까. <킬링 이브>의 빌라넬(조디 코머)은 관객을 고민에 빠뜨린다. 잔혹한 살인광인 그녀를 좋아해도 되는 것일까. 매력적인 캐릭터 스토리라고 방어하며 무차별적인 살인 행위를 즐기는 것은 아닐까. 한편으로는 내가 ‘살인 행위’를 인식한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빌라넬은 조직에서 고용한 암살자고 이것은 장르물이다. 스파이물에서 살인은 장르의 정체성과도 같다. 이때 살해당하는 이들 중 다수가 엑스트라이며, 죽음의 무게는 인물의 비중에 따라 극명하게 갈린다. 이를 염두에 둘 때 잔혹한 살인에 대한 페티시라는 비난을 면치 못한 <살인마 잭의 집>(2018)은 실은 영화적 죽음에 관한 메타영화처럼 보인다. 적어도 그 영화에서만큼은 관객이 스스로 단죄하듯, 오락을 제거한 죽음을 하나하나 곱씹어야 했다. 이때 영화를 본다는 것은 (그 안에 변태성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힘든) 시각적 자기학대 행위에 가까웠다.

<킬링 이브>에서 살인을 인식하게 된다면 그 이유는 간단하다. 드라마는 살인 행위를 공들여 묘사한다. 죽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를 어디에서 어떻게 죽이는지는 중요하다. 타깃이 정해지면 빌라넬은 스스로 역할을 설정해 현장에 잠입한다. 범죄가 일어나는 장소는 그녀에게 무대이며, 빌라넬의 옷장은 무대의상과 소품으로 빼곡하다.

맡은 역할과 상황에 따라 의상과 헤어, 언어, 목소리 톤까지 자유자재로 바꾸는 것은 물론이다. 그녀의 존재 방식은 케이트 블란쳇이 <매니페스토>(2015)에서 보여준 1인13역의 코스튬플레이를 떠올리게 한다. 케이트 블란쳇에게 선언이었던 것이, 빌라넬에게는 살인이다. 블란쳇에게 선언이 그랬듯, 빌라넬에게도 살인은 패션이자 유희다.

빌라넬(들)

패션에 집착하는 살인마를 다룬 작품은 이전에도 있었다. 메리 해론의 <아메리칸 사이코>(2000)에서 패트릭(크리스천 베일)은 패션과 피부 가꾸기, 음악 등에 지나친 강박을 가진 사이코패스로 등장한다. 특정 화장품과 의상 브랜드를 고집하고 고급 식당 예약에 목숨을 거는 패트릭은 젊은 재벌의 사적 세계를 엿보게 한다. 그중 압권은 명함이다. 폰트와 색상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며 신경전을 벌이는 남자들의 모습에는 히스테리컬한 유머가 담겨 있다. 이때 패트릭의 기행은 단지 개인의 일탈이기보다는 세기말 부유층 현대인의 공허감이라는 시대적, 계층적 특성을 반영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패트릭과 닮은 인물은 빌라넬보다는 그의 ‘솔메이트’라고 일컬어진 재벌 2세 살인마 에런 필이다. 에런은 로마의 호텔로 여성들을 유인한 뒤 미리 설치된 몰래카메라로 촬영해 각각의 이름을 딴 폴더 속에 넣어둔다. 폴더는 데이터베이스로 압축된 인간의 오늘이다. 폴더 속 마지막 영상에는 해당 인물의 죽음이 담긴다. 에런은 사이버 공유 문화에 익숙한 세대의 비접촉, 비대면 살인 방식을 보여주는 사이코패스다.

그에 비해 빌라넬의 방식은 어딘가 고전적인 데가 있다. 빌라넬은 누군가가 죽어가는 모습을 두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가 남긴 살인 현장에는 두눈을 크게 뜬 시체가 자주 발견된다. 살인에 관해 ‘죽어가는 사람의 눈이 텅 비어버리는 과정을 보는 것’이라는 빌라넬의 정의는 시적이기까지 하다. 누군가의 눈빛이 꺼져갈 때, 그녀의 얼굴에는 짓궂은 미소가 번진다. 그 얼굴은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에서 장난스럽게 어른들의 세계에 관여했던 무니(브루클린 프린스)를 연상시킬 만큼 천진하다. 무니가 디즈니랜드 근처 홈리스들의 터전인 모텔 매직 캐슬을 어느 정도 견딜 만한 유희의 공간으로 만들었듯, 빌라넬의 개성 역시 살인에 대해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빌라넬이 죽어가는 인간의 모습에 페티시즘을 느끼는 이유는 그녀의 정체성이 공허감이라는 사실과 관련된다. 중독치료 모임에서 ‘빌리’라는 캐릭터를 빌려 자신을 설명할 때, 그녀는 끝없는 무료함과 텅 빈 상태로 자신을 표현한다. 우리는 그 공허감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빌라넬의 무료함과 그것의 해결 방식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다. 그것은 차라리 짐 자무시의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2013)가 보여준 뱀파이어의 무료함과 흡사하다. 빌라넬은 다중언어 능력을 갖춘 이브(공교롭게도 틸다 스윈턴이 연기한 캐릭터의 이름도 이브다)와 음악에 심취한 아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애바의 모습까지 골고루 닮았다. 아이스바, 칵테일 등 다양한 방식으로 피를 음미하는 뱀파이어의 모습은 자기만의 스타일과 취향이 확고한 빌라넬과 존재론적으로 통한다. 빌라넬은 엄밀히 말해 다른 종이다. 빌라넬과 첫 대면의 순간 이브(샌드라 오)의 행동이 더없이 적절해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녀가 총을 쏘며 쫓아오면서도 어딘가 망설이고 있음을 직감한 이브는 항복하듯 천천히 차에서 내려 손짓과 눈빛만으로 소통을 시도한다. 그의 모습은 흡사 사나운 동물을 길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지구상에 처음 나타난 생명체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그러나 엄청난 애정과 호기심을 가지고서 말이다.

빌라넬의 과거 이력에서 결정적인 부분은 그가 서류상으로는 이미 죽은 인물이라는 점이다. 살인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빌라넬은 먼저 오디오에서 흐르던 음악을 바꿔 죽음의 모드로 전환한다. 그는 오직 보스인 콘스탄틴을 놀려줄 생각으로 얼굴에 하얀 분칠을 하고 약물 과다 복용으로 소파 위에서 죽은 척 위장한다. 그 모습은 다소 엉성해도 그녀가 누구인가를 보여주기에는 적절하다. 그녀는 죽어버리기엔 이미 죽음과 너무 친숙한 존재다. 향수 브랜드에서 따온 그녀의 이름은 실체가 없으나 분명한 존재감을 가진다는 점에서 센스 있는 작명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에서 향수는 냄새가 없는 살인마 그르누이가 여성들의 체취를 모아 만든, 이성을 마비시키는 마취제였다. 욕망의 결과물이었던 향수가 빌라넬의 손에서 죽음과 욕망을 불러오는 원인물로 전환된다. 그것이 죽음을 초래할지, 욕망을 초래할지는 뚜껑을 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빌라넬은 때로 사람들에게 죽음을 선물한다.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얼굴 반쪽이 처참하게 뭉개진 채로 살아남은 같은 병실의 소년이 ‘이 모습으로 살아가느니 다른 가족들과 함께 죽는 게 나았다’고 말하자, 빌라넬은 그를 위로하면서 간단히 목을 꺾어버린다. 빌라넬은 러시아 교도소에서 짧은 우정을 나눈 친구가 자신을 똑똑히 바라보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하는 순간 총살당하는 광경을 즐거운 듯 바라본다. 빌라넬이 누군가에게 죽음을 선사하는 모습은 우리를 겁나게 하는가, 안도하게 하는가. 불가리아 암살 사건에는 목격자가 있었다. 투명한 건물 안 피범벅이 된 채 창문을 두드리는 피해자와 흉기를 든 빌라넬을 버스 안에서 목격한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방금 걸려온 전화를 받으며 현장을 지나친다. 짧은 순간, 보통 사람의 얼굴을 한 빌라넬이 그렇게 모니터 위를 지나간다.

이브(들)

‘암살자 덕후’이자 스타일리시한 범행의 팬인 이브는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는 인물이다. 이브는 빌라넬을 좋아해도 될지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감정의 빗장을 풀고 마음껏 좋아해도 된다고 솔선수범해 보여준다. 빌라넬이 여러 나라의 언어를 익히며 전세계를 돌아다닌다면, 이브는 암살자의 동선을 빌려 두뇌 속에서 전세계를 누빈다. MI6 수장 캐롤린(피오나 쇼)의 안내로 비밀 기지에 도착한 이브는 한쪽 벽면에 그려진 범행 지도를 본 뒤, ‘내 뇌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요’라며 놀라워한다. 그녀는 조직적인 살인 행위에 맞서면서도 누군가의 창의적 살인 행각에 흥분을 느낀다. 아니 흥분을 느끼기 때문에 살인 행위에 맞설 수 있다. 드라마 <셜록>의 ‘고기능 소시오패스’ 사립 탐정 셜록(베네딕트 컴버배치)이 자신을 자극하는 사건에 끌리듯, 이브에게도 사건 자체의 흥미로움이 먼저다.

빌라넬은 그런 그녀를 자신과 똑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틈이 아무리 좁아지더라도 둘은 여전히 다르다. 빌라넬이 자신을 투명하게 비우고 누군가가 되는 인물이라면, 이브는 꽉 찬 상태인데도 누군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다. 콘스탄틴은 이브에게 “빌라넬은 자신이 살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당신의 내부를 조금씩 갉아먹는 기생충”이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이브는 그의 충고를 수용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기생충인 빌라넬은 어디든 갈 수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 데나 가진 않는다. 기생할만한 공간을 까다롭게 고르는 빌라넬에게 이브는 기생하고 싶은 공간이다. 이브가 빌라넬이 선물한 몸에 꼭 맞는 드레스를 입고 ‘라 빌라넬’ 향수를 뿌린 채 거울 앞에 선 순간, 두 사람의 접촉이 최초로 이뤄진다.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관찰하다가 관능적으로 몸을 쓸어내리는 이브와 이를 클로즈업하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사실상 두 여성의 애무 혹은 빌라넬이 개입된 이브의 자위행위를 그린다. 빌라넬이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인간의 모든 것이라고 단언하는 동안, 이브는 정신과 내면이 얼마나 사람을 바꿔놓는가를 보여준다. 이브는 빌라넬에게 꽃을 선물받은 뒤 남편 니코와 뜨거운 밤을 보내고, 빌라넬의 음성 안내에 따라 동료 휴고와 일종의‘스리섬’을 갖는다. 빌라넬은 후각과 청각 등 감각을 빌려 이브의 내부로 파고들고, 이브는 그녀를 기꺼이 소화한다. 빌라넬을 입은 이브, 이브를 입은 빌라넬의 잠재력이 어디까지일지 짐작 불가다.

변화된 이브의 모습은 <블레이드 러너>(1982)에서 복제인간제거 임무를 맡은 특수 경찰 데커드(해리슨 포드)가 겪은 일련의 변화를 연상시킨다. 그는 최신 리플리컨트 레이첼을 비롯한 복제인간의 감정과 내면을 마주하면서 그들이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존재임을 확인한다. 데커드의 여정은 제거라는 원래의 임무와는 정반대로 (어쩌면 자신까지도 포함한) 복제인간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다. 데커드가 실제 복제인간이라는 논란이 일었듯, 이브도 비슷한 논란에 휩싸였다. 이브는 점점 더 빌라넬 못지않은 잠재력을 지닌 사이코패스처럼 보인다. 특히 특수한 공간과 상황 속에서 마치 빙의한 듯 폭주한다. 빌라넬의 집을 찬찬히 둘러보다가 갑자기 뒤틀린 듯 헛웃음을 터뜨리며 난장판을 만든다든지, 니코에게 노골적으로 접근하는 교사 제마의 방을 둘러보다 보석함의 인형을 부러뜨리고 서랍 속 정돈된 속옷을 마구 헝큰다. 한 사탕 가게에서 아이와 말 없는 실랑이를 벌인 뒤 의자에 앉아 사탕을 우걱우걱 씹는 모습에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아이와 신경전을 벌이던 빌라넬이 보인다.

둘의 동질성이 노골적으로 그려졌기 때문에, 이브가 빌라넬의 동행 제안을 거절하는 시즌2의 결말은 의외의 선택처럼 느껴진다. 이 결말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에서 엘로이즈(아델 에넬)가 마리안느(노에미 멜랑)와의 관계를 포기한 채로 남아 결혼을 선택한 대목과 유사한 느낌을 준다. 이야기의 관점에서 대개 안주하는 것은 나쁘거나 재미없는 선택이고, 어딘가로 떠나거나 변화하는 선택만이 각광받는다. 그러나 평등이나 연대, 변화 같은 것이 그리 간단히 취득되는 것은 아니다. 탈주는 이야기의 선택이거나 관객의 선택일 수는 있어도 엘로이즈와 이브의 선택은 아닐 수 있다. 마주 선 두 사람이 유지한 힘의 균형을 깨뜨리지 않으면서도 이야기를 이어나가려면 둘은 평행선을 걸어야만 한다. 아직은….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캐릭터의 관계를 중심으로 <킬링 이브>를 생각할 때, 조셉 맹키위츠의 <이브의 모든 것>(1950)은 적절한 참조점을 마련해준다. ‘이브’라는 이름이 두 영화를 묶는 전제이지만, 관계의 특성과 배우의 이야기 등 곱씹을수록 관련성이 포착된다. <이브의 모든 것>은 나이가 들어가는 배우 마고(베티 데이비스) 앞에 팬으로 자처하는 젊은 여성 이브(앤 박스터)가 등장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마고는 이미 유명한 배우고, 이브는 배우가 되기 위해 과거를 지우고 또 다른 자아를 창조한 인물이다. 바로 이 점에서 빌라넬은 이브와 비슷하다. 빌라넬과 이브의 관계는 이브와 마고, 혹은 이브와 그녀의 실체를 가장 먼저 파악한 평론가 에디슨의 관계와 유사해 보인다. 물론 이브의 빌라넬에 대한 감정은 에디슨의 이브에 대한 태도와 상반된다. 에디슨은 이브의 비밀을 파악한 뒤 약점으로 삼아 그녀를 장악하려 하지만, 이브는 딱히 속셈이 있기보다는 빌라넬의 모든 것을 알고 싶은 팬의 마음이 커보인다.

<이브의 모든 것>은 캐릭터의 관계와 욕망을 흥미롭게 펼치지만, 결국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트로피다. 트로피는 여성의 욕망을 추동하는 매개이며, 두 여성의 관계는 증식하며 서로를 대체하는 거울상으로 환원된다. <킬링 이브>는 트로피에 위임된 전권을 다시 여성의 것으로 되찾아오려 한다. 극중 트로피에 해당하는 건 아직 정체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트웰브라는 이름의 조직이다. 시즌1에서 이브와 빌라넬은 조직의 통제 너머 은밀한 둘만의 놀이판을 벌이는 것처럼 보였다. 시즌2에서는 초과했다고 생각하는 상황과 행동이 모두 조직의 예측 속에 포함되었음이 드러난다. 이제 두 사람은 조직의 예측에서 벗어나서도 생존하며 그것을 이용할 길을 찾아야만 한다. <블레이드 러너>에서 자동차를 타고 어딘가로 향하는 데커드와 레이첼의 모습 위로 수많은 도피의 이미지가 포개지듯, 어딘가로 떠나는 결말은 어쩌면 예상 가능하고도 손쉬운 선택지일 것이다. 이를 포기한 이브와 빌라넬은 조직의 예측만이 아니라 원작 소설 속 그려진 길과 팬들의 예측으로부터도 도피하며 지속을 위한 불화의 길을 택했다.

영화는 우리에게 비인간과 인간의 결정적인 차이는 감정이라고 말해왔다. <A.I.>(2001)가 그랬듯 감정은 비인간이 진화했음을 보여주는 근거였다. 그러나 과연 감정이 있다는 것이 인간의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이를테면 우리는 아직 한번도 이브의 상사인 캐롤린의 감정을 보지 못했다. 심지어 그녀는 화가 났을 때조차 “지금 화가 난 상태니까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들어요”라고 침착하게 말한다. 캐롤린의 냉정한 태도는 프로페셔널의 이름으로 수용되며, 그의 인간성은 의심받지 않는다. 비인간이 감정을 가지려 애쓰는 사이, 인간들은 비인간처럼 감정을 감추어버리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이브와 빌라넬은 이러한 진화의 방향을 중지하고 좋아하는 감정의 힘을 다시금 일깨우는, 상반된 두축의 힘이다. 예측할 수 없음 또한 예측되는 시스템 속에서 이들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기질과 서로를 향한 이상한 집착은 구원이 될 수 있을까. 이브와 빌라넬의 팬심을 응원하는 자로서 우리는 도나 해러웨이가 <사이보그 선언>을 통해 주창했듯 우리의 인간됨이 아니라 감정의 복원으로서 비인간을 선언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감정이 콩알만큼 작아진 채 살해당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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