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리차드 쥬얼>에서 ‘이스트우드 페르소나’가 초(超)자연적 신화의 힘으로 작동하는 법
2020-04-29
글 : 장병원 (영화평론가)
보호받지 못한 자

불의(不義)한 세계에서 박해받는 영웅의 수난기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최근 ‘다큐-드라마’를 관통하는 주제이다. ‘다큐-드라마’라 함은 그의 근작들 대다수가 실화 사건에 토대하거나, 심지어 <15시 17분 파리행 열차>(2018)처럼 현실의 인물을 영화 안으로 끌어들이기도 한다는 점에서 강조될 필요가 있다. 이스트우드가 그런 이야기의 기저에서 발견하는 것은, 공동체의 안위와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는 안간힘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궁극적인 좌절 혹은 배반이라는 쓰라린 현실이다. 애틀랜타올림픽 캠페인이 한창이었던 1996년, 센테니얼 공원에서 파이프 폭탄이 담긴 배낭을 발견한 경비원의 실제 스토리에 기초한 <리차드 쥬얼>(2019)은 이런 경향의 연장에 있다. 공원 벤치 아래에서 의심스러운 배낭을 발견한 경비원 리차드 쥬얼(폴 월터 하우저)은 그가 배운 매뉴얼대로 상황을 통제하여 수백명의 목숨을 구한다. 호사가들의 이야깃거리로 구미를 당기는 리차드의 무용담은 TV토크쇼의 아이템이 되고 그는 출판사들이 찾는 유명인이 되지만 테러리스트를 색출해야 하는 FBI 요원 톰(존 햄)의 공작과 특종 찾기에 혈안이 된 지역신문 기자 캐시(올리비아 와일드)에 의해 리차드는 졸지에 폭탄테러 용의자로 둔갑한다. 이 순간부터 정의와 존엄의 상실, 영웅의 좌절을 감싼 이스트우드 특유의 정치학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리차드 쥬얼>에 내재한 주제의 핵심은 현대 미국 문화의 저류에 흐르는 도덕적 추악함이 공동체의 위기를 초래했다는 인식이다. 리차드 쥬얼의 캐릭터는 한때는 영웅의 전형이었으나 지금은 사회를 향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지는, 현대 미국의 반(反)사회적 존재들을 표상한다. 법의 수호자라기보다 협잡꾼에 가까운 FBI 톰이 묘사하는 테러리스트의 프로파일은“좌절한 백인 남자로 경찰이 되고 싶어 하는 자 또는 영웅을 추구하는 전직 경찰관이나 군인”으로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을 좋아해서 FBI나 경찰 되기를 열망하며, 장래를 위해 틈틈이 형법을 공부하는” 리차드의 그것과 일치한다. 미국을 위협하는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며 차라리 공식적인 법과 제도의 수호자들이라고 말하는 이 영화에서 비판의 초점이 되는 것은 이처럼 FBI로 형상화된 국가권력과 미디어이다.

정치적 올바름을 주장하는 비평가들은 오랜 시간 미국의 남성성을 표상해온 이스트우드의 왜곡된 성의식, 트럼프에 적대적인 FBI와 언론에 대한 가차 없는 시선이 불편할지도 모른다. 특종에 강박된 캐시가 정보를 캐내기 위해 바에서 톰을 유혹하는 설정은 마초 꼰대 감독의 총체적인 상상력 실패로 읽히고, 우크라이나 스캔들을 빌미로 한 트럼프 탄핵 이슈에 즈음하여 이 영화가 공개되었다는 것도 이러한 비판을 격화시켰다. 그러나 이스트우드는 더이상 정치를 믿지 않고, 미국의 이상을 믿지 않는다. 이스트우드가 옹호하는 것은 이러한 문명과 역사의 냉혹한 흐름에 굴복하지 않는 개인주의이다. 시스템의 추악한 얼굴을 드러내는 이 영화는 타락한 법과 제도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는 위엄을 지키는 개인뿐이라고 믿는다. 자존감에 전 카리스마 넘치는 관료들이나 계산적인 황색 저널리스트들보다 어수룩해 보이지만 신념을 가진 개인이‘진실’을 말한 가능성이 크다. 법집행자가 되겠다는 이 현대의 카우보이가 품은 열망은 비현실적이고 허황한 것이고, 그것이 허황한 만큼 열렬한 것이다. 이스트우드의 시선은 한편으로 민주적인 원칙이나 진실에 관한 일말의 관심도 없이 리차드를 좇으며 비방했던 FBI와 미디어의 역할을 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관점에서 법 제도의 바깥에 놓인 강력한 개인주의를 향한다.

이처럼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의 의미를 탐구하는 <리차드 쥬얼>에서는 법과 질서라는, 오늘날 혼돈스러워진 개념이 숙고된다. 그러나 겸손하고 효율적인 이 드라마는 캐릭터들을 화려한 영웅으로 만들지 않는다. 정파를 초월하여 멸시와 박해를 받은 개인에 대한 동정심을 보여주는 이 영화의 무의식은 정부의 권력과 법 집행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는 주장을 바탕에 깔고 있다. 리차드의 신심을 믿고 조력하는 변호사 왓슨(샘 록웰)과 그의 파트너 나디아, 순박한 리차드의 어머니를 한쪽에 두고 FBI에 의해 부당한 조사의 표적이 되고 미디어에 의해 조리돌림을 당한 시련과 환난을 이야기함으로써 이러한 목표를 수행한다. 법의 수호자로서 개인을 귀히 여기지 않는 세계의 풍경은 비극적이다. 얼마간 양상을 달리하지만 스스로의 본분에 충실하고자 했던 개인에 대한 존중이 사라진 세계에 대한 상실감은 <그랜 토리노>(2008),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2016), <라스트 미션>(2018)에서도 확인된다. 남용된 법 집행에 대한 의혹, 매스미디어의 속물의식, 그리고 용의자들에게 자백을 강요하는 국가 폭력이라는 주제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다.

쇠망의 시대와 의절한 고독한 인간이 자신의 숙명과 윤리에 충실하려 했던 고투의 흔적을 보여주는 <리차드 쥬얼>의 참된 가치는 정신적 공백과 혼란에 대처하는 격조와 유머에서 찾을 수 있다. 이스트우드는 현대 미국 사회를 “개자식들의 세계”라고 말하는데, 집 마당에 진을 친 기자들 앞에서 리차드가 개를 산책시키는 한 장면에서 바닥에 즐비한 개똥을 보여주는 위트 있는 묘사로 이러한 논평을 대신한다. 개똥 같은 세상의 개자식들…. 특별히 사건의 진상을 알기 위해 왓슨과 나디아가 센테니얼 공원에서 테러리스트가 전화를 걸었던 공중전화박스까지 걸어가면서 시간을 측정하는 신의 연출은 번득이는 통찰을 제공한다. 공원에서 배낭 폭탄을 발견한 리차드의 시간과 테러리스트가 전화를 건 시간의 간격을 고려했을 때 공원과 공중전화박스간 거리는 너무 멀었고, 이는 리차드의 무고함에 대한 확신을 준다. 이스트우드는 시간을 확인하면서 이동하는 왓슨과 나디아의 행로를 미국의 단거리 육상선수 마이클 존슨의 애틀랜타올림픽 200m 결승전 중계화면과 교차편집한다. 필경 당대 최고의 스프린터였던 마이클 존슨이 뛰었다면 가능했으리라. 심각한 순간에 웃음을 안기는 이 장면의 연출은 사건이나 정황 자체 때문이 아니라 영화적 서술의 진가가 무엇인지에 대한 영감을 주기 때문에 탁월하다.

<리차드 쥬얼>은 최고 또는 최악의 수준에서 미국영화사의 한 경향을 대표했던 이스트우드의 정치영화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가 이스트우드의 자유주의적인 시각이 트럼프가 줄기차게 공격해온 FBI와 언론을 비난하고 있기 때문에 당대의 정치적 의제를 강화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것은 영화에 대한 곡해라고 생각한다. 영화의 힘은 현실 정치가 아니라 파렴치한 법 집행기관의 압력을 받고 있는 개인의 초상으로부터 나온다. ‘오늘날 시민을 보호하려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 거짓 비난을 감당해야 하는 평범한 개인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자각을 주는 이 영화는 공동체에 드리운 어둠에 관한 우화이고, 정의와 법 집행, 도덕의 결핍에 관한 신화적 이야기이다. 타락한 세계의 구세주는 언제나 법과 제도의 바깥에 존재한다. 이스트우드는 문명 법을 초월한 도덕률이라는 갱신된 가치를 추구하면서 역사적 사건의 구체(具體)를 신화의 차원으로 이동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리차드 쥬얼>은 여전히 이스트우드 페르소나가 초(超)자연적 신화의 힘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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