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파도를 걷는 소년' 외국인노동자 문제를 단지 피상적으로 다루지 않고 그들이 처한 어두운 현실을 반드시 짚고 넘어간다
2020-05-12
글 : 임수연

바닷가를 찾은 한 소년이 서핑을 즐기는 이들을 홀린 듯이 쳐다본다. 이 소년은 외국인 불법 취업 브로커 일을 하고 있는 이주노동자 2세 김수(곽민규)다. 그는 폭행죄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아 또 한번 범죄가 발각되면 교도소에 갈 수도 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 그렇게 사회봉사 시간을 채우기 위해 쓰레기를 주우러 바닷가에 왔다가 새로운 세계에 눈뜨게 된 것이다. 우연히 길거리에서 받은 서핑 강습 전단지를 받고 더 호기심이 발동한 수는 쓰레기장에 버려진 서핑보드를 갖고 와 막무가내로 바다에 나가보지만, 강습도 받지 않고 도전하면 위험하다는 핀잔을 서퍼 해나(김해나)에게 듣는다. 대신 이 일로 서프숍과 인연을 맺게 된 수는 그들과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서핑의 매력에 점차 빠지고, 원래 하던 갑보인력사무소 일을 그만두려 한다.

이주노동자 2세, 폭력전과, 집행유예…. 수를 둘러싼 모든 조건이 사회에서 소외된 그의 캐릭터를 설명한다. 무료한 삶에 더해진 변수가 미친 파장을 그리는 청춘물은 많지만, 직접적으로 다문화 2세의 삶을 조명하며 ‘서핑’이라는 최근 트렌드를 접목한 작품은 없다는 점에서 <파도를 걷는 소년>이 갖는 독창적인 지점은 분명하다. 같은 이주민으로서 수를 챙기는 인력사무소 사장 갑보(강길우), 수와 함께 서핑에 매료되지만 빚 때문에 원래 있던 세계를 완전히 떠날 수 없는 필성(김현목)과 맺는 관계가 구체적으로 묘사되면서 영화가 진짜 담고자 하는 이야기가 점차 가시화된다. 외국인노동자 문제를 단지 피상적으로 다루지 않고 그들이 처한 어두운 현실을 반드시 짚고 넘어간다는 점에서 가난한 청년 예술가들을 다룬 <내가 사는 세상>으로부터 이어져온 최창환 감독의 인장을 확인할 수 있다. 서핑의 세계와 인력사무소 일의 세계가 완전히 다른 톤으로 연출되며 희망과 현실의 무게가 교차되지만, 자칫 서핑의 역동적인 매력을 담기 위해 카메라가 서두르는 함정에 빠지지 않는 점도 눈여겨볼 지점. 서핑을 배우는 과정을 단계별로 담고, 실제 서핑을 즐기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잡아내는 식으로 이 세계를 담아내 관객이 자연스럽게 제주도 바다의 파고에 몸을 맡기게 한다.

원래 최창환 감독은 학교를 다니지 않고 사회로부터 차별받는 16~17살 이주노동자 2세대들이 모여 주먹질을 하며 학교를 제압해가는 이야기를 만들려고 했다. 현 제작사를 만난 후 서핑이라는 구체적인 소재가 들어오게 됐지만, 이주노동자 청춘들의 현실을 담겠다는 본래 의도는 그대로다. <파도를 걷는 소년>은 최창환 감독이 실제 제주도에 1년여간 거주하며 준비하고 제작한 영화다. 절반은 내부인, 절반은 외부인의 정체성을 갖고 감독의 눈으로 본 제주의 모습이 때로는 낭만적으로, 때로는 무섭도록 현실적으로 구현된다. 직접 서핑을 배우고 서퍼들을 만나 그들의 인생을 취재한 덕분일까, <파도를 걷는 소년>이 그리는 청춘, 서핑, 그리고 제주도는 가짜가 아닌 진짜 같음이 녹아 있다.

최창환 감독의 전작 <내가 사는 세상>의 주연을 맡았던 곽민규 배우는 원래 <파도를 걷는 소년>의 조연출로 합류할 예정이었으나, 배역을 캐스팅하고 이주노동자들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직접 연기해도 되겠다는 판단이 들어 주인공 김수 역에 도전하게 됐다고 한다. 필성 역의 김현목은 다수의 단편영화 출연에 이어 최근엔 드라마 <킬잇> <저스티스> <어쩌다 발견한 하루> 등에 연이어 얼굴을 비추며 활동 영역을 확장해온 배우로, 웃고 있지만 내면에 결핍이 있는 캐릭터를 잘 소화해 눈길을 끈다. 그 밖에 제주 서퍼 해나 역의 김해나, 갑보 역의 강길우 등 독립영화계에서 최근 눈에 띄는 행보를 보여줬던 배우들이 출연해 극 내내 반가움을 더한다.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국장편경쟁 부문 배우상’과 ‘심사위원 특별언급’ 2관왕을 차지했다.

CHECK POINT

대구에서 제주로, 디제잉에서 서핑으로

최창환 감독의 전작 <내가 사는 세상>은 대구를 배경으로, 청년 예술가들의 실업 문제를 디제잉을 통해 포착한다. 지역 청년들이 사회와 부딪치며 겪는 부침을, 그럼에도 희망을 담는 최창환 감독 특유의 색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지역 밴드

영화에 등장하는 노래는 지역 인디밴드의 작업물이다. 오프닝 <광안리의 밤>의 세이수미는 부산, 배경음악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탁류한은 대구를 본거지로 한 밴드다. 수가 처음 물속에 들어갈 때 깔리는 마치킹스(대구)의 경쾌한 로큰롤 음악은 극중 수의 심정과 캐릭터를 반영한다.

제주도 서퍼 크루 ‘소년회’

<파도를 걷는 소년>에 등장하는 서퍼들은 해나 역의 김해나를 제외하면 대체로 실제 제주도 서퍼 크루 ‘소년회’ 멤버들이다. 이들은 연기 경험이 없는 비전문 배우들이지만, <파도를 걷는 소년>의 정서를 조성하는 중심축을 맡는다. 사회지도사 겸 서프숍을 운영하는 똥꼬를 연기한 민동호 역시 크루의 멤버. 비중이 큰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최창환 감독은 “똥꼬가 곧 당신”이라며 이 캐릭터를 그에게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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