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별님의 마음속 고향이었던 저 산 너머에는 현대인들이 잊고 살아가는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마도 <저 산 너머>에 대한 이해인 수녀의 표현보다 적절한 문장을 찾긴 쉽지 않을 것 같다. <저 산 너머>는 고 정채봉 작가의 <바보별님>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1993년 정채봉 작가가 김수환 추기경과의 대화를 엮어낸 이 맑은 동화는 이후 김수환 추기경 선종 후 고인의 뜻에 따라 정식으로 출간되었다. 2019년 선종 10주기를 맞아 다시 출간된 <저 산 너머>가 드디어 영화로 만들어졌다. 영화 <저 산 너머>는 고 김수환 추기경의 어린 시절을 다룬 이야기다. ‘순한’이라고 불릴 만큼 착한 심정을 지닌 7살 소년의 성장 스토리 안에는 김수환 추기경의 마음의 텃밭을 일군 씨앗이 담겨 있다. <플라이 대디>(2006), <해로>(2011)의 최종태 감독은 “자연, 영성, 동심, 어머니의 사랑 등 잊혀져가는 가치들을 되돌아보는 영화다. 무엇보다 김수환 추기경이라는 옹기가 어떻게 빚어졌는지 알려주고 싶었다”며 이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기쁨에 대해 차분한 감동을 전했다.
-개봉 첫날(4월 30일)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극장에 사람이 없어 마냥 기뻐하긴 그렇지만 의미 있는 결과다.
=지금 한국영화 산업구조에서 관객과 만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영화다. 희망과 위로를 전하고픈 마음에서 출발한 영화였기 때문에 의도하진 않았지만 적절한 시기에 당도한 것 같은 인연을 느낀다. 쉽지 않은 시기에 극장을 찾아준 분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한편으론 아쉬운 점도 있다. 한국에서는 생활방역으로 전환되는 등 진정 기미가 보이는데(인터뷰는 5월 4일 진행.-편집자) 여전히 극장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가시지 않은 것 같다. 좀더 많은 분들이 마음을 열고 극장을 찾아주셨으면 한다.
-고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영화다. 어떤 계기로 그분의 삶을 영화에 담고자 했나.
=오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원래 신학을 전공한 개신교도였는데 개인적인 계기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나 역시 87년 민주화 세대라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마음이 각별했는데, 2009년 그분이 선종하고 난 뒤 영화화하려고 준비를 시작했다. 여러 기획을 고민하던 중 정채봉 작가의 책을 봤고 이거다 싶었다. 처음부터 그분의 삶을 종교영화나 전기영화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종교 지도자로서의 성취나 민주화운동에서의 족적에 눈길이 가는 게 인지상정이겠지만 그보다는 나는 그분의 마음 밭을 살펴보고 싶었다. 책의 내용은 단순하다. 드라마틱한 이야기보다 김수환 추기경의 마음의 고향을 예쁘게 담아냈는데 난 그게 좋았다.
-마음의 밭과 씨앗이라는 게 <저 산 너머>의 핵심이다.
=책의 서두에도 나오는데, 김수환 추기경이 그린 천국의 모습은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의 이미지와 사뭇 다르다. 해질 무렵 산허리에 노을이 걸려 있고 소박한 초가집에서 어머니가 나를 기다리는 풍경, 그게 그분의 천국이었다. 어쩌면 한국인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고향의 풍경일 것이다. 정채봉 작가가 어머니의 사랑과 마음의 고향이라는 정서, 그 몽글몽글한 해질 녘의 냄새를 기가 막히게 잡아냈다.
-그 말처럼 배경은 일제강점기인 데 반해 그다지 시대적 특징이 드러나진 않는다. 마치 어딘가에 있는 우리 모두의 시골, 고향의 원형을 보여주는 것 같다.
=7살 아이의 시점에선 시대의 부조리가 그렇게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을 것이다. 추기경 본인의 회고록에서는 스스로 항일투사였다고 회상했는데, 그 민족적 울분과 저항심은 청년기에 뚜렷하게 나타난다. 지나치게 낭만적인 게 아니냐는 지적도 있었지만 공기처럼 존재하지만 인지되지 않던 시절에 대해 담고 싶었다. 어린 시절 좀더 근원적인 것, 마음의 밭에 어떤 씨앗이 심어져 영성으로 꽃피웠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김수환 추기경은 투박하지만 모든 것을 담아내는 옹기 같은 분이다. 추기경의 아버지는 옹기장수였고 어머니 역시 평생을 옹기와 포목 행상을 다니며 자식들을 키웠다. 그런 인연으로 김수환 추기경의 아호가 ‘옹기’다.
-옹기에 대한 묘사나 장면들은 원작인 동화에는 없는 부분이다.
=시대의 스승들과 비교할 때 김수환 추기경은 대단한 카리스마로 사람을 휘어잡는 분이 아니다. 평범하다. 그 평범의 위대함을 보여준 분이다. 옹기는 내가 김수환 추기경이란 존재를 이해한 키워드였다. 옹기의 진짜 쓰임은 비어 있다는 거다. 꽃을 담을 수도 있고, 장을 담을 수도 있고, 변소가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편견 없이 담아낸다는 행위 그 자체다.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모양새지만 무엇이든 담아낼 수 있는 넉넉한 빈자리인 셈이다. 약간 과장하자면 한국 가톨릭은 김수환 추기경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예컨대 김수환 추기경은 가톨릭 교육과정에 불교 수업을 넣으신 분이다. 종교간의 통합, 화합을 실천한 그분의 삶의 형태를 이보다 더 정확하게 묘사하는 일도 없다. 나 역시 처음 시작은 김수환 추기경의 어린 시절을 담겠다는 생각이었지만 찍으면서 어느새 그 사실을 잊어버렸다.
-<저 산 너머>라는 제목에 어울리게 목가적인 풍경이다.
=제목 그대로 진짜 산을 많이 넘었다. (웃음) 로케이션에 특히 공을 들였는데 로케이션 매니저가 이번에 아껴둔 장소들을 나한테 탈탈 털렸다. (웃음) 예쁘다고 그냥 담아낸 것이 아니라 마음에 와닿는 순간을 발견하기 위해 애썼다. 정채봉 작가와 김수환 추기경과 나와의 교감이랄까. 선의의 투자자들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영화였기 때문에 허투루 할 수 없다는 절박함이 더 컸다.
-추기경의 어린 시절에 관한 영화인 한편 모친인 서중하 여사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어머니의 사랑은 추기경의 영성을 꽃피운 마음속 씨앗이다. 회고록을 보면 서로가 얼마나 절절했었는지 느껴진다. 영화를 통해 우리가 잊어버린 것들을 되살리고 싶었는데 어머니의 사랑도 그중 하나였다. 서중하 여사는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큰 사랑을 심어주었다. 이항나 배우는 <4등>(2014)에서 성공을 위해 자녀를 몰아붙이는 어머니 역을 맡은 걸 보고 난 뒤 일부러 캐스팅했다. 이항나 배우가 처음엔 몸살을 앓을 정도로 힘들어했지만 결국엔 강함과 부드러움의 긴장을 잘 표현해주었다.
-수환 역의 아역배우 이경훈은 260 대 1의 경쟁을 뚫고 발탁됐다.
=일단 외모가 닮아야 하고 연기력도 뒷받침되는 아역을 찾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경훈이는 오디션 때 3번째로 들어온 친구인데, 긴 인중을 보고 딱 저 친구다 싶었다. 연기가 때묻지 않은 점도 좋았다. 이 친구는 슬픈 연기를 할 때 자기의 슬픈 기억을 끄집어내는 게 아니라 상황을 이해하고 그 상황 자체에 몰입할 줄 안다. 연기 잘하는 아역배우라기보다는 영화 전체를 끌고 갈 힘이 있는, 제대로 된 주연배우라고 말하고 싶다.
-올해 칸국제영화제에 출품하려 했다고 들었다.
=가톨릭이라는 익숙한 정서가 한국에서 어떻게 다른 형태로 피어나는지 알려주고 싶었다. 비록 코로나19로 영화제 출품은 못했지만 한편으론 극장가에서 우대를 받고 있는 기분이다. 사실 한국 영화산업이 고도화되면서 장르적으로는 폐쇄되고 단순화된 경향이 있다. 여느 때라면 극장에 걸기도 힘든 영화였을 텐데 드문 기회를 얻은 셈이다. 자극적인 이야기들과 비교하면 심심하고 느리게 느껴질 수도있다. 하지만 모처럼 나온 인간의 본질, 그 아름다움과 선한 의지에 대한 영화라고 자부한다. 흔치 않은 기회이니 열린 마음으로 극장에 와서 즐겨주었으면 좋겠다. 부디 많은 분들에게 이 씨앗이 전해질 수 있게끔 수명이 긴 영화가 되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