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한국사회를 그려내는 항공재난영화가 온다’ <비상선언> 한재림 감독 인터뷰
2020-05-13
글 : 김성훈
사진 : 오계옥

지난해 한재림 감독이 차기작으로 재난영화를 연출한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흥미로웠다. <관상>(2013), <더 킹>(2016) 같은 전작을 통해 권력의 민낯을 들여다보았고, 평소 정치적, 사회적 감수성이 예민한 그가 재난을 단순히 전시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체 어떤 재난이 벌어지고 재난을 둘러싼 인간들을 어떻게 묘사하며 국가는 또 어떤 결정을 내릴지 궁금했지만, 워낙 철통 같은 보안 때문에 그의 신작인 <비상선언>(제작 우주필름, 공동제작 씨제스엔터테인먼트·씨네주, 배급 쇼박스)은 ‘항공재난영화’라는 정보 외에 어떤 이야기인지 짐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베일에 꽁꽁 싸인 이 영화는 최근 송강호, 이병헌, 전도연, 김남길 등 주연급 배우들이 대거 캐스팅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영화계 안팎에서 큰 화제가 됐다. 지난 3월 촬영을 시작할 예정이었던 <비상선언>이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크랭크인이 연기됐으며 진열을 재정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한재림 감독에게 만남을 청했다. 영화에 대한 정보가 전무한 까닭에 스무고개식으로 진행된 인터뷰는 <비상선언>이 어떤 재난영화인지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될 것이다.

한재림 감독

- 오랜만에 만났는데 얼굴이 반쪽이 됐다.

= 살이 많이 찌니 건강에 안 좋더라. 빨리 피곤해지고, 집중이 안돼 이대로 지내면 안될 것 같았다. 촬영 시작하기 전에 몸이 먼저 지칠 것 같아 다이어트를 했다. 지금보다 더 빼야 한다.

- 언제 촬영을 시작할 계획이었나.

= 3월 말. <비상선언>은 항공영화인데 코로나19 때문에 비행기 세트가 미국에서 전부 오지 않은 상태다. 할리우드에서 실제 비행기를 조립해 세팅하는 업체가 있다. 그 업체와 진행하고 있었는데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미국에서 사람이 모이는 게 금지됐다. 그래서 비행기 세트를 실은 컨테이너 박스 일부가 아직 한국에 못 들어오고 있다. 영국 업체가 비행기 세트를 매달아 원격으로 움직이는 모션 조정 장치를 맡기로 했는데 세팅을 설계하고 준비까지 끝낸 상태에서 코로나19 때문에 한국에 못 들어오겠다고 알려왔다. 유럽 사람들은 전세계 영화산업이 셧다운된 상태에서 영화를 찍는 한국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더라. 어쩔 수 없이 그 업체와의 진행을 멈추고 한국 업체를 선정해 다시 준비하고 있다. 그런 일들이 연달아 벌어지면서 진행이 다소 지체됐다.

-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진열을 재정비하는 시간이지 않나.

= 프리프로덕션 시간을 확보하면 촬영을 좀더 탄탄하게 진행할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에서 시도할 만한 게 많지 않다. 미국이나 영국의 확진자 수가 적었을 때만 해도 코로나19가 이렇게 오래갈 줄 예상치 못했다. 미국과 영국 업체와 진행하면서 우여곡절이 많았다.

- <비상선언>은 항공재난영화로만 알려졌다. “시나리오를 읽은 사람이 송강호와 이병헌 단 두명뿐”이라는 얘기가 나올 만큼 영화에 대한 정보를 꽁꽁 감춘 이유가 뭔가.

= 영화 개봉 전에 소재가 먼저 알려지면 관객이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것 같았다. 줄거리를 알고 영화를 보면 감동이 작아질 수 있어 영화적 재미를 극대화하기 위해 고민이 많았다. 많은 예산이 투입되고, 준비할 게 많다보니 촬영이 끝난 뒤 곧바로 개봉할 수 없어 보안에 신경을 많이 썼다.

- 오래전에 제안받은 아이템이라고 들었다.

= 10여년 전, 이한승(현재 리양필름 대표) 당시 CJ엔터테인먼트 투자팀장이 보여준 아이템 중 하나였는데, 이야기의 형태만 갖춘 까닭에 잘 풀어가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인해 맡지 못했고, <관상>을 연출했다. <관상>이 끝난 뒤 다시 진행하려고 했으나 그때도 맡지 못했다. 전작 <더 킹>을 끝낸 뒤 당시 방옥경(현재 씨제스엔터테인먼트 대표) CJ엔터테인먼트 투자팀장이 다시 해보지 않겠냐고 권하면서 영화화 판권을 구매했다. 2년 전 트리트먼트를 내놓았고, 지난해 시나리오를 썼다.

- 한국 사회에서 재난이라고 하면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사건이 먼저 떠오르고, 현재 겪는 코로나19 또한 재난에 준하는 상황이다. 재난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무엇인가.

= 얘기한 대로 특정 사건을 따로 언급하지 않더라도 최근 한국 사회에서 크고 작은 재난들이 있었다. 현재 전세계는 코로나19로 위기에 처해 있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예상하고 그리려던 모습들이 현실에서 똑같이 벌어지고 있어 씁쓸하다. 항공재난영화인 만큼 소재가 가진 장르적 재미도 기대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인간이 재난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관객이 그들의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맞춰 풀어나가는 이야기다. 그런 면에서 <비상선언>은 단순히 재난을 전시하고 소재로만 다루는 이야기는 아니다.

-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받은 복합적인 감정이 한국 사회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검사 세계(<더 킹>)를 들여다보는 계기가 된 만큼 당신은 정치적, 사회적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지 않나. 앞에서 언급한 대로 한국 사회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재난들이 이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되었을 것 같다.

= 그게 중요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여러 재난들이 있었다. 재난의 성격도, 종류도, 피해 규모도 제각각이었지만 그때마다 사람들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했던 행동들은 비슷하지 않나. 그 점에서 이 영화는 재난을 단순히 장르로 소비하지 않고 사회적인 함의를 담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재난은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 라는 메시지도 함께 던지고 싶다.

- 평소 재난 장르를 좋아했나.

= 감독들은 재난뿐만 아니라 장르라면 다 좋아하지 않나. <비상선언>은 재난보다는 재난을 겪는 인간들을 그리는 이야기다.

- 제목 때문인지 존 웨인이 출연한 <비상착륙>(감독 윌리엄 A. 웰먼, 1954)이 떠올랐다(과거의 비극적인 사고 때문에 괴로워하는 베테랑 조종사 댄 로만(존 웨인)이 사고 이후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호놀룰루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의 노선을 왕래하는 항공편의 부기장으로 복귀하면서 시작하는 이야기다.-편집자).

= 레퍼런스를 묻는 질문인 것 같은데 영화가 가진 태도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면 봉준호 감독의 <괴물> 같은 영화라고 대답하고 싶다. 한강에 괴물이 나타난 영화 속 사건이 한국 사회의 은유이자 상징이지 않았나. 괴물이 등장하면서 강두(송강호) 가족의 사연과 한국 사회의 사회현상들이 함께 수면 위로 드러나는 것처럼 <비상선언> 또한 영화 속 재난을 둘러싼 현재 한국 사회를 그려내는 이야기가 될 것 같다.

한재림 감독

- 배우 송강호, 이병헌, 전도연, 김남길이 출연하기로 하면서 촬영 전부터 영화게 안팎에서 큰 화제가 됐다. 이들이 한데 출연한다는 점에서 한두명이 서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어가는 형식보다는 집단극에 가까운 형식일 것 같은데.

= 물론 서사의 중심에 서서 극을 이끌어가는 역할은 송강호 선배다. 그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재난을 겪고, 위기를 극복하는 형식의 이야기다. 재난에 처했을 때 인간은 나약해지고 겁을 먹는데 그때 그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보여주려고 한다. (정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던) 과거와 달리 현재 정부는 코로나19에 잘 대처하고 있고, 국민들이 그런 정부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 않나. 이같은 시대 변화 또한 이 이야기에 반영될 것이다.

- 배우 송강호와의 작업은 <우아한 세계>(2006), <관상> 이후 세 번째인데.

= 매 작품 그는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었는데 대체로 열정적이고 폭발력이 있지 않았나. 하지만 이 영화에서 송강호 선배는 전작과 다른 면모를 보여줄 것 같다. 극중에서 맡은 역할이 나이도 있고, 그래서 몸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그만큼 몸을 사리는 캐릭터라는 얘기다. 송강호 선배도, 이병헌 선배도 함께 작업하는 할리우드 스탭들도 잘 아는 배우들이라 부담이 되면서도 복이라고 생각한다.

- 배우 이병헌, 전도연, 김남길과의 작업은 이번이 처음이다.

= 아직은 자세한 얘기를 할 수 없지만 그들의 새로운 면모를 지켜보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재난 상황을 전시해 장르의 쾌감을 극대화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적으로 풀어나가는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스파이 장르로 비교하면 물량 공세를 앞세운 ‘007 시리즈’보다 현실적으로 묘사하는 <본 아이덴티티>에 더 가까운 재난영화라 할 만하다.

- 이모개 촬영감독과 시각적으로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을 것 같다.

= 시각특수효과(VFX) 작업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준비를 철저하게 하고 있다. 장르적으로 이미지를 선명하게 드러내기보다는 쨍하게 표현하는 게 어울리는 이야기라 디지털보다는 필름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비행기 특유의 공간에 대한 냄새를 이미지로 표현하기 위해 16mm로라도 필름 질감으로 찍고 싶었는데 현상소가 남아 있지 않아 필름으로 찍는 걸 포기했다.

- 비행기가 공간이 좁다보니 카메라가 움직일 수 있는 각도나 화각이 한정적인데.

= 그래서 이모개 촬영감독과 함께 한정된 공간을 최대한 즐기자고 했다.

- 비행기는 큰가.

= 보잉 777처럼 큰 비행기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부산행> <신과 함께-인과 연> <생일>에 참여한 이목원 미술감독이 현재 비행기 세트에서 미술 작업을 하고 있다. 실제 비행기를 조립한 공간을 영화 속 항공기와 인물 동선에 맞는 미술을 선보일 계획이다.

- 촬영은 언제 시작되나.

= 늦어도 5월 안에 시작하는 게 목표다. 비행기 세트 몇개가 아직 도착하지 않아 도착 일정에 맞춰 크랭크인을 하려고 한다. 현재 촬영하고 있는 한국영화들이 그렇듯이 우리 또한 최대한 조심해서 찍으려고 한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비상선언>은 세트 촬영 분량이 70%에 달해 제작진만 감염 위험에 대해 조심하면 큰 문제가 없을 듯하다.

- 제작자로서 지존파 살인사건을 다룬 영화 <지존>(가제, 감독 김동혁)을 준비하고 있다.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 소재가 무척 세서 투자받기가 쉽지 않아 여러 가능성을 찾고 있다. 단순한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 그들이 저지른 사건을 통해 1990년대 한국의 사회상을 그려내는 이야기다. 하지만 너무 예민한 주제라 그런지 제작 소식이 나왔을 때 투자자 사이에서 우려의 목소리도 있더라.

- 직접 연출하지 않는 이유가 뭔가.

= 김동혁 감독이 <관상> 시나리오를 썼는데, 그가 직접 쓴 시나리오를 보니 정말 잘 썼더라. 냉정하고 드라이하게 풀어나가는 걸 보니 김동혁 감독이 가장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데뷔작인 <연애의 목적>(2005)부터 15년 가까이 영화를 만들면서 <씨네21>과 인연이 깊다.

= 대학 시절부터 독자였다. <씨네21>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게 유행이던 시절이었다. (웃음) 한때는 영화잡지가 많았던 적도 있었지만 지금 유일하게 살아남아줘 고맙다. 지금 한국 영화산업이 코로나19에 직격타를 맞아 위기에 처하지 않았나. 많은 관객이 극장에 가고 싶지만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기 위해 자제하고 있는데 힘들지만 조금만 더 열심히 참고, 나중에 한국영화가 다시 극장에 걸리면 늘 그랬듯이 아낌없이 사랑하고 지지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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