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몸이 근질근질해서 어떻게 참았을까. <세상의 끝>(2007) <최악의 친구들>(2009) <남자들>(2013) 등 여러 단편들을 연출했던 남궁선 감독이 7년만에 첫 장편영화 <십개월>과 단편 <여담들>을 들고 나타났다. 코리안시네마 부문에 초청된 <십개월>은 스물 아홉살인 컴퓨터 게임 개발자 미래(최성은)가 임신을 한 뒤 출산하기까지 10개월 동안 겪는 혼돈과 그로 인한 소동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고민을 현실적으로 그려낸 이야기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임신에 대해 미래는 앞이 캄캄하지만 주변인물(특히 남자) 누구도 그에게 속시원한 등불이 되어주지 못한다. 실제로 몇 년 전 아이를 출산한 한 남궁선 감독의 경험담과 고민이 이야기 곳곳에 생생하게 녹아있다. <십개월>과 함께 코리안시네마 단편부문에서 상영되는 <여담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바뀌는 도시에서 갈 곳 잃은 청춘들의 상실감을 무성영화 형식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결혼한 뒤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하느라 그런지 첫 장편영화를 내놓기까지 무려 7년이나 걸렸다.
=지난 2014년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한 사랑 이야기를 준비하다가 아이를 낳았다. 많은 여성들이 그렇듯이 나 또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큰 변화를 겪었는데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페미니즘 바람이 불기 전이었는데 나만 이런 혼란을 겪는 건가, 그게 아닐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임신을 하면서 겪는 감정의 여정을 영화로 만들어야겠다 싶었다.
-아이를 낳지 않았더라면 나올 수 없는 영화였겠다.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여성이 임신해 여러 변화들을 겪는 것 자체가 그들의 삶에서는 분명 큰 충격이다. 그런데 그간 임신을 다룬 성장담을 보면 여자 친구가 임신하면서 남자가 정신차리는 서사가 많았다. 그래서 오히려 아직 정신 못 차리는 여성이 임신을 하면서 부딪히는 일과 그로 인한 고민을 그려내고 싶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시나리오를 쓰는데 많이 반영됐을 것 같다.
=여성의 임신이 다루기 민감한 소재는 아니지만 ‘(아이를 키울 준비도 되지 않았으면서) 낙태를 하지 않고 왜 애를 낳는가’ 같은 복잡한 검열이 스스로 작용하면서 헷갈리기도 했다. 평범한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을 극적으로 묘사해야 하는데 나는 그렇게 섬세하게 묘사하지 못하는 스타일이다. 여느 성인물처럼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풀어내고 싶었지만 마음처럼 쉽진 않았다. 시나리오 초고가 완성된 영화보다 나사가 더 풀린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도 그래서다. 어떤 면에서 초고대로 영화를 만들었어도 재미있을 뻔했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을 좀 더 현실적으로 발전시키면서 주인공 미래와 윤호의 역할이 지금의 영화처럼 달라졌다. 초고에선 윤호는 미래보다 좀 더 현실적인 캐릭터였는데 미래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딱한 캐릭터로 바뀌었다.
-미래의 남자친구 윤호, 윤호의 아버지, 미래의 아버지 등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미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윤호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시나리오를 썼다. 초고에서는 미래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윤호가 절에 들어가 숨고, 미래가 윤호를 찾아가는 장면도 있었다. 웃긴 건, 쓸 때는 몰랐는데 막상 스크린에 펼쳐지고 나니 그 전개가 말이 안 되는 거다. 시나리오를 모니터링해준 친구들도 ‘미래가 저 꼴을 당했는데 남자친구를 왜 찾냐. 마음에 안 든다’ 라는 의견을 주었다. 그렇게 경멸적인 태도로 그린 캐릭터들이 아닌데 한국 사회에서 아이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들을 정직하게 따라가다보니 결국 가부장제 남자들이 빌런으로 등장하고 말았다. 백현진씨가 연기한 산부인과 의사 또한 남자이지 않나. 산부인과 의사가 남자가 아니었다면 미래가 임신을 그렇게까지 혼란스러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희 연출부들이 산부인과 의사를 여성으로 설정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을 내기도 했었는데, 사실 일부러 그를 중립적 위치의 사람으로 그리고 싶었다. 만약에 그 의사가 여성이었다면 미래가 그렇게까지 헤매진 않았을 거다. 산부인과 의사는 미래를 돕고 싶지만 의학적인 소견 외에 해줄 수 있는 얘기가 없지 않나. 내가 느낀 외로움을 반영해보고 싶었다. 어느 순간 둘러보니 내가 평소 조언을 구하는 멘토들이 대부분 남성들이더라. 그들이 도움을 줄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하는 순간 느껴지는 무력감이 있다.
-미래가 다니는 직장의 대표가 ‘항상 함께 가자’고 말했다가 미래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정색하는 모습은 여느 ‘한남’들과 다를 바 없다.
미래가 다니던 회사의 대표는 평소에는 생각이 깨어있는 동료였지만 법의 테두리 안에서 미래를 배신하게 되는 인물이다. 서로 비슷하고 잘 이해하는 같은 편인 줄 알았는데 현실적인 상황이 닥치자 구도가 달라진다. 그 관계도 결국 '일을 선택한 여자는 임신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합의를 전제로 한다는 것이 폭로되는 순간이다. 임신을 선택하지 않은 (혹은 포기한) 여성들은 그나마 사회에서 자리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반면, 결혼과 임신을 선택한 사람들은 가정과 사회에서 사라질지도 모르는 공포심을 항상 가진 채 살아간다. 어쨌든 그럼에도 남성 인물들의 감정적인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아이에 대한 책임감으로 돼지농장에 일하러 가는 채식주의자 윤호의 감정 또한 가부장제에서 남성이 겪는 심리적 고초라고 생각한다.
-배우 최성은의 어떤 점에서 미래를 맡는데 적합하다고 판단했나.
=미래는 미성숙하지만 어떤 면에서 똑부러진 면모가 있는 캐릭터다. 최성은씨를 만나보니 되게 예쁘고 속을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면모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폭주하는 에너지가 있어 거기에 홀딱 반했다.
-감독님과 닮았던데. (웃음)
=안 닮았다. (웃음)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모니터를 부탁했는데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가 ‘네가 여성서사를 만들어?'였다. 그게 안 어울리는 것이라도 되는 양.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여성 서사가 별도의 장르인가? 그럼 뭐, 남성 서사를 만들겠니? 라고 되묻고 싶다. 작가는 자기에게 보이는 곳에 있는 걸 담을 의무가 조금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주제에서 나에게 보였던 건 여성의 경험이었다.
-영화 마지막에 ‘엄마에게’ 바친다는 자막이 올라가더라.
=우리 엄마는 이 자막이 뜨는 걸 아직 모른다. 곧 보시겠지. 엄마가 된 사연은 여성마다 제각각이지만 이 세상 엄마들은 임신으로 인한 일종의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게 아닐까 싶다. 전쟁을 다녀온 베테랑 군사 같은 느낌이랄까. 엄마가 되어보니, 또 영화를 찍으면서 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 나와 또 다른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내가 알지 못하는 경험을 했겠구나 싶었다.
-코리안시네마 단편 부문에 초청 받은 <여담들>은 대림미술관 프로젝트 스페이스 전시회에서 출발된 프로젝트인데.
=평소 환경을 따라가는, 시네마베리떼 같은 작업을 항상 하고 싶었다. 내러티브를 따르지 않고, 당시 친구들이 자신의 블로그에 쓴 일기들을 모아 뒤섞은 뒤 카메라를 들고 나가 배우들과 사나흘 동안 찍었다. 동시녹음도 하지 않고 조명도 세팅하지 않은 채 배우들이 실제 그 공간에 있는 것처럼 찍었다. 이 장면들로 만들어진 설치 이후 후반작업을 거쳐 무성영화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그건 형체가 없는 일기가 영화가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사라져가는 풍경에 내몰린 청춘들의 상실감이 무성영화 형식으로 담아낸 게 인상적이다.
=친구들이 쓴 일기 내용이 상실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런 파편들을 붙여보니 영화를 주로 촬영한 한남동도 매일 풍경이 바뀌고 있고, 청춘들은 갈 곳이 없으며, 이 시대에서 해둔 건 없는 모습들이 담겼다.
-그간 몸이 근질근질해서 어떻게 참았나.
=참지 않고 계속 영화를 만들었다.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아이가 유치원에 못가서 후반작업 일정을 맞출 수 있을까 걱정도 됐는데 다 적응하게 되더라.
-차기작은 무엇인가.
=시놉시스만 10개가 있는데 <십개월>을 다 털고 난 뒤 고민할 생각이다. 하고 싶은 건 수없이 많다. 마음이 급하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