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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설국열차' 쇼러너 그램 맨슨 - 인물, 계급, 세계관을 영화보다 세분화했다
2020-06-04
글 : 김소미
<설국열차> 촬영 현장의 그램 맨슨(가운데)과 배우 제니퍼 코널리(오른쪽).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2013) 이후 7년 만에 미국 방송사 <TNT>가 드라마 <설국열차>를 발표했다. 지난 5월 25일 넷플릭스를 통해 한국 관객에게 모습을 드러낸 <설국열차> 시리즈는 꼬리칸의 반란이라는 최소한의 모티브만 유지한 채 완전히 새로운 개성을 연료로 장착하고 10개 에피소드를 향해 달려간다. 주인공은 일등칸의 접객 승무원 멜라니 카빌(제니퍼 코널리)과 꼬리칸에서 차출된 디트로이트 출신의 전직 형사 안드레 레이튼(다비드 디그스). 두 사람은 열차 안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미스터리를 좇으며 각자의 생존을 위해 위험한 결속을 맺는다. 달라진 만큼 궁금한 것도 많은 드라마 <설국열차>에 관해 작품의 쇼러너인 그램 맨슨에게 물었다. 영화 <큐브>(1997)를 쓰고 복제인간을 다룬 SF 드라마 <오펀 블랙>의 프로듀서로 유명세를 탄 그램 맨슨은, 시리즈 전반을 조망하고 매일의 촬영 현장을 관리감독하는 쇼러너의 역할에 더없이 알맞은 경력의 소유자다.

-<오펀 블랙> 시리즈를 거치며 SF 장르에 관심이 많을 텐데 <설국열차> IP의 어떤 점에 끌렸나.

=봉준호 감독의 영화로 <설국열차>를 처음 알았고, 영구적으로 순환하는 기차를 둘러싼 부조리함과 하이컨셉(간결하고 독특한 설정으로 확실하게 흥미를 잡아끄는 대중영화 기획을 의미한다.-편집자)에 즉각 반했다. 계급 이야기를 하기에 칸칸이 나뉜 기차만큼 좋은 설정이 또 어디 있겠나. 문화를 불문하고 그 상징성과 생리를 이해하게 되는, 기차가 공통언어로 기능하는 이야기다. 시각적인 요소들 역시 놀라웠다. 앞칸의 문이 차례로 열릴 때마다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는 긴장감이 강렬한데, 가장 뒤칸인 꼬리칸에서 시작해서 전진해 나가는, 오로지 전진만을 통해 계속 무언가를 발견해 나가는 원작 영화의 느낌을 살리고 싶었다. 그리고 <설국열차>는 아주 정치적인 알레고리로 가득 찬 영화이기 때문에 다양한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

-전반적으로 원작 만화와 영화에 얽매이지 않은 과감한 재구성이 돋보인다. 뒤칸에서 앞칸으로 돌진하는 직선적인 액션 시퀀스로부터 추진력을 얻었던 영화와 달리 10부작에 달하는 TV드라마는 늘어난 스크린타임을 채울 밀도 있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캐릭터 플레이가 중요했다. 여러 인물의 앙상블은 TV시리즈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TNT>와 <설국열차>를 준비하는 초반부터 영화처럼 마냥 앞으로 치고 나가는 전개는 어려울 것이라고 꽤 명확히 내다볼 수 있었다. 이를 위해 인물, 계급, 세계관을 세분화했다. 일등칸, 이등칸, 삼등칸 그리고 꼬리칸까지 총 4개칸으로 나누고 에피소드 초반에 각 클래스가 돌아가는 작동 원리를 빠르고 명확하게 설명하려 했다. SF 장르에선 특히 약속이 중요하니까. 늘어난 주요 배우진들의 존재감과 해석력에 힘입은 바도 크다.

-가려진 정보가 조금씩 드러나는 수사극 스타일로 전개된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에 살인 미스터리를 이식한 이유는 뭔가.

=두 가지 측면이 있을 것 같다. 첫 번째 측면은 봉준호 감독 영화와 비슷하게 안드레 캐릭터를 따라 시청자가 꼬리칸부터 열차의 앞쪽으로 전진하며 지금까지 보지 못한 세계를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몇개의 에피소드에 걸쳐 안드레가 열차 앞으로 전진하면서 열차의 전반적인 구조를 알게 되고, 깜짝 놀랄 만한 장소들을 보게 되고, 열차 운행을 위해 지하에서 어떤 일들을 하는지를 알게 되는 과정을 시청자가 함께 따라가며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느낌을 주고자 했다. 또 다른 측면은 살인사건 수사라는TV시청자들에게 익숙하고 이해하기 용이한 형식을 통해 저항과 혁명에 관한 이야기를 부드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했다.

-세계가 얼어붙은 지 약 7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래픽노블과 영화보다 타임라인을 훨씬 앞당긴 이유가 있나.

=재앙 이전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면서도 이제 열차 안에서 어느 정도의 일상의 느낌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들은 7년 전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와 같은 세상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보통 7년 정도 머무르면 일종의 권태기(7 year itch)가 온다고 하지 않나. 7년 전 열차에 함께 오른 파트너든 열차에 오를 때 믿었던 종교든 어떤 이들은 이런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삶을 탐색하고자 하는 시점이 온다. 새로운 관계망을 원할 수도 있고, 새로운 사회적 환경을 경험하고 싶을 수도 있다. 이런 심리가 세계관 구축의 한 측면이었다.

-이번 시리즈에서 눈여겨본 것 중 하나는 여성과 어린아이 캐릭터의 다양성, 능동성, 서사적 입지와 역할이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의도한 바다. 강하고 주체적인 여성은 드라마 <설국열차>를 대변하는 이미지 중 하나다. 미래를 다루는 이야기니까 어쩌면 당연한 설정일 수도 있지만, 성별과 나이뿐 아니라 국적, 인종 면에서도 다양성을 고려했다. 이 경우 아이러니하게도 일등칸이 특히 더 그렇다. 열차의 주인인 윌포드가 일등칸을 만든 투자자와 상류층을 국제적으로 모집했다는 설정이다. 열차 노동자들이 머무는 삼등칸은 세계 각지에서 선박 크루들이 모인 느낌으로 꾸몄다.

-영화에 등장하는 새로운 장소 중에서 열차의 한가운데 놓인 일종의 중립지대 ‘나이트 카’(night-car)는 어떻게 생겨났나.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세트다. 나이트 카는 옛날 카바레와 사창가를 표방한다. 공간을 운영하는 미스 오드리(레나 홀)의 주도로 이용객에게 은밀한 애도의 시공간을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대재앙 이후 7년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열차 안의 모든 사람들이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환경오염으로 인한 기후변화라는 점에서 인류 모두가 죄책감도 느낄 것이다.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슬픔을 개인적으로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치유하는 공간으로 기차의 중립 지대를 설정했다. 나이트 카 덕분에 잠시 열차 바깥으로 화면이 빠져나갈 수 있는 기회도 생긴다. 단순히 과거를 보여주는 플래시백보다는 꿈 혹은 기억을 감각하는 추상적인 느낌을 고심했다.

-기차 내부의 모습이 훨씬 다양해지고, 규모도 커졌다. 프로덕션디자인에 공들인 흔적이 느껴진다.

=꼬리칸과 삼등칸의 경우 열차 칸을 화물 컨테이너 프레임을 활용해 제작한 다음 여기에 바퀴를 달았다. 그래서 실제로 스튜디오에서 열차 칸을 이동시킬 수도 있었고 대여섯개를 연결할 수도 있었다. 그런 뒤 그 위를 배우들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끊김없이 대여섯 칸을 촬영할 수 있었다. 우리가 원하던 대로 열차를 하나의 캐릭터로 만든 것이다. 열차 밖 측면에 큰 손잡이를 부착해 바깥에서 열차 칸을 흔들어서 배우들이 연기하는 공간에 실제 열차 같은 흔들림도 구현했다. 완성된 세트를 본 봉준호 감독도 굉장히 신나했다.

-총괄 프로듀서로 이름을 올린 봉준호 감독이 현장에도 종종 참여했나.

=두어번 촬영장을 방문했다. 구체적인 촬영 과정에 함께한 건 아니지만 몇 차례 점심을 먹으면서 작품의 컨셉과 방향성에 대해 상의했다. 한번은 내가 봉 감독에게 진지하게 잘 만든 액션 어드벤처의 방법론에 대해 물어보기도 했다. 봉 감독에 관한 내 마지막 인상은 의외로 그가 정말 웃긴 사람이라는 거였다. (웃음)

사진제공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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