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사냥의 시간' 이제훈 -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극한의 극한까지
2020-08-25
글 : 임수연
사진 : 최성열

이제훈을 만난 적이 있는 <씨네21> 기자들이 항상 나누는 말이 있다. 해외에 나가서도 필름을 상영하는 예술영화관을 찾아다니는 그는 ‘찐’ 시네필이라고. “극장에서 핸드폰을 잠시 꺼두고 2시간 동안 집중해서 감상해야 ‘시네마’를 보는 것”이라며 자신이 옛날 사람의 취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이제훈에게, 공교롭게도 지금 가장 가까운 키워드는 넷플릭스가 됐다. <파수꾼>(2010)의 윤성현 감독과 함께한 <사냥의 시간>이 넷플릭스에서 4월 23일 공개됐고, 최근 이제훈은 넷플릭스 시리즈 <무브 투 헤븐: 나는 유품정리사입니다>를 촬영 중이다. <베터 콜 사울>(<브레이킹 배드>의 스핀오프)부터 <브레이킹 배드 무비: 엘 카미노>까지 최근 좋아하는 작품을 줄줄이 읊는 현실의 그는 열렬한 OTT 마니아이기도 하다. 영화적 체험을 중요시한 <사냥의 시간>이 넷플릭스에서 공개되는 것을 두고 그의 심정이 하나로 서술될 수 없는 건 그래서다. 동시에 ‘영화란 무엇인가’를 새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사냥의 시간>을 보고 나면, 그가 한결같이 윤성현 감독을 지지하는 이유를 집요하게 묻고 싶어진다. <사냥의 시간>이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고 바로 다음날, 이제훈을 만났다. 그는 몇 시간 동안 진행된 커버 촬영에도 웃음을 잃지 않고, 현장 스케치를 하는 <씨네21> 뉴미디어팀까지 살뜰히 챙기는 여유로 모두를 감탄하게 했다. 뉴미디어팀이 촬영한 ‘이제훈의 인생 영화 월드컵’ 영상은 5월 5일 <씨네21> 공식 유튜브 계정에서 감상할 수 있다.

-지난 두달간 <사냥의 시간>을 둘러싼 모든 것이 다사다난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개봉이 밀리고 넷플릭스와 손을 잡은 후 리틀빅픽처스와 콘텐츠판다가 법정 분쟁까지 갔다.

=<사냥의 시간>에만 국한되지 않은, 전세계적인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전염병) 사태를 다 같이 견뎌야 했기 때문에 조금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기다렸던 것 같다. 넷플릭스가 <사냥의 시간>을 가져가고 싶다는이야기를 듣고 매우 놀랐다. OTT는 지금 내 인생의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사냥의 시간>이 넷플릭스에서 관객을 만난다는 것이 한편으로 무척 반가웠다. 전세계에 동시 공개되는 만큼 많은 분이 즐길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사냥의 시간>은 극장이라는 어두운 환경에서 아주 큰 사운드로 감상할 때 가능한 영화적 체험을 목표로 한 작품이다. 이를 실현하지 못한 건 아쉬웠다. <파수꾼> 같은 드라마라면 괜찮았을지 몰라도 <사냥의 시간>은 총기 액션이 가득한 서스펜스 스릴러 장르 아닌가. 어찌됐건 영화는 사람들에게 많이 보여지기 위한 것이니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것은 무척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극장에서 볼 수 있는 기회도 있었으면 한다.

-윤성현 감독이 실제 이제훈을 많이 투영해서 준석 캐릭터를 썼다는 정보를 알고서 보니,“이제훈이 실제로 저렇단 말이야?”라고 자꾸 생각하며 보게 되더라. 구체적인 말투나 행동이 유사하다는 건 아니겠지만! (웃음)

=(폭소를 터뜨리고) 도대체 나의 어떤 부분을 보고 준석 캐릭터를 쓴 거지? 꿈을 위해 가장 소중한 친구들을 위험한 계획에 끌어들이는 부분은 동의하기 힘들었지만, 시나리오를 볼 때 준석이 하는 행동에 특별한 이질감이 생기지는 않았다. 아마 친구들이 없다면 세상 어딜 가도 의미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계획에 끌어들인 거겠지. 더이상 잃을 것이 없는 거친 밑바닥 인생의 처절함은 <파수꾼> 당시 내가 갖고 있던 목마름과 비슷하다. 그 이후 작품을 할 때도 매번 최선을 다했다. 가까이서 날 지켜본 사람으로서 내가 가진 절박함을, <파수꾼>의 기태를 한번 더 투영한 캐릭터를 만든 것 같다.

-<아이 캔 스피크>(2017) 때 인터뷰로 만난 적이 있다. 당시 기준으로 많은 사람들이 뽑는 이제훈 최고의 연기는 <파수꾼>이었다. <파수꾼>과는 좀 다른 캐릭터를 많이 연기해왔지만 언젠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연기를 다시 보여줄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나. 그게 준석 같다.

=정확하다. 몇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아꼈다. 그렇게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윤성현 감독이니까 했다. 다시 나의 내면에 있는 무언가를, 외형적으로도 거친 부분을 표현하고 싶었다. 굉장히 불안하고 정제되지 않은, 계산하지 않고 느끼는 대로 표현하는 것들 말이다. 디렉팅을 하는 감독을 믿기 때문에 정말 다 내려놓고 연기했다. 살면서 인간은 어떤 경험을 하게 된다. 그 경험의 한계치까지 도달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건 체력이 될 수도, 정신적 압박이 될 수도 있다. 윤성현 감독은 두 가지 부분 모두를 경험하게 한다. 그를 만나면 내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밀어붙일 수 있게 된다. 그 부분에 있어 <파수꾼>의 기태와 <사냥의 시간>의 준석은 닮았다.

-정말 한계까지 갔기에 나온 연기라고 느껴진 장면이 있다. 한(박해수)과 처음 대치하는 장면, 그가 준석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을 때 표정을 보면 절대 계산해서 나올 수 있는 연기가 아니다.

=내가 만약 벼랑 끝에 서 있고 앞으로 한발 내딛으면 당장 죽는 상황이라면 어떨까, 그런 상상을 극한까지 몰아붙였다. 여기에 진짜 총알이 들어 있고 자칫 잘못해서 발포가 되면 내가 죽지 않을까 하는 상황을 계속 느끼려고 했다. 되게 신기한 경험이었다.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오금이 저리기도 했다. (박)해수 형의 에너지가 나를 죽음의 문턱까지 갈 수 있게 집중시켜줬다.

-죽음의 문턱까지 가봤던 <사냥의 시간> 이후 실제 이제훈의 삶이 달라진 것도 있나.

=더 단단해지고 묵직해졌다. 웬만한 것에 있어서는 의연하고 그릇이 넓어졌다. 원래는 일을 할 때 톤이 극명하게 달라졌다. 일할 때는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고 완벽하기를 바라서 굉장히 예민했다. 그런데 그 완벽함은 누군가가 날 봐주고 도와줘야 가능한 거다. 서로 부딪침이 있겠지만 다름을 인정하고 빠르게 인정하자, 즉 사람들을 좀더 믿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전에는 100이어야 만족했다면 지금은 그 기준치를 조금 낮춘 것 같다.

-<사냥의 시간> 이후 촬영한 드라마 <여우각시별>, 예능 프로그램 <트래블러>에서도 그 변화를 확인할 수 있나.

=그렇다. 가끔 스스로 목을 조여 나 자신을 죽일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사냥의 시간> 이후 그렇게까지 나를 몰아붙이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게 있다고, 보다 넓은 시각을 갖게 됐다. 크게 호흡을 내쉬고 어떤 목표를 향해서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리지 말고 옆이나 뒤로 돌아볼 수 있다고 말이다. 정말 신기한 게, 기점이 확 갈린다. 개봉예정인 <도굴> 현장에서 정말 신났다. 얼마나 더 즐겁고 재밌게 놀 수 있을까 생각하며 촬영장에 갔다. <사냥의 시간>은 얼마나 더 힘들까 생각했지 기대감은 없었다. 동료배우와 감독이 없었다면 난 정신적으로 더 피폐해졌을 것이다.

-항상 웃는 이미지로 비쳐지고 있지만, 이제훈이 갖고 있는 어떤 면은 <사냥의 시간>의 디스토피아 설정과 맞닿아 있었던 것 같다.

=사람들은 밝음과 어두움을 동시에 갖고 있다. 나 역시 그런 두 가지가 공존한다. 윤성현 감독은 어두운 심연을 잘 건드려주고, 그것을 캐릭터를 통해 표출할 수 있도록 날 조율한다. 그러니까 계산할 필요가 없이 나를 내던지게 된다. 그러고 나면 굉장히 허탈하고, 내가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을 반복적으로 했다.

-마지막에 준석이 총기를 난사하는 장면에서 어떤 광기를 느꼈다. <고지전>(2011) 때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는데 연기의 깊이가 달라졌더라.

=<고지전> 당시에는 네가 어떻게 하나 보자는, 매의 눈에 대한 부담감이 너무 컸다. 해내야 한다는 생각에 내 그릇을 다 깨부술 정도로 엄청나게 지르게 됐다. <사냥의 시간>은 또 다른 부분이 있었다. 여태까지 힘들었던 것을 다 날려버리고 싶었다. 거의 시간 순서대로 찍었기 때문에 촬영하며 누적된 피로와 여기서 탈출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사냥의 시간> 현장은 나에게 지옥도였다. 이제 떨어져 놓고 보니 참 재밌다.

-연기의 출발이 리얼리즘에 있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리얼리즘을 실현하는 방식은 어떠한가. 배우는 결국 보이는 걸로 평가받다 보니 아무리 진심을 다해 그 감정에 빠져들어 연기했다고 해도 보는 사람이 이상하다고 느끼면 안된다. 그래서 오히려 철저하게 계산하며 연기하는 배우도 있다.

=그 말에 공감한다. 처음에는 내가 하고 싶은 감정대로 표현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는데, 작품을 하다보니 그런 연기와 톤이 맞지 않는 작품들이 있더라. 사람들이 좀 이상하게 받아들이는 작품들이 있었다. 계산을 하고 어떤 공간에 알맞게 나를 끼워넣는 방식으로 연기해야 하는 작품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만 연기하면 도태될 수도 있다. 정제되지 않은 연기를 해야 할 때도 있다. 그렇게 변주와 변화가 필요하다.

-가장 정제되지 않은 연기를 보여준 작품은 <파수꾼>과 <사냥의 시간>일 테다. 그럼 그 반대편에 있는 작품은 무엇인가.

=<건축학개론>(2012)이 그랬다. 그 캐릭터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표현하는지 일종의 박스 안에 나를 가둬놓고 연기했다. 즐기긴 했지만 더 나아가려고 하지는 않았다.

-이제는 친구가 된 윤성현 감독과는 단지 출세작을 함께했다는 데서 오는 애틋함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감독 윤성현을 지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일단 영화를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 나 역시 그런 인간이기에 잘 맞는다. 영화를 보는 관점도 비슷하다. 난 무엇을 얻기 위해 연기를 한다기보다는 그냥 연기가 꿈이었고 두려움이 있지만 도전의식으로 지금까지 왔다. 그런 부분도 윤성현 감독과 비슷했다. 그래서 내가 따를 수밖에 없고 한편으론 존경할 수밖에 없다. 오랜 시간 계속 같이 가고, <사냥의 시간>도 함께하는 건 그래서다. 배우는 시나리오를 보고 감독이 어떤 연출을 할지 이야기를 듣고 선택하게 되지만, <사냥의 시간>은 달랐다. 윤성현 감독 작품은 그냥 하는 거지, 아마 박정민 배우도 그랬을 거다.

-<사냥의 시간>을 보고, 또 제작 과정에서 있었던 감독의 집요함과 고집에 대해 들으며 요즘 감독 같지 않다고 느꼈다. 트랙이 50개에 다다를 만큼 오디오에 공을 들이고 장소 헌팅을 1년 동안 했던 감독이니까.

=적정 수준의 타협이 필요한데 영화가 추구하는 목표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포기하지 않는 거다. 그 부분에 있어 난 윤성현 감독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그 기준을 맞추는 데 너무 괴롭고 힘들지만 나 자신을 더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감독이 너무 좋다고, 오케이라고 하는데도 내가 더 가는 연기를 해보고 싶다며 고생길을 자처한 적도 있었다. 우리가 꿈꾸는 영화, 서스펜스와 관객이 체험하게 만드는 영화를 목표로 그런 걸 만들고 싶다는 마음으로 몰아붙였다.

-개인적으로는, 정석으로 쓴 시나리오에 좋은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훌륭한 기획영화도 필요하고, 윤성현 감독 같은 방식으로 영화를 만드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맞다. 전자 같은 영화에 나 역시 출연하고 있지만, 양쪽 모두의 영화가 만들어져야 다양한 작품들이 나온다. 그게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실패한 데이터로 인해 투자가 한정된다거나 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안타깝다. 그런 편견을 넘어설 수 있는 작품이 나올 수 있도록 나도 더 열심히 시나리오를 찾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그게 나의 출발점이었다. <파수꾼>과 <사냥의 시간>이 있어서 난 그 결을 갖고 가지를 뻗어나가는 거다. 내가 배우로서 다른 출발을 했다면 지금의 내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배우로 인정받지 못했을 거다. 이건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다.

-양경모 감독, 김유경 대표와 함께 영화 제작사 하드컷을 설립했다.

=나중에 실제 제작에 들어갔을 때 자세히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여러 작품을 두고 준비하고 있다. 촬영이 없을 때는 두분과 만나 어떻게 영화를 만들지 긴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새로운 이야기가 없을까, 소설이나 웹툰, 해외 영화 등 기존에 있는 이야기를 만들 수는 없을까 등 여러 IP를 찾고 있다. 양경모 감독이 주로 시나리오를 쓰고, 나는 어떤 아이템이 있을까, 많이 적어두는 편이다.

-‘플랜비’의 브래드 피트처럼 제작자가 되는 건가. (웃음)

=그렇게 되면 너무 좋겠지. (웃음) 이 일을 하면서 할리우드 배우들이 정말 대단하고 존경스러웠던 게, 주연배우로서 오는 시나리오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더 좋은 이야기가 없나 스스로 찾아다닌다는 거였다.직접 제작자로 나서 더 다양한 영화를 만들고 전체 산업이 건강해지는 것을 보며, 나도 그런 필름메이커가 되고 싶다는 꿈을 꿨다. 혼자서만 생각하던 부분을 20대 초반 독립영화를 하며 만났던 두분과 함께 서로에게 없는 것을 채워주며 일하고 있다. 감독·배우·프로듀서가 있으니까 서로 궁합이 좋다. 첫 작품이 나오는 것을 우리도 고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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