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파도를 걷는 소년'을 보고 남은 의구심에 대하여
2020-06-10
글 : 우혜경 (영화평론가)
그 화해의 제스처, 꼭 필요했나

<파도를 걷는 소년>의 기본 공간 배경은 제주도지만, 주인공인 김수(곽민규)를 중심에 놓고 좀더 세분화해서 살펴보면 크게 세개의 장소, 그러니까 인력사무소, 서핑클럽, 김수의 집으로 구성돼 있다. 그리고 저 너머에 이상향처럼 엄마가 살고 있는 중국, 하이난이 (엽서처럼) 있다. 거친 단순화를 용서한다면 공간적 배경으로만 놓고 볼 때 <파도를 걷는 소년>은 김수가 이 세 장소를 번갈아 헤매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이주노동자 2세인 김수의 세계엔 원래 두개의 장소밖에 없었다. 엄마가 하이난으로 떠난 후, (혹은 그전부터) 김수는 인력사무소에서 일을 받아 외국인들을 불법이주시키고 취업을 알선해주며 수수료를 받아왔다. 그러다 (자세한 이유는 영화 속에서 설명되진 않지만) 어떤 폭력사건에 휘말렸고, 얼마 전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또 다른 장소인 그의 집은 미루어보건대 엄마와 함께 살던 곳인데, 엄마가 떠나간 후 간신히 잠만 자는 곳으로 변해버렸다. 아마도 그는 바로 이 두 장소, 인력사무소와 집을 오가며 살아왔을 것이다. 재판에 넘겨지기 전까지 말이다. 영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인력사무소와 서핑클럽을 오가며

집행유예로 풀려난 후 제주도로 돌아온 김수는 하이난으로 떠난 엄마로부터 혼자 남기고 떠나 미안하다는 짧은 엽서를 받는다. 엽서에는 하이난 해변에서 서핑을 즐기는 서퍼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런데 (제주도) 해변에 앉아 서퍼들을 바라보던 김수의 시선이 엄마의 엽서(속 하이난의 서퍼)로 이어지는 순간, 김수의 삶에 세 번째 장소가 틈입하기 시작한다. 문제는 이 장소가 김수의 소망과는 다르게 자꾸 김수를 밀어낸다는 점이다. 대사가 많지 않은 이 영화는 김수가 왜 문득, 서핑을 하고 싶어 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지만, 분명한 건 서퍼의 모습을 담은 엄마의 엽서, 그리고 거리의 외국인들을 상대로 불법 취업 호객행위를 하다가 똥꼬(민동호)로부터 우연히 받게 된 서핑클럽 ‘블루웨이브’의 전단지가 그를 똥꼬의 서핑 가게로 초대했다는 점이다. 망설이던 김수를 결정적으로 서핑의 공간으로 불러들인 건 집에 돌아가다 쓰레기장에서 우연히 발견한 부서진 서핑보드다. 멈춰 서서 한참을 보드를 바라보던 김수는 이내 결심이라도 한 듯 보드를 주워 오토바이에 싣고 집으로 향한다. 영화 시작 9분여가 지난 이 장면에서 ‘파도를 걷는 소년’이라는 타이틀이 뜬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장소, 진입이 녹록지 않다.

어찌되었든 보드는 구했지만 파도를 탄 적 없는 김수는 어떻게 서핑을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그날 밤, 잠 못 들고 고민하던 김수는 비밀스럽게 숨겨두었던 통을 열어본다. 거기에는 대한민국 여권과 만원짜리 지폐 몇장이 들어 있다. 마치 이 돈으로 서핑을 배울 수 있을지 타진이라도 하는 듯 돈을 바라보던 김수는 고개를 들어 블루웨이브 강습료가 적힌 전단지를 바라보다 밖으로 그냥 나가버린다. 이때 카메라는 김수의 시선 끝에 무엇이 있었는지 꼭 보여주어야 한다는 듯 냉장고에 붙어 있던 전단지를 인서트로 다시 담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다음, 부서진 보드를 청테이프로 대충 둘러붙여 바다로 나가는 김수를 보게 된다. 그나마도 이내 서핑클럽에 속한 해나(김해나)가 두번이나 등장해 그런 보드로, 술을 마시고 파도를 타면 안된다고 김수를 다그친다. 블루웨이브에 와서 제대로 서핑을 배우라는 말이었겠지만 돈이 없는 김수로서는 “여기가 당신들 바다예요?”라고 소리치며 자리를 떠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 말하자면 ‘입장료’ 없이는 들어설 수 없는 공간, 그곳이 김수가 동경하는 ‘서핑의 세계’이다.

그러니 김수의 또 다른 세계, 인력사무소는 서핑의 세계와 대척점에 놓여 있는 공간이지만 동시에 돈을 벌 수 있는 인력사무소가 없이는 서핑의 공간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두 세계는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인력사무소 사장이 시키는 일을 더이상 하고 싶지 않은 김수지만 그렇게 돈을 벌지 않으면 집도, 서핑도 모두 불가능하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대립 양상에 똥꼬가 개입하는 방식이다. 여담인 것 같지만 생각해보아야 할 지점. 똥꼬는 돈이 어디서 났을까? 우리는 서핑클럽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알지 못한다. 영화는 전단지를 돌리면서 회원을 모집하는 똥꼬와 해나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 큰 가게가 운영될 만큼의 회원을 확보했는지, 사람들을 불러모아 나른한 맥주 파티를 열 만큼 수익을 거두고 있는지 거의 설명하지 않는다. 물론 답은 있다. (김수와 달리) 똥꼬는 모아놓은 (혹은 물려받은) 재산이 있어서 ‘취미’ 삼아 서핑클럽을 운영하며 즐기듯 살아가는 것이라고. 김수가 매여 있는 이 메커니즘밖에 존재하는 똥꼬는 이유야 어찌됐든 김수에게 보드를 선물하고, (해나를 통해) 서핑 슈트도 빌려주며, 강습까지 무료로 해준다. ‘엄마-하이난-서핑-블루웨이브’로 이어지는 김수의 연결고리 안에서 서핑은 떠나간 엄마에 대한 그리움의 표현이자 힘든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달콤한 도피의 다른 이름이다. 파도를 타기 시작하게 된 김수는 인력사무소 일은 멀리하면서 서퍼들과 어울리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서핑 실력은 금세 늘지 않고 블루웨이브 일원으로 소속감도 느끼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은 이주노동자 2세인 김수에게 낯선 것이 아니다. 그는 억양도 없이 한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지만 필성(김현목)으로부터 “너도 군대 가?”라는 우스갯소리나 들어야 하고, 인력사무소 사장에게 한국 사람이 아닌 “우리” 같은 사람들은 뭉쳐야 한다는 이야기와 마주해야 한다. 어쩌면 그런 그에게 조건 없(어 보이)는 (그래서 이유를 알 수 없는) 호의를 베푸는 똥꼬와 해나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다.

“여기가 당신들 바다예요?”

필성의 빚을 청산해줄 생각에 김수는 마지막으로 인력사무소 사장으로부터 밀입국 브로커 일을 받는다. 하지만 곧 똥꼬에게 발각되고 이를 저지하려는 그로 인해 결국 일을 그르치고 만다. 그런 일까지 하며 살지 말라고 화를 내는 똥꼬에게 김수는 “우리한테 돈 줄 거예요? 일 줄 거예요? 우리한테 좀 잘해줬다고 지랄하나본데, 다 필요 없으니까 꺼져요!”라고 소리친다. 만약 이 영화의 메시지를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나는 망설임 없이 이 대사를 뽑을 것이다. 거칠고 날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대면해야 할 현실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일을 망치고 인력사무소와 연을 끊은 뒤 배달 일을 하며 지내던 김수가 엄마를 찾아가기 전에 파도를 한번 다시 타고 싶다며, 필성과 함께 어색하고 멋쩍은 얼굴로 서핑 가게에 찾아가 똥꼬에게 고개를 숙이며 “형, 한번만 더 파도를 타게 해주세요”라고 사죄하듯 애원할 때 이 영화가 너무 불편해졌다. 그다음, 하이난으로 간 김수가 전례 없이 밝은 표정으로 일하며 서핑을 즐기는 에필로그 같은 신으로 연결되는데, 이 애원하는 장면이 없어도 아무 문제없이 성립한다. 도대체 이 장면은 왜 필요했을까? 하이난으로 떠나기 전 똥꼬에게 미안함과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서라고 하기엔 둘의 우정이 영화에서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다. 만약 이 억지스러운 화해의 제스처가 우리가 이주노동자들에게 암묵적으로 기대하는 바라면 나는 (김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여기가 당신들 바다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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