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허물 없이 결백한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결백이라는 단어는 어쩐지 불가능해 보인다. 영화 <결백>은 그 냉정한 시험대 위에 주인공 정인(신혜선)을 올려 보낸다. 폭력적인 아버지와 남동생을 우선하는 어머니에게 실망해 고향 마을에서 야반도주했던 장녀가 유능한 변호사가 되어 돌아온다. 우연히 뉴스 화면에서 살인 용의자로 몰린 엄마의 모습을 목격한 탓이다. 치매로 자신도 알아보지 못하는 화자(배종옥)의 무죄를 밝히고 싶은 정인은 그러나 사건을 추적해갈수록 원치 않던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정의와 비밀 사이에서, 그리고 결백 앞에서 그는 이제 자신만의 선택을 내려야 한다. 오랜 시간 충무로 현장을 경험한 박상현 감독이 만든 첫 장편영화 <결백>은 혈연관계의 애증과 고착, 사적 복수라는 끈끈한 감정들에 기반해 법정 스릴러의 장르적 묘미를 추구하는 안정적인 솜씨를 보여준다.
-<결백>은 모녀의 드라마를 중심에 놓고 사법적 정의와 사적 복수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시나리오를 어떻게 구상하게 됐나.
=유능하고 죄에 예민한 변호사가 살인 용의자로 몰린 엄마를 다시 만나게 되는 상황, 그 컨셉이 품고 있는 아이러니에 동했다. 한명의 개인, 여자로서의 엄마를 알게 되어가는 딸의 이야기이고 선택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정인은 엄마의 사건을 맡게 되면서 자신의 행동, 변론 모든 것에서 선택을 해야만 하고 그동안 자신이 믿었던 신념이란 무엇인가 질문하게 된다. 시나리오를 준비하면서는 지방 소도시, 혹은 농촌에서 자주 벌어지는 독극물 사건 위주로 기사를 많이 찾아봤다.
-임상수, 최호 감독 등과 함께하면서 조감독과 프로듀서를 두루 거쳤다. 토니 길로이 감독의 <본 레거시> 조감독 이력도 독특한데.
=천리안 시절 영화사 마케팅 인력을 구한다는 공고를 보고 대뜸 영화 <정사>를 만든 나인필름에 들어갔다. 22살이었고 아무것도 몰랐다. 그때 지금 영화사 봄의 오정완 대표, 영화사 집의 이유진 대표를 알았고 조금씩 발을 넓혀가며 이런저런 일들을 했다. <눈물>에서 제작부 일을 돕고, <반칙왕>에서 메이킹 필름을 찍는 식으로…. 그러다 단편 <스탠드업>을 30대 초반에 찍었는데 운좋게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상을 받아서, 곧 장편 데뷔도 할 줄 알았다. (웃음) 데뷔가 계속 미뤄져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제안을 받아 프로듀서로도 데뷔했고…. <본 레거시>는 한국 촬영 조감독을 제안받고 바로 수락했다. <돌로레스 클레이븐> 등 토니 길로이의 작가적 재능을 이전부터 좋아했다.
-오프닝 시퀀스가 몰입감을 준다. 장례식이 열린 화자의 집으로 들어가서 농약 탄 막걸리를 마신 사람들의 소동을 끊김 없이 보여주는 과정이 롱테이크로 전개된다.
=스테디캠 촬영은 야심을 가지고 준비했다. 시나리오 초고부터 구상했던 부분이다. 아무렇지 않은 일상적인 풍경, 그 흐름 속에서 갑자기 어떤 파국이 솟아오르는 순간을 보여주고 싶었다. 정확히는 4컷으로 쪼갰는데 이후 CG로 이어붙였다. 모든 사건들이 벌어지는 시작 지점이고, 주요 등장인물들이 쭈욱 소개된다. 이 오프닝 시퀀스는 고향 집 헌팅부터 촬영 시기와 날씨, 대사 타이밍과 러닝타임, 조명, 보조출연자 캐스팅까지 꼼꼼하게 준비하고 동선 리허설에도 신경 썼다. 많은 것들을 미리 시뮬레이션해서 그런지 나름 만족스럽게 나온 것 같다.
-가정폭력으로 고향을 떠났다가 유능한 변호사가 되어 돌아온 딸 정인, 원한을 품고 있는 피고인 화자, 그리고 이들을 지켜보는 판사가 모두 여성이다. 반면 음모를 꾸미는 추 시장(허준호)과 기득권을 잡고 있는 일당은 모두 남성이라 가부장제의 균열에 대한 해석도 가능해진다.
=남성 대 여성의 젠더 이슈화는 의도치 않았던 부분이다. 요즘은 여성 주연의 영화들이 많이 제작, 개봉되는 상황이지만 내가 트리트먼트를 쓰기 시작한 2015년에는 여성 주연의 영화가 전무할 정도였다. 작품을 끌고가는 인물들에 차별성을 두자는 생각에서 새로운 형태의 추적극을 구상했다.
-법정 드라마, 범죄스릴러 등 장르 면에서 레퍼런스 삼은 작품이 있나.
=<마더>(감독 봉준호)의 플롯, <뮤직박스>(감독 코스타 가브라스)의 스토리, <그을린 사랑>(감독 드니 빌뇌브)의 정서. 이렇게 세 가지를 염두에 뒀다.
-비밀 속에 숨겨진 복잡한 혈연관계, 거기에 얽힌 끈끈하고 지독한 감정들이 <그을린 사랑>과 닿는 부분이 있다고 느껴진다.
=특히 모성애에 관해선 시나리오를 쓸 때 개인적인 사연도 있었다. 시나리오를 쓰던 무렵에 어머니가 창문에 방한지를 붙이다 떨어져서 갈비뼈 네개가 부러졌다. 낮에는 병원에서 간호하고 밤에 집으로 돌아가서 시나리오 쓰면서 처음으로 엄마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이전까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고, 그때 내 나이가 마흔이 넘었었다. 그동안 엄마 개인에 대해 생각을 전혀 안 해본 거다. 이번 영화는 그 엄마라는 존재에 현미경을 대보고 싶었던 작업이다.
-정훈희의 <꽃밭에서>가 중요한 설정으로 쓰인다. 1979년에 처음 발표된 노래로 아는데, 실제로 내 어머니도 종종 흥얼거린다.
=초고엔 <메기의 추억>이었는데 시나리오를 고치다가 문득 어릴 때 어머니가 흥얼거렸던 이 노래가 떠올랐다. 엄마의 흥얼거리는 목소리, 그리고 그 가사를 곱씹어서 생각해보니 영화 속 화자의 상황과 절묘하게 맞더라.“이렇게 좋은 날에~ 이렇게 좋은 날에~”라는 노랫말이 주는 반어적 의미를 살려 장면을 설계하기도 했다. 영화 엔딩의 촬영지인 저수지를 찾을 때도 <꽃밭에서>와 정서가 맞는 곳을 찾고 싶었는데, 로케이션 헌팅을 가다가 정말 우연히 발견해서 차를 급하게 세우고 뛰쳐나갔다. (웃음)
-신혜선 배우의 다부진 연기력을 다시 확인하게 되는 작품이었다. 주요 대사가 나오는 타이밍에 딱 맞춰 음악을 끊고, 클로즈업으로 배우의 연기를 강조했는데.
=법원 앞에서 비 맞으면서 상대편 부장검사를 향해 “내가 결백을 증명할게”라고 말하는 장면은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예고편에서 잘라 쓰려고 힘을 줬다. 마케팅도 경험해본 이력이 이렇게 나온 걸까. (웃음) 실제 촬영은 나와 촬영감독이 같이 비를 맞으면서 배우 옆에 바싹 붙어서 매우 세심하게 조율해가면서 찍었다. 법정에서 추 시장을 몰아붙이는 장면도 개인적으로 신혜선 배우에게 놀랐던 순간이다. 허준 호 배우와 얼굴을 맞대고 기싸움해야 하는 장면이라 긴장될 법도 한데 카메라가 돌아가면 강단 있게 치고 나가는 에너지가 대단했다.
-배종옥, 허준호라는 두 베테랑의 현장 분위기가 어땠을지 궁금해진다.
=1988년 <칠수와 만수> 때부터 배종옥 배우의 팬이었다! 배종옥 배우는 이번 영화를 위해 하루 두 시간씩 특수분장을 하고 급성치매를 앓는 인물을 표현하기 위해 초점을 약간 흐릿하게 보이도록 하는 인공렌즈도 착용했는데 그 부분이 감독으로서 미안했다. 현장에서는 베테랑들을 ‘인생 1회차’ 같은 표현과 비슷하게 ‘한 바퀴 돌았다‘고 표현하던데, 종옥 선배님은 두 바퀴는 돌고 온 분이다. (웃음) 모니터링 중에 내가 놓친 부분까지 세세히 발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허준호 배우는 추인회의 자세, 걸음걸이, 얼굴의 큰 점까지 상당 부분을 직접 만들었다. 덕분에 단순한 악인이 아닌, 어딘가 더 비릿하고 입체적인 인물이 완성됐다.
-영화계에서 오랜 시간을 버티면서 준비해둔 아이템도 많을 듯하다.
=그렇다. 일단 차기작으로 생각 중인 건 질주 본능이 솟아오르는 액션 무비다. <매드맥스> <스피드> <공포의 보수>를 레퍼런스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