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한동안 영화가 없어 난감했는데 문득 주변을 돌아보니 도처에 영화가 있다. 영화의 물리적 조건은 점차 고립되고 단절되어 끝내 정지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다양한 실천이 이어지고 있다.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나의 실천에 대해 고백해보았다.
잇고, 흐르고, 새로 쓰이다
다시, 코로나19 시대의 이야기다. 질릴 법도 하지만 이건 이야기책의 문을 여는 ‘옛날 옛적…’이란 문구처럼 당분간 주변을 배회할 것 같다. 변화는 우리의 인지 바깥에서 사고처럼 닥쳐왔고, 사람들은 이제야 당도한 미래에 간신히 적응 중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 시대의 스크린 문화, 미학으로서의 영화는 시대의 분기점에서 생존을 위한 여러 가능성을 두드리고 있다. 그중에서도 당면한 근본적인 변화는 바로 공간의 제약이다. 촬영, 상영 등 물질적 조건 이외에도 넓게는 상상력의 창조, 미세하게는 카메라의 위치까지 영화는 공간을 점유하며 운동한다. 하지만 이 운동 과정 자체를 원천적으로 봉쇄당한 지금, 영화라는 행위는 정지하는가. 그렇지 않다. 물길을 막으면 새로운 길이 뚫리는 것처럼 운동은 지속된다. 어떤 의미에서 지금은 초창기 영화의 탄생처럼 가능성으로 가득 찬 분기점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금부터 시작할 이야기는 단절된 것처럼 보였던 각각의 신호들을 이어나가는 이야기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 시간을 거슬러갈 수 있었던 무빙 이미지처럼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미래, 현재, 과거 세편의 영화를 차례로 살펴보려 한다. 이것은 코로나19 시대에 엮어낸 나의 이야기다.
압도하는 영화, <테넷>
코로나19 사태를 소재로 한 영화부터 폐쇄된 공간을 이어 붙이고자 하는 실험적인 다큐멘터리까지, 다양한 시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 중이다. 그 와중에 크리스토퍼 놀란의 <테넷> 예고편을 보고 문득 이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의 지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테넷>의 예고편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 의외로 밋밋하기까지 하다. 3차 세계대전을 막기 위한 첩보활동을 벌이는 인물들의 활약이 뼈대를 이룬 이야기는 이미 닳고 닳은 소재인 데다 그간 한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이미지 같은 것도 없다. 하지만 그 앞에 놀란의 이름표를 붙이고 나면 사정이 달라진다. 이 영화는 분명 크리스토퍼 놀란의 “가장 야심찬 작품”이 될 것이다.
두 번째 예고편 말미 존 데이비드 워싱턴이 “비행기를 추락시킨다고?”라고 묻자 로버트 패틴슨은 “하늘에서 말고. 그건 너무 과해”라고 답한다. 바로 이어 보잉 747기가 폭파되는 장면이 교차편집되고 다시 존 데이비드 워싱턴이 “크기는?”이라고 묻자 로버트 패틴슨은 이렇게 마무리한다. “바로 그 부분이 조금 과하지.” 이 자전적인 농담 같은 사족은 놀란 영화의 본질을 짚고 있다. 블록버스터의 총아로서 놀란은 거대한 사이즈로 위력을 과시하는 감독처럼 소비된다. 사람들은 <테넷>에 제작비가 2억달러 들었고 100%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했으며 심지어 아이맥스로 핸드헬드 방식의 촬영을 했다는 사실에 마니아들은 열광한다. 보잉 747기를 실제로 폭파시켰다는 에피소드에 이르면 ‘역시!’라는 경탄과 함께 놀란의 남다른 면모에 박수를 친다. 왜 실제 비행기를 폭파시켰어야 했는지, 그로 인해 얻어지는 질감이 CG를 사용했을 때와 뭐가 다른지는 사실 큰 관심사가 아니다. 뭔가 다르다는 인상을 남기는 것이 이 마케팅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러한 연출방식, 접근태도는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놀란의 답변이기도 하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시간을 탐닉해온 연출자다. 사건을 거꾸로 돌린 <메멘토>(2000), 꿈속의 시간의 흐름을 달리 가져갔던 <인셉션>(2010), 블랙홀을 매개로 과거와 현재의 시공간을 연결시킨 <인터스텔라>(2014), 서로 다른 3개의 시간 축을 병렬로 구성한 <덩케르크>(2017)까지 그는 영화가 시간을 내러티브화하는 방식을 꾸준히 탐구해왔다. 신작 <테넷>에선 부분적으로 시간의 구간을 역행한다는 아이디어를 직접 이미지화한다. 아마도 ‘인셉션’이 꿈속에 침투해 생각을 심는다는 행위를 직접 묘사한 단어였듯 ‘테넷’도 핵심 아이디어를 직접 설명하는 제목일 것이다. 놀란은 늘 심플하다. 얼핏 복잡하고 어려워보이는 건 단지 시간 축에 대한 발상이 낯설기 때문이다. 퍼즐 같은 시간 블록들을 선형적인 인과순으로 다시 정리하고 나면 아주 간결하고 짧은 이야기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는 스토리, 다시 말해 이야기의 덩어리를 전달하기 위해 영화를 찍는 게 아니다. 놀란의 정수는 이야기의 구성방식에 있다. 그는 영화가 시간을 어떻게 압축하고 재조립해 또 다른 시공간을 창조해내는지를 파고든다. 그런 의미에서 <테넷>의 진짜 야심은 195분에 달하는 상영시간에 있다. 그리 복잡하지 않을 게 분명한 이야기를 3시간 넘게 펼쳐낸다는 건 이야기 이상의 무언가를 전달하고자 한다는 뜻이다. 때론 그것이 거대한 스케일의 화면일 수도 있고 관객과의 퍼즐 게임일 수도 있다. 어떤 방식이건 놀란의 영화는 거대한 사이즈, 요컨대 아이맥스라는 시각적 접근와 상영시간이라는 물리적 접근을 통해 관객을 압도한다. 그리고 그것은 고스란히 극장이라는 공간이 주는 특질과 연결된다. 놀란의 내러티브가 영화가 오랫동안 축적해온 시간의 개념을 뒤틀며 유희한다면, 놀란의 형식은 극장이라는 공간의 성격을 구체화한다. 현실과는 또 다른 시공간을 창조해 대상을 압도하는 거대한 체험으로서의 영화. 아마도 <테넷>은 코로나19 시대의 영화, 특히 영화관에서의 영화를 대표하는 사건이 될 것이다. 놀란의 서사는 이야기(story)보다 전달방식(telling)에 집중해왔고 <테넷>은 어쩌면 놀란식 스토리텔링의 정점에 놓일 ‘야심찬’ 영화다. 코로나19 시대 한복판에 이런 영화의 도래를 기다린다는 건 실로 공교로운 일이다. 대중상업, 규모의 경제 한복판에서 구현되는 영화-극장이라는 물질적 조건의 교차. 상황의 단편들을 연쇄시켜 시공간을 창조해내는, 지극히 고전적인 편집에 기초한 놀란의 영화가 기다려지는 이유다.
오래된 기차역에서 마주한 현재, <반쪽의 이야기>
극장에서 어깨를 맞대고 영화를 관람하기 쉽지 않은 현재, 세간의 관심은 OTT 플랫폼이 편안하게 실어나르는 콘텐츠들에 쏠려 있다. <뉴욕타임스>가 올해 상반기 베스트영화 중 하나로 앨리스 우 감독의 <반쪽의 이야기>를 꼽은 건 이러한 추세가 반영된 결과다. <반쪽의 이야기>는 여러모로 영리한 영화다. 용돈벌이를 위해 러브레터 대필을 하던 엘리(레아 루이스)가 성장해가는 이야기는 낡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낯익다. 분위기는 90년대 로맨틱코미디의 전형을 빌려왔고 미국의 시골 고등학교의 풍경도 세트장이 아닌지 의심될 만큼 유사한 이미지를 반복한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주인공이 있고, 직진밖에 모르는 남자가 있으며, 미스터리한 분위기의 인기 여학생이 있는 인물 구도도 빤하기 이를 데 없다. 언어적 감수성이 뛰어난 주인공의 입을 빌려 한편의 에세이를 읽는 듯한 유려한 내레이션도 90년대 로맨틱코미디의 대표적인 패턴 중 하나다. 하지만 이 익숙한 재료를 다듬어나가는 솜씨가 실로 만만치 않다. 개별 상황의 감정선을 살리는 디테일도 좋지만 이 낡고 평범한 성장드라마가 전혀 다른 질감으로 도약하는 건 인물과 이야기의 관계를 설정하는 공평한 시선에서 비롯된다.
엘리는 성적이 좋고 모범적인 학교생활을 하지만 친구가 거의 없다. 사귀지 못한다기보다는 의지가 없다고 보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엘리에게 친구들은 대화 상대라기보다는 비즈니스 고객에 가깝다. 엘리는 숙제를 대신해주면서 용돈을 버는데 어느 날 숫기 없는 직진남 폴(대니얼 디머)이 짝사랑하는 여학생 애스터(알렉시스 러미어)에게 보낼 편지를 대신 부탁한다. “요즘 세상에 누가 편지를 써?”라는 엘리의 말처럼 이건 작위적이고 낡은 방식이다. 하지만 편지로 마음을 전한다는 건 뒤집을 수 없는 대전제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아니 이런 장르의 영화들은 세간의 속도(이를테면 SNS로 감정을 소비, 전시하는)와는 다른 속도로 걸으면서 길가에 핀 들꽃 앞에 머물도록 유도하는 이야기를 따르기 때문이다. 때때로 오래되고 낡은 것들은 시간에 빛바래지 않는 가치를 지닌다. 엘리의 아버지가 역장으로 있는 외딴 기차역처럼 말이다. 엘리의 아버지는 전력회사에서 자신의 발음을 알아듣지 못한다며 항의전화도 하지 않지만 엘리는 “시도는 해봤어요?”라고 물어보면서도 아버지를 고치려 하진 않는다. 아버지가 일하는 외딴 기차역의 꽉 찬 풍경은 엘리의 이러한 태도 덕분에 지켜지고 채워진다. <반쪽의 이야기>는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되지만 분명히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작은 톱니바퀴들을 되새기는 영화다.
요즘 누가 편지를 읽느냐는 엘리의 반문은 이렇게 바꿀 수도 있겠다. 요즘 세상에 누가 이야기를 보느냐고. <반쪽의 이야기>는 엘리가 쓰는 연애편지의 멋들어진 멘트를 아버지가 보는 빔 벤더스 영화의 대사에서 인용한다. 오래된 이야기 같은 건 없다. 아직 접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있을 뿐이다. 겉으로 볼 때 <반쪽의 이야기>는 트렌드를 적절히 갈아입은 넷플릭스표 상품이다. 아시아계 퀴어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건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이후 이어지는 아시아계 주인공 서사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최근 하이틴 로맨스 드라마를 대표하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P.S. 여전히 널 사랑해>의 패턴의 연장선에 있는 이 영화는 그 밖의 트렌드들도 적절히 교배, 반영했다. 집단에서 겉돌고 소통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는 인물들이 서로 교감하는 과정은 사이코패스의 연애담을 그린 <빌어먹을 세상따위>를 닮았고, 화려해 보이지만 내적 방황을 억누르고 있는 애스터의 홀로서기는 영화 <레이디 버드>를 연상시킨다. 요컨대 <반쪽의 이야기>가 레퍼런스로 삼고 있는 것은 옛것만이 아니다. 언제나 통하는 구성을 뼈대로 삼아 최신의 트렌트를 적극 반영하여 옷을 입되 전형적이지 않은 언어를 찾아내는 것, 앨리스 우 감독은 공감의 조건을 꿰뚫고 있다. 멜로드라마 장르의 틀 안에서 자신의 언어를 발견해낸 더글러스 서크처럼 앨리스 우는 하이틴 로맨스의 패턴 아래에서 자신의 말을 풀어놓는다.
“이건 연애 이야기가 아니”라는 엘리의 내레이션처럼 <반쪽의 이야기>는 연애를 포함해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따라가는 성장담이다. 자신의 반쪽을, 결핍된 마음의 조각을, 이해해줄 동지를, 불안한 미래를 더듬어나가는 과정은 목적지가 아닌 현재진행형으로 재현된다. 영화는 흘러가는 상태, 단절되었던 인물들이 대화를 하며 서로의 간격을 좁히는 시간 그 자체를 차곡차곡 쌓아나간다. 영화 중반 벽에 금이 간 5개의 선을 놓고 엘리와 애스터는 서로를 향한 메모지처럼 활용한다. 5개의 선이 그림이 되고, 메시지가 더해져 결국엔 추상예술로 이어질 때 이들의 관계는 완전히 변화한다.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완성된 예술품, 그림이 아니라 그사이 두 사람이 나눴던 교감의 시간이다. 결국 벽의 낙서를 지우듯 그림은 지워지고 “아름다운 건 결국 전부 망가져”라는 문구를 남기지만 두 사람은 이미 알고 있다. 그림은 다시 그릴 수 있지만 시작하지 않으면 탄생하지 않는다는 진실을 말이다. 그것을 깨닫고 교감하고 실천할 때, 새는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간다.
<반쪽의 이야기>는 엘리의 내레이션으로 전개되지만 상대를 함부로 판단하거나 결정짓지 않는다. 폴은 “사랑은 노력하는 것”이고 데이트는 “감자튀김을 하나 더 시켜 먹는 것”이라며 단순 직진하는 남자지만 엘리는 그러한 폴의 입장을 폄하하지도 가르치려 들지도 않는다. 애스터 역시 마찬가지다. 엘리는 모자란 것 없이 주목받는 것처럼 보이는 애스터의 깊은 외로움에 공감하며 비밀을 나누듯 마음을 쌓아나가지만 아무리 서로 비슷해 보여도 결국엔 다름을 확인한다. 이렇듯 영화는 얼핏 엘리 중심으로 재편하고 캐릭터를 소비시키는 것 같지만 실은 자신과 다른 길을 걷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손 흔들어 떠나보내주는 구성이다. 각각의 캐릭터에는 각각의 이야기가 존재한다. 다만 내(엘리)가 선 자리에서는 미처 다 보이지 않을 뿐이다. <반쪽의 이야기>는 일련의 과정을 해피엔딩이라는 결말을 위한 과정으로 소비시키는 대신 지금 현재를 지속함으로써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캐릭터를 이야기의 기능으로 소비하지 않고 각각의 레일 위를 달리다 잠시 머무는 기차역, 그 기차역의 소소한 풍경 같은 순간들을 삽화집처럼 쌓아나가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비현실적이고 기능적으로 보이는 이는 엘리의 아버지 정도다. 엘리의 아버지만큼은 현실감각 없는 일종의 상황처럼 제시되는데 한편으론 그 초연한 태도가 흘러간 것, 지나간 것이라고 인식되는 것들을 대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종종 과거의 영화들을 익숙하고 낡은 것, 혹은 지금 감각에 맞지 않는 것이라며 관심을 두지 않는데 그 와중에 중요한 것이 사라지기도 한다. 엘리의 아버지가 기능적이라면 항상 같은 자리에 머무는 기차역처럼 언제든 이야기를 다시 들려줄 수 있는 역할로서의 기능이다. 적어도 영화에서는 아버지의 이야기-인생이 이미 종료된 것처럼 묘사되는데, 아버지가 즐겨 보는 영화들 속에서 길을 발견하는 엘리처럼 실은 이야기는 늘 새롭게 발견될 수 있다.
각자의 이야기를 찾아서
약간의 낭만을 보태 표현하자면 영화와의 만남은 타이밍이다. 어떤 순간, 어떤 영화를, 어떤 형태로 만나느냐에 따라 영화와 나 사이의 운명이 바뀐다. 코로나19 시대는 역설적으로 이 만남의 기회를 무제한으로 제공해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코로나19 시대는 신작, 새로운 것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준 것일까. 때 맞춰 끼니를 챙겨먹듯 제공되는 신작들을 관람하는 대신 이미 지나가버린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운명 같은 만남을 발견해나가야 하는 상황이 도래했다. 플랫폼은 알고리즘을 통해 내 취향마저 안내해주지만 결국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건 자신이다. 다만 기왕에 영화와 나 사이의 이야기를 쓸 요량이라면 일방적으로 한쪽으로 쏠린 걸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믿게 되어 있기에, 편향되지 않은 서사를 써내려가기 위해서는 약간의 균형감각과 수고가 필요하다. 넷플릭스의 알고리즘은 <반쪽의 이야기>를 본 나를 <지랄발광 17세>로 이끌었지만 내가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떠올린 건 스튜디오 지브리의 곤도 요시후미 감독이 연출한 <귀를 기울이면>(1995)이었다. 중학생 3학년 시즈쿠의 풋풋한 연애와 진로에대한 고민이 뒤섞인 이 잔잔한 애니메이션은 연애물이자 성장담이며 정체성을 찾아나서는 모험극이다. 무엇보다 이것은 이야기(소설)를 자아내는 이야기, 누군가의 이야기(삶)를 대면하는 이야기, 그리고 이야기의 본질로 회귀하는 이야기다. <귀를 기울이면>을 지금에 와서 다시 꺼내본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것을 회상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반쪽의 이야기>에서 <귀를 기울이면>으로 이어지는 ‘나의 서사’는 이제 완전히 새로운 관계로 탈바꿈한다. 그렇게 자신만의 이야기와 경험을 쌓아간다는 건 결국 다른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과정과 겹친다. 코로나19 시대, 영화로부터의 단절과 격리는 거꾸로 우리로 하여금 영화/이야기를 향한 모험과 발견을 부추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