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토피아로부터]
기억하지 않는 고통
2020-06-17
글 : 이동은 (영화감독)
일러스트레이션 : 박지연 (일러스트레이션)

건강검진을 받던 날, 위 수면내시경 검사를 하기 위해 검사실 안으로 들어갔다. 간호사가 손등에 진정제 주삿바늘을 꽂으며 설명을 했다. 바로 앞에 내시경 호스가 보였다. 저게 입을 통해 몸속으로 들어가는구나. 검은 색깔부터가 두렵다. 입으로 들어가는 건데 이왕이면 초록색이나 딸기셰이크 같은 분홍색으로 만들 순 없을까, 라고 생각하는 순간, “일어나세요” 하는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깜빡 잠이 든 것 같은데 벌써 끝나다니. 아니 내가 진짜 검사를 받긴 했었나? 기억이 없으니, 마치 시간을 건너뛴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수면내시경은 사실 잠든 상태가 아니라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진행된다고 한다. 따라서 검사 중에 말을 걸면 대답도 한다. 의식이 깨어 있음에도 약물에 의해 진정된 상태기 때문에 이물질이 들어와도 스트레스를 크게 느끼지 않는다. 다만 약물의 특성상 망각이라는 부작용 덕분에 당사자는 ‘쭉 잤다’고 느낄 뿐, 검사 당시를 기억 못한다. 그래서 통상 수면내시경으로 부른다.

스티븐 킹의 단편소설 <조운트>에서 인류는 조운트라는 포탈을 통한 순간이동 기술로 화성까지 여행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조운팅에는 반드시 여행 전 마취를 해야 한다는 조건이 따른다. 물리적으로는 한순간에 시공간 이동이 완료되지만 마취를 하지 않으면 의식은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영원에 가까운 시간은 고통이다. 약물의 도움 없이 위내시경 검사를 받는 시간이 그러하듯이.

<5억년 버튼>이라는 제목의 일본 단편 만화가 있다. 주인공은 누르면 5억년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버튼을 마주한다. 단, 조건은 그 긴 시간 동안 무간지옥이나 다를 바 없는 공간에서 홀로 의식이 있는 채 버텨야만 한다는 것. 그렇게 5억년을 버티고 나면 버튼을 누른 바로 뒤 현실로 돌아오게 되며, 그와 동시에 자신이 경험한 5억년의 기억은 사라진다. 그 대가로 100만엔을 받을 수 있다는 제안에 주인공은 선뜻 버튼을 누른다. 길고 긴 시간 동안 주인공은 지겨움과 외로움, 고통의 극한을 체험하고 해탈에까지 이르지만,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땐 버튼을 누르기 바로 전 0.5초의 기억밖에 없다. 수면내시경 원리처럼 자신이 경험한 시간과 고통을 기억하지 못한 주인공은 자신이 이미 버튼을 한번 눌렀다는 사실을 모른 채 다시 버튼을 누르고 만다.

버튼을 누르기 전 주인공은 고통을 수반하는 기억은 차라리 삭제되는 편이 나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고통의 기억이 있었다면 이 이야기는 비극으로만 끝나지 않았을 일이다. 2020년이 절반 가까이 지났다. 그 절반에는 힘든 기억이 많은 듯하다. 기억의 말소를 통해 올 상반기를 그냥 ‘순삭’해버리고 싶은 마음도 들지만 어쩌면 고통은 고통을 기억하지 않아서, 고통을 너무 빨리 잊어서 다시 찾아오는 것 같기도 하다. 사라질 듯 또다시 번지는 코로나19와 인종차별 문제를 보며 고통의 기억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고통의 기억은 또 다른 고통을 예방한다.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