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런트 라인]
콜라주 영화로서의 '침입자'와 '프랑스여자'
2020-06-24
글 : 김소희 (영화평론가)
[김소희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기억과 장소에 관한 이야기로 <침입자>와 <프랑스여자>를 나란히 들여다보았다. 두 영화의 결말에 관한 누설이 있음을 밝혀둔다.

궤적이 영화를 지탱할 때

<침입자>

손원평 감독의 장편 데뷔작 <침입자>에 관한 주된 반응은 잘 진행되던 서사가 중·후반부에 이르러 무너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응은 영화가 스릴러에 기반을 둔 장르영화임을 전제한다. 스릴러영화로서의 <침입자>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이 영화가 스릴러영화와는 다른 시작을 보여준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영화는 서진(김무열)의 시선에 과도하게 기대면서도 그를 의심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자신이 유진(송지효)이라 주장하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에 맞춰진 스릴러의 초점을 분산시킨다. 서사가 진행되는 중에도 ‘이 모든 것이 서진의 과대망상이 아닌가’라는 의문은 끈질기게 따라붙는다. 무엇보다 서진의 아내 실종 사건과 동생 유진의 귀환이 맞물리기 이전에, 서진의 기억을 통해 둘의 관련성이 처음으로 암시되었다는 점이 특히 의심스럽다. 서진은 뺑소니 범인을 찾기 위한 최면 치료 도중 동생을 잃은 과거의 기억과 마주한다. 그렇다면 서진은 예지몽을 꾼 것일까. 혹은 조작된 기억으로 인한 망상에 불과한 것일까. 영화는 끝까지 답을 명확히 정리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것도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 책임 회피의 결과이거나, 모호함을 의도한 장르적 제스처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전에 나온 비슷한 서사들을 느슨하게 참고하되 다른 선택의 방식을 탐색하고 있으며 그것이 곧 영화의 주제와 맞물린다. 영화가 주는 기시감을 차용과 변용을 통한 콜라주 영화, 전환적 모자이크 영화의 흔적으로 읽어보려 한다.

<침입자>의 서사는 갑자기 나타난 동생 유진의 정체성을 의심하고 그가 누구인지를 파악해가는 서진의 이야기로 요약된다. 미스터리한 여성을 추적하는 남성 관점의 이야기가 드문 것은 아니나, 그중에서도 변영주 감독의 <화차>(2011)는 비슷한 이야기 구조 속에 각각의 선택과 차이가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적절한 비교 대상이다. <화차>에서 문호(이선균)는 결혼을 앞둔 약혼자 선영(김민희)이 휴게소에서 갑자기 실종된 뒤 그가 알아온 존재가 허상이었음을 깨닫는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낯설어지는 <화차>와 달리 <침입자>에서 25년 만에 나타난 동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낯선 사람일 뿐이다. 두 영화의 주인공은 사라짐과 귀환이라는 대조적인 상황을 마주하고 있지만, 그들이 마주한 여성이 누구인지를 스스로 파악해야 하는 공통의 과업을 지닌다.

계급 욕망이 사라진 이후의 카오스

두 영화에서 가장 첨예한 부분은 여성 캐릭터를 어떻게 퇴장시킬까를 둘러싼 선택과 판단이다. 선영과 유진은 공히 추락의 운명을 맞는데, 추락의 장소와 그것을 보여주는 방식은 대비된다. 선영이 살인을 저지른 주된 원인에는 자본과 계급 상승의 욕망이 깔려 있다. 추락하기 직전 경찰의 추격을 피해 백화점 에스컬레이터와 계단을 오르는 장면은 선영의 욕망을 직접 보여주는 장치다. 추락 장면은 롱숏과 클로즈업을 통해 배경 속의 인물과 인물의 표정을 두루 비추며 자세히 시각화된다. 반면 <침입자>에는 현대 스릴러의 무대라고 하기에는 낯선 바위산이 배경으로 등장하며, 추락 장면은 기이할 정도로 생략된다. 추락하는 유진을 직접 보여주는 장면은 단 한숏뿐이다. 서진의 눈에서 멀어지는 유진의 정면 얼굴 부감숏을 제외하고는 서진의 시선 바깥에서 추락하는 유진의 모습을 담은 비인칭적 숏은 제거되어 있다.

생략된 추락의 순간은 추락 그 자체를 의심의 대상으로 만든다. (유진은 정말 추락한 것일까.) 이와 함께 상승이라는 대조적인 의미망 역시 위태롭게 만든다. 유진의 추락은 상승을 꿈꾸는 추락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녀 안에서 상승과 추락은 결국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그녀에게 상승이란 어릴 적 오빠의 손을 놓쳐버린 순간에 하늘로 떠오르던 풍선의 궤적 같은 것이다. 풍선의 맥락에서 볼 때 극단적인 상승은 결국 존재의 사라짐을 의미한다. 서진이 절벽에 매달린 유진의 손을 다시 한번 놓치는 결말은 과거의 기억을 상하 반전시킨 채 반복하는 것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이제 상승이냐 추락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지지기반으로서 땅을 소유할 것인가에 있다. 이때 땅은 매끈한 표면이 아니라 서진의 기억 속에서 액체의 표면처럼 왜곡된 어지러운 곡선의 움직임이거나 혹은 유진이 발 딛고 선 가파른 산 위의 돌과 같은 형태로 위태롭게 존재한다.

영화가 외딴곳에 독채로 자리한 ‘집’을 주된 공간으로 삼은 것도 상승과 추락이라는 극단 대신 단단한 평지에 대한 갈망이라는 소망을 반영한 결과로 보인다. 건축가 서진이 부모님을 위해 지은 이층집에서도 상승의 의미는 위협받는다. <침입자>의 집은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 속 이층 가옥을 느슨하게 참고한 것처럼 보이는데, 두 작품의 공간을 비교할 때 각각의 특징이 두드러진다. <하녀>의 가옥 구조에서 1층은 병약한 아내(주증녀)와 보조 기구의 도움 없이는 걸을 수 없는 딸의 공간이다. 이들에게 2층은 일종의 한계가 된다. 아내는 2층에서 이뤄지는 남편(김진규)의 사적인 관계를 통제할 수 없고, 딸은 동생의 놀림을 견디면서도 한발 한발 내딛어야 하는 수치의 장소다. 각자의 욕망을 지닌 채 계단을 올랐던 하녀(이은심)와 경희(엄앵란)는 추락하거나 모욕을 받으며 욕망을 처벌받는 공간이다. 반면 <침입자>에서 계단은 1층과 2층을 잇는 층계라는 사실 외에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휠체어에 의지해 생활하는 서진의 어머니 윤희(예수정)는 <하녀> 속 모녀가 지닌 장애를 연상시키나, 그들과 달리 윤희는 2층에 오를 이유가 별로 없다. 그보다는 유진이 데려온 보조사 덕분에 장애가 비정상적인 활기의 요소로 전환되는 순간도 있다. 2층의 서진은 창문을 통해 다른 가족들을 내려다보는 것으로 자신의 위치를 표시하려 하지만, 마당에 있던 유진이 모든 것을 꿰뚫고 있다는 듯 서진을 올려다보면서 시선의 우위는 유지되지 못한다.

소파가 놓인 1층 거실에 서진을 제외한 모든 거주자가 한데 모여 있는 광경은 감시의 전환을 명시한다. 서진이 집 안에 들어섰을 때 가족들은 마치 서진을 위한 포즈를 취하듯 각자의 위치에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이들이 어색해 보이는 건 그들이 딱히 그곳에 모여 있는 이유를 찾을 수 없다는 데 있다. 보통 시선이 모이는 거실 벽 한가운데에 텔레비전이 놓여 있는 것이 일반적이라면, 거실에서 텔레비전은 보이지 않을만큼 한쪽 구석으로 밀려나 있다. 거실에 앉은 사람들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방문자가 현관에 들어오는 장면을 직시할 수 있는 통로가 있다. 현관문을 통과해 들어온 서진은 텔레비전을 대신해 시선의 표적이 된다. 표면상으로 관찰하는 것은 서진이지만,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시선이 아닌 다른 것으로 서진을 관찰하고 있음이 감지된다.

이층집은 잃어버린 동생의 방을 떼어다 붙이는 방식으로 복원한 집이라는 상징성을 지닌다. 복도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아치형의 방문은 기이한 접합의 흔적으로 보인다. 주거지 방문 모양으로는 이색적인 아치형의 문은 공간 전체의 모습을 낯선 것으로 만들며, 성당, 교회, 절 같은 종교 기관의 출입문 형태를 연상시킨다. 유진의 정체가 드러나는 결말부와 관련해 종교적인 징후가 집 내부에 이미 잠재되었다고 해석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집과 종교의 관계를 이야기로 풀어내기 이전에 건축적인 차원으로 구조화한다는 점에서 <침입자>는 한국형 오컬트 영화에서 사이비를 다루는 방식과는 거리를 둔다. 그보다는 집단과 종교의 기이한 형상을 그려온 <유전>(2018), <미드소마>(2019)의 아리 애스터의 방식이 연상된다. <유전>에서 아리 애스터는 한쪽 벽을 비워둔 미니어처 건축 구조물로 줌인하면서 그 속에서 실제 인물들이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히치콕의 <이창>(1954)에서 맞은편 아파트를 관찰하는 장면을 연상시키는 이 기이한 집은 안락한 영화 촬영 세트의 의미를 음울하고 기괴한 것으로 비튼다. 잔혹함과 죽음, 희생과 대체 등의 종교 서사는 공간에 신비한 이미지를 덧씌운다.

<침입자>에서 유진이 소속된 사이비종교는 ‘참아이’를 신의 대체물로 삼는 특징이나 대체되는 여자아이들을 통한 영속의 구도 정도가 드러날 뿐, 종교 자체의 기이함이 지나치게 강조되지는 않는다. 종교는 유진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반전의 요소이기보다는 오늘날의 문제의 원인으로 소환되곤 하는 자본과 대결하는 의지의 표명처럼 보인다. 다시 <화차>에 관한 이야기를 언급하자면 선영의 실종 사건은 약혼 관계인선영과 문호의 결합 직전에 일어나 이들의 관계를 중지시킨다. 이를 통해 자본이 가족과 사랑의 탄생을 가로막는 요인임이 강조된다. <침입자>는 자본으로 상징되는 확실하고 믿을 수 있는 것에 관한 의심을 포석처럼 깔아둔다. 유진을 향해 “돈이 필요해서 그러는 거냐”고 묻는 서진의 외침은 공허할 뿐이다. 자본은 이를테면 유전자 검사 결과와 비슷하다. 99.99%의 친자 확인 결과는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는데, 이를 믿지 못하는 서진은 자의적으로 재검사를 신청한다. 하지만 검사 결과는 유진의 죽음 이후 너무 늦게 도착한다.

서진은 결과물이 든 우편물을 열어보지 않은 채 파쇄기에 집어넣는 것으로 서류적 진실에 대한 거부와 불신을 표한다. 이 장면은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2003)의 결정적인 장면을 연상시킨다. 형사 서태윤(김상경)과 용의자 박현규(박해일)가 철길이 보이는 아치형의 동굴 아래에서 대치 중일 때, 형사 박두만(송강호)이 미국에서 도착한 용의자 유전자 검사 결과지를 들고 달려온다. 그러나 검사 결과는 이들의 기대를 배반한다. <살인의 추억>은 서류에 입각한 합리성이라는 조건의 탄생과 자의적 해석에 기댄 육감 시대의 종말을 선언한다. 뜯지 않은 유전자 검사 결과를 파쇄기에 집어넣는 <침입자>의 결말은 서류적 진실은 땅에 떨어졌고, 그것이 필요 없다고까지 선언한다. 합리성과 육감이 공통으로 향해가던 진실이라는 목적지는 오늘날에는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훼손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제 믿을 것은 기억이라는 이름의 개별적 진실일 것이나, 그마저도 불완전하며 왜곡된 형태로 드러난다. 절벽 아래로 떨어질 위기에 놓인 유진은 자신이 진짜 유진임을 증명하기 위해 실종될 당시 풍선 색깔이 파란색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서진은 최초의 기억 속 파란 풍선을 노란색으로 바꾸고는 유진의 손을 놓아버린다. 그 순간에 서진이 갑작스러운 각성을 한 것인지, 의지에 의해 기억을 변환시킨 것인지 확증할 수는 없다. 자신의 과거를 속인 유진은 그로 인해 처벌을 받는 대신, 거짓을 진심으로 포장해 환심을 산다. 이는 왜소화된 진실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침입자>는 자본에의 욕망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던 추락과 상승의 의미를 퇴색시키면서 자신의 시선에서만 가능해지는 믿음과 진실의 현재를 비춘다.

김희정 감독의 <프랑스여자>는 기억의 층위를 건드린다는 점에서 <침입자>와 나란히 놓을 만하다. 미라(김호정)는 서진만큼이나 불완전한 기억을 지닌 채 관객의 유일한 안내자 노릇을 한다. 서진의 기억이 특정 사건의 트라우마와 관련된 것이라면, 미라의 기억은 좀더 일상적인 차원에 머문다. <침입자>의 서진이 특정 사건의 트라우마와 관련된 기억에 붙들린 인물이라면, <프랑스여자>의 미라는 유학 전과 후의 관계에 있어서 일상적인 디테일을 명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미라는 친구들의 이야기에 종종 “내가 그랬어?”라고 몰랐다는 듯 되묻는다.

그러나 기억은 사적인 층위에만 머물지 않고, 기억의 오류는 한계가 아닌 가능성의 차원으로 전환된다. 미라는 광화문광장을 찾아 세월호 노란 리본을 제작 중인 사람들 사이에 가만히 누워본다. 한 인물의 행위와 경험, 그리고 기억을 통해 국내의 참사는 개인을 넘어 프랑스에서 일어난 실제 테러 사건과 연결된다. 이를 통해 사적인 층위의 이야기는 공통의 기반을 잃고 무너져내리는 상태를 공유하는 기반이 된다. 여기에서 어떤 희망과 긍정이 읽힌다. <침입자>가 가족을 비롯해 자신마저 믿지 못할 정도로 피폐해진 오늘을 진단한다면, <프랑스여자>는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도 연결과 생성의 가능성에 눈을 돌린다.

기억이라는 불안한 은신처

사적 기억과 공적 기억을 연결하는 영화의 방식은 장소의 차원에서 한국과 프랑스를 이음매 없이 연결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프랑스는 영화가 사랑해온 이국의 장소라 할 텐데, 예상과는 달리 영화는 제목에 프랑스를 언급하면서도 프랑스라는 장소의 정체성을 전혀 강조하지 않는다. 오프닝 시퀀스에 등장한 술집은 사람들이 불어를 쓴다는 것을 제외하면 한국이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다. 반면 한국 역시 어딘가 낯설다. 미라가 친구들과 만난 술집에서 프랑스 사람이 미라에게 불어로 불을 빌려달라고 말하자 미라는 아무렇지 않게 불을 붙여주며 불어로 답한다. 미라가 머무는 숙소 욕실에는 휴대폰으로 녹음한 쥘과의 대화가 환청처럼 울리는데, 이처럼 국가의 경계는 언어의 차원에서만 가까스로 존재하며 그렇기에 쉽게 장소를 이동한다. 목소리의 주문은 쥘의 환영을 한국으로 불러내고 현실과 환각은 뒤섞인다.

이러한 뒤엉킴을 무리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건 이 영화가 연극을 주요 레퍼런스로 삼고 있는 탓도 있다. 연극에서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점프하는 것이 관객의 암묵적 동의하에 허용되듯, 연극을 주요 레퍼런스로 삼은 영화 역시 극적 허용의 맥락 속에 프랑스와 한국, 현재와 과거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공간의 변화를 매개하는 장소는 공공화장실이나 골목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무국적의 ‘비장소’들이다. 프랑스에서 미라가 쥘과 주희를 피해 숨을 고르기 위해 찾아든 화장실은 불빛을 깜빡이며 비상 신호를 보내고, 야외로 연결된 한국의 단골 술집 옆 화장실은 벽면의 포스터를 통해 시간의 변화를 표시한다. 일상을 소재로 한 SF영화에서 의외의 장소가 시공간의 변화를 이끄는 매개로 등장한 것처럼 <프랑스여자>에서는 화장실이 SF를 가능하게 하는 공간인 셈이다.

<침입자>에서 집은 그것이 얼마나 낯설든 여전히 붙들고 싶은 거점 공간임은 여전하다. <프랑스여자>에서 집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고, 이방인으로서의 인물은 외부인의 침입을 통제할 수 없는 임시 거처에 머문다. 이제 이들이 의존하는 곳은 ‘국가’라는 허상에 가까운 이미지다. 파리에 대한 동경을 품었던 해란(류아벨)이 ‘파리도 별것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뒤 화를 낸 것이나, 미라가 남편과의 관계가 불안해지자 서둘러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것도 관계와 장소의 불안과 집착이라는 맥락을 건드린다. 지지대를 잃고 부유하며 각자의 머릿속에서 상연과 왜곡을 반복하는 기억만 남았음을 자조하는 <프랑스여자>는 <침입자>보다 한층 강화된 디스토피아로 보인다. 그런데도 <프랑스여자>는 기억이라는 장소가 존재함에 안도한다. 그것은 가장 공포스럽고도 서글픈 위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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