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무명의 작품이라고 해야 할까. 장우진은 여러 영화제에서 각광받은 이름이지만, 아쉽게 개봉하지 못한 <겨울밤에>의 야심과 성취는 그에 합당한 담론을 얻지 못했다. 다시 한번 이 영화를 함께 보고,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예정이다. 이 도전적인 영화에 대해 함께 말할 수 있길 바란다.
두개의 문
엔딩크레딧에 따르면 장우진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 <겨울밤에>에서 (우지현 배우가 연기한) 20대 군인과 (이상희 배우가 연기한) 그에게 면회 온 친구는 ‘남자’와 ‘여자’로 명시되고 있다. 두 캐릭터는 왜 이름 없는 보통명사의 존재로 스크린에 나타나고 사라지는 걸까? 단순히 영화 안에서 두 사람의 이름이 불리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설정된 것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들의 이름이 호명되는 사태를 영화가 절대적으로 회피한다고 고려해볼 수는 없을까? <겨울밤에>에서 이름이 부여되지 않은 이 개체들은 단일한 정체성에 귀속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의 얼굴과 신체, 하나의 시간과 공간에 붙들려 있다고 손쉽게 추론되는 보편적 의미의 ‘인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여기서 내러티브는 어느 하나의 시공간으로도, 개별적인 몸과 정체성으로도 명료하게 정박되지 않는 공백과 틈새로부터 파편적으로 산출된다. 이처럼 장우진은 이름이 괄호 쳐진 무명의 매개를 통해 다중으로 분화하는 기억과 무의식을 발생시키며 비정형의 조각난 형식으로 향한다.
<겨울밤에>는 하룻밤 동안 벌어지는 여로의 시간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영화의 구조는 물리적으로 흐르는 시간과는 무관하게 시간의 압력이 느슨하게 풀려 있는 구조를 전제한다. 표면적으로는 청평사 주변에서 보내는 하루의 기록이지만,그곳을 헤매는 다섯 인물들은 바로 그 시공에서 길을 잃는다. 한밤의 시간은 멈춰버린 것만 같고, 공간을 배회하는 이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는데도 정착할 장소를 마련하지 못해 외부로부터 닫힌 그곳에 유폐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야기는 잃어버린 핸드폰을 되찾으려는 은주의 여정으로 시작해, 옛 연인 해란과 재회하는 흥주의 여정, 얼어붙은 폭포와 청평사 주변을 돌아다니는 젊은연인의 여정, 우연한 계기로 그들과 조우하는 은주의 여정, 그리고 끝내 방에 되돌아온 흥주와 은주의 회귀적 재회로 꼬리를 물며 펼쳐진다. 간단히 말하면 이 여정은 무의식적인 세계로의 접근일 것이다. 그런데 이를 누구의 무의식이라 말해야 할까. 장우진은 한정적인 공간을 반복해서 활용하면서, 임시로 그 공간을 활성화하는 인물들의 배치와 행위에 변주를 가하며 불가능한 동시적 감각을 팽창시킨다.
나와 또 다른 나
이 영화가 창안한 미로는 단순히 방향감각을 상실케 하고, 출구를 찾을 수 없는 공간적인 영역에 한정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 기묘한 영화의 여정은 변신의 과정이다. 무언가를 잃어버렸음을 자각하고 그것을 되찾으러 가는 경로를 전개하면서 영화는 인물들에게 주어진 조건들을 하나씩 덧대거나 지워나간다. 가령, 장갑을 끼고 있던 흥주와 핸드폰을 잃어버린 은주는, 몇개의 숏이 지나간 뒤에 장갑을 잃어버린 흥주와 핸드폰을 찾다 되돌아온 은주라는, 미묘하게 뒤집힌 상태로 다시 마주친다. 이 변화는 사소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배회와 재회, 기억과 잃어버림, 사라지지 않는 흔적과 새로 생성되는 감각을 충돌시키는 영화의 형식이, 두 인물이 처음 재회하는 순간에서부터 일찌감치 내재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화면 바깥으로 돌연 사라진 뒤 흥주 앞에 홀연히 다시 나타나는 은주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그동안 들어본 적 없는 생경한 어투로 말을 내뱉는다(“고생이 많소! 나랑 사느라고”). 이 장면에서 눈의 은주는, 핸드폰을 찾기 위해 사라져버린 은주와 같은 인물이라 확신할 수 있는가? 같은 얼굴을 하고, 같은 옷을 입고 있는데도 균열이 일어난 정체성을 향한 이런 의문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이를 확인하려는 듯 흥주는 은주와 함께 이 식당에 함께 왔었다는 기억을 공유하려는데, 은주는 그것조차 기억하지 못한다(이는 이 영화에서 기억의 형태가 부조리하게 비틀려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이야기가 작동하는 시간에 우선해서 인물의 변신이 먼저 작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겨울밤에>에서 구체화되는 변신이라는 사태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 혹은 동물이나 사물로 모습을 바꾸는 전능한 기술이 아니다. 이 세계에서 인물들이 직면하는 변신은, 우리는 단 하나의 세계에 거주하고 있으며, 우리 몸은 서로 다른 공간에 복수의 형태로 자리 잡을 수 없고, 그 세계를 구성하는 시간을 되돌리거나 순식간에 뛰어넘을 수도 없다는 물리적 한계와 연관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또 다른‘나’로 변신할 수밖에 없다. 앞과 뒤의 ‘나’는 같은 장소를 거닐며, 또 다른 ‘너’와 같은 동선과 우연으로 관계를 형성하지만 그들은 같지 않다. 군인 ‘남자’와 면회 온 ‘여자’로 이루어진 젊은 연인은 픽션 내부에서 고유한 단독자의 역할로만 존립하지 않는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청평사에서 하루를 묵는 개별적인 인물들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흥주와 은주가 30년 전 청평사 주변을 맴돌며 그려낸 궤적과 고스란히 포개지는 흥주/은주의 기억이자, 또 다른 시야에서는 흥주와 해란이 그러한 것처럼 담배 한 개비를 함께 나눠 피우는 흥주/해란의 흔적이다. 그들은 플래시백 없이 형상화되는 과거이며, 서로의 시간에 불규칙적으로 접속하는 매개자다. 이런 맥락에서 <겨울밤에>의 내러티브는 세 커플의 이야기로 완벽히 펼쳐지지도, 한 커플의 이야기로 명쾌히 환원되지도 않는다. 그들은 부분적인 유사성을 간직한 서로 다른 몸으로 영화에 주어진 ‘유일한 세계’를 배회한다.
세계를 가로지르는 이러한 모호성이 숏의 경계를 더없이 부조리한 형태로 만들어버린다. 여기엔 두개의 잠재된 시간과 공간이 한 표면에 달라붙어 있다. 하나는 지면에 감도는 흔적 또는 지층의 시간이다. 해란이 등장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그녀는 문자 그대로 비가시적 영역(‘땅’)으로부터 화면 한가운데로 솟아오른다. 마치 그 앞에서 노래를 부르던 흥주의 기억 속에 남겨둔 흔적이 열리듯 화면에 빈틈을 내고 표면 위로 출현하는 것이다. 혹은 은주가 청평사 계단에 섰을 때, 카메라가 천천히 하강하면 젊은 연인이 몰래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드러난다. 수직적 움직임의 선이 기억의 지층처럼 암시되고 있다. 다른 하나는 프레임의 경계가 설정하는 단절의 공간성이다. 장우진은 마치 화면 내부와 프레임의 윤곽을 넘어서는 외화면 영역이 잘려져 있는 것처럼 다루고 있다. 은주가 화면 바깥으로 움직이자마자, 다음 장면에서 흥주는 지친 숨을 내쉬며 홀로 청평사를 배회하고 있다. 혹은 흥주의 걸음에 맞춰 해란을 프레임 바깥으로 밀어두는 순간에, 해란은 영화에서 완전히 퇴장해버리고 만다. 픽션적 존재들의 경계선으로의 프레임. <겨울밤에>의 숏은 기묘한 경계와 역설적인 공간 구조로 패러독스를 형성한다. 프레임 외화면은 공백의 영역으로 남겨지지만(그런 프레임의 비가시 영역이란, 시각적 지표의 소멸로 존재를 갱신시켜주는 곳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화면 내부에 인물을 등장시키고 주변을 끌어들이는 ‘바깥’이 존재하는 것이다.
여정이 지속되면서 우리는 바로 이런 지층과 단절이 불가능한 공존을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된다. 가령, 헛구역질하는 흥주의 머리와 천천히 눈을 밟고 나아가는 은주의 발걸음이 거의 같은 시간에 중첩된 장면조차도 가능한 사태로 받아들여진다. 그런가 하면 젊은 연인과 만나고 돌아온 은주는 흥주에게 “같이 있어도 같이 있는 것 같지가 않은데”라고 말한다. 이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연인들을 보고 새삼스럽게 스스로 외로움과 고립감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깨닫는 고백이 아니다. 이 말은 문자 그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 내러티브 질료의 일부분으로서 전하는 존재론적 진술이다. 그들은 진정 같이 있을 때도 같이 있을 수 없다. 반대로 혼자 있을 때조차 수많은 기억과 흔적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춘천의 겨울밤을 배회하는 이들은 함께일 때 사라지고픈 열망에 사로잡히고, 혼자일 때 여럿의 인기척을 체감한다. 좌우로 느리게 움직이는 열풍기의 붉은빛이 가닿는 지점에 따라, 인물 표면의 윤곽이 생성되고 어둠에 가려지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하나의 숏이라는 평면 위에 이중의 시간이 드리우고, 복화술적인 정체성의 교차가 오간다. 그러니 잠들지 못한 인물들이 빛에 반사되는 겨울밤으로 걸어나와 마치 몽유병자처럼, 혹은 잊힌 기억을 되짚어가듯 한밤의 시간을 배회할 때, 얼음판을 걷는 이들의 경로에서 중요한 것은 구조화된 인물의 동선을 따르는 것도, 그런 동선을 통해 펼쳐진 얼어붙은 땅과 그곳에 배치된 바위와 돌탑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이 겨울의 풍경 앞에서 진정 눈여겨 바라보아야 할 것은 얼어붙은 지면에 발을 디디고, 미끄러지고, 조금씩 녹아내리는 얼음을 밟고 땅 아래로 사라지지 않기 위해 균형을 잡는 자세와 몸짓일 것이다. 인상적인 한 장면이 있다. 얼음으로 둘러싸인 폭포 앞에서 은주는 발을 잘못 디뎌 물에 빠질 위험에 처한다. 도와달라는 은주의 목소리를 듣고 젊은 연인이 나타난다. 남자는 무게중심을 낮추고 자세를 뒤틀어 조심스럽게 은주를 빼낸다. 분열과 중첩이 한데 뒤섞여 격렬한 모순을 일으키는 이 기묘한 지층 위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무게에 의지해 쓰러지지 않고 평형을 유지한다. 그리고 간신히 지면의 밀도를 버티며 아슬아슬한 걸음으로 빠져나온다. 이 기묘한 신체의 퍼포먼스가 발생하는 동안, 이들이 지니는 모호한 정체성과 시간의 축은 상대를 겨냥하지만, 끝내 그들 자신의 신체에 귀속된다.
걸쳐 있는 영화
에세이집 <흡혈귀의 비상>에서 미셸 투르니에는 작가를 ‘자아주의자’와 ‘허구주의자’라는 두 가지 범주로 구분하는데, 전자는 화자 자신에 대해서밖에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들(몽테뉴, 루소, 샤토브리앙)을, 후자는 픽션의 구조 위에 서로 다른 인물들을 배치하면서 중심을 변환시키는 이들(발자크, 위고, 졸라)을 지정한다. 그리고 그들 중간에 ‘걸쳐 있는 사람’들이 있다(앙드레 지드, 플로베르). 걸쳐 있는 자들의 이야기는 화자의 내면을 기반으로 펼쳐진다는 점에서 자아주의적이지만, 동시에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하는 이탈의 욕망을 표출한다는 점에서 허구주의적이다. 걸쳐 있는 자들이 펼쳐내는 이야기야말로 곧 정체성의 분열과 중첩이 공존하는 이중구속의 픽션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투르니에가 구분한 분류의 맥락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겨울밤에>를 ‘걸쳐 있는 영화’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영화에서 배회를 수행하는 이들은 여정의 경로 위에서 여러 형태의 그들 자신(거울에 비친 얼굴, 급작스럽게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을 마주하지만, 동시에 존재의 근거를 이곳에서 저곳으로 변화시키려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30년 전 자신의 행적을 그대로 반복하는 사람과의 조우는 나를 마주보는 것인가, 나로부터의 이탈인가. 이 영화는 그런 이중성을 보존하는 충돌적 연결을 보여주고 있다.
장우진의 이 야심찬 구조적 실험은 이강현의 <얼굴들>과 더불어, 홍상수 이후의 영화적 구조에 대한 한 가지 저항의 형식을 그려낸 보기 드문 동시대의 한국영화일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홍상수의 세계는 인물들이 문을 열고 나가는 것만으로 픽션의 정체성을 갱신하고 시간축을 반전시킨다. 영수가 홀로 남았다고 여겨지는 순간, 사각의 문틈을 건너 프레임 안쪽 영수의 옆자리로 들어오는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의 마지막 장면의 민정, 여러 개의 문을 열고 나가기를 반복하면서 서로 다른 시제의 숏에 불시착하는 <그 후>의 봉완, 그리고 열고 닫히는 문을 통해 나가고 들어오기를 반복하는 몸짓들로 영화 전체를 구성한 <풀잎들>이 그런 예시다. 반면 <겨울밤에>에서 두쌍의 커플(흥주와 은주, 젊은‘남자’와‘여자’)이 밤을 보내는 민박집에는 한 화면 안에 두개의 문이 있다. 한쪽은 중년 부부가 묵고, 다른 한쪽에는 젊은 연인이 있다. 두개의 문은 동시에 열리지 않는다. 어느 한쪽 문이 열릴 때마다 서사는 의식적인 변환을 맞이하지만, 다른 한쪽은 화면 뒤로 소멸한다. 영화의 마지막에도 한쪽 문이 열린다. 다른 한쪽 문은 열리지 않는다. 열린 문으로부터 나이 든 부부가 걸어나온다. 젊은 연인은 다른 문 뒤에서 소리가 들릴 뿐 어떤 모습도 비추지 못한다. 한쪽으로 열리고, 다른 한쪽으로 닫힌 두개의 문은 기억과 흔적의 파편적인 접속을 차단한다. 이 영화의 모호한 여정을 추동하는 근간인 이중의 픽션이 폐기되는 순간이다.
<겨울밤에>의 마지막 장면은 더이상 하나가 여럿으로 분열하지도, 여럿이 다시 하나로 중첩되지도 않는 ‘유일한 세계’가 가하는 압력으로 인해 변신을 시도할 수 없게 된 자들의 침묵을 비추고 있다. 해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젊은 커플(‘남자’와 ‘여자’)은 문 뒤편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택시에서 내려 거리에 멈춰선 흥주와 은주는 다른 누구로도, 그 자신으로도 이야기를 넓혀갈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첫 장면에서와 같은 택시를 타고, 같은 위치에 앉아 있다. 이는 단순한 수미상응의 구조가 아니다. 변신 없는 세계란 이와 같이 다른 이미지를 구현해낼 역량의 불능에 처한 세계, 기억과 흔적을 간직한 장소가 부재하는 세계다. 환언하자면 결말에서 주인공들은 몽타주 없는 세계에 도달해 있다. 그들은 다른 곳으로 향할 수 없다.
움직임을 멈춘 흥주와 은주의 신체는 그간의 지질학적인 여정, 지표면으로의 모험을 통해 세계를 지속할 수 있으리라는 서사적 기대를 좌절시킨다. 화면 앞에 굳어버린 이 불투명한 인물들을 어떻게 이동시킬 것인가. 프레임 바깥으로 향하는 순간 소멸해버리고, 물리적인 조건을 거슬러 불현듯 숏이라는 지면 위로 다시 솟아오르는 이토록 부조리한 대상들을 말이다. 두 사람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을 때, 영화는 시계의 초침 소리를 들려주며 이들의 신체를 바위와 돌탑이 보이는 무인의 풍경과 교차시킨다. 픽션의 질료로서 동등하게 배치되는 인간의 몸과 바위. 두 인물이 변신 없는 세계에 의해 붕괴하듯 초침 소리에 맞춰 돌탑이 무너지는 모습이 보인다. 그것은 곧 우리가 머무는 세계를 지탱하던 압력이 무너지는 형상이기도 할 것이다.
이들은 과거를 두리번거리고, 매혹과 긴장을 동반한 눈으로 현재를 주시하지만, 미래의 시간으로 향하지 못한다. 이 결말은 가능한 내러티브의 조합과 배치가 모두 소진된 풍경을 보여준다. 그 풍경은 우리에게 세계가 중단될 것이라는 불안을 각인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