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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창' 심혜정 감독 - 돌봄노동은 왜 여성만의 몫인가
2020-07-02
글 : 배동미
사진 : 백종헌

심혜정 감독은 대학에서 독문학을 공부하고 아이를 낳아 기른 뒤 39살에 늦깎이 미술학도가 되어 퍼포먼스와 미디어아트 등 작품 활동을 쉼 없이 이어왔다.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 미디액트를 찾았다가 후에 자신의 페르소나가 될 배우이자 감독인 김도영을 만났다. 그로부터 10년가량 흐른 뒤에 심혜정 감독은 첫 장편영화 <욕창>을 만들었고, 그의 페르소나인 김도영 감독은 <82년생 김지영>을 연출했다. <욕창>은 뇌졸중으로 쓰러진 노년의 여성에게 욕창이 생기면서 서서히 드러나는 가족의 욕망과 갈등을 서늘하게 재현한 극영화다. 미술계 활동을 오래해온 까닭에 심혜정 감독을 실험영화 작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정작 그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에 따라서 장르가 결정되는 것 같다. 실험영화나 미디어아트만 하고 싶다고 영역을 정해두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심혜정 감독은 실제로 아픈 어머니를 돌보면서 겪은 경험과 감정을 바탕으로 직접 <욕창>의 각본을 쓰고 연출을 맡았다. 병상에 누워 있는 모든 사람들이 힘들 여름날에 심혜정 감독을 만나 영화 <욕창>과 돌봄노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실제로 어머니가 아프셨다고 들었다. 다큐 <아라비아인과 낙타>에서 어머니와 간병인 중국 동포를 직접 비추기도 했는데.

=<아라비아인과 낙타>는 아픈 어머니를 둔 딸인 나를 주인공으로 한, 선주민과 이주민의 관계에 대한 다큐였다. 제목은 <이솝 우화>에서 따왔다. 사막에서 추위에 떨던 낙타가 텐트 안의 주인에게 발 하나만 넣어도 되냐고 묻고 허락을 구한 뒤에 발만 넣는다. 조금 있다가는 머리를 넣어도 되냐고 묻더니 점점 텐트를 차지해나가고 주인인 아라비아인은 텐트 밖으로 쫓겨난다. 선주민이 느끼는 불안이란 알량한 텐트 자리를 뺏길까 우려하는 두려움인 것 같다. 실제로 친정에 갔을 때 내 어머니 집 같지 않아서 어떤 불편함 같은 걸 느꼈다. 다큐 작업은 그 불편한 감정이 뭘까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가족 돌봄은 85% 이상 여성이 전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돌봄노동의 특성은 아픈 이를 자주 보는 사람일수록 더 마음이 쓰이고, 자주 보지 않고 챙기지 않는 사람일수록 마음이 편해진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영화에서 돌봄노동 문제에 대해 쉽게 결정내려버리는 아들들에게 어머니 길순(전국향)과 대면하는 장면을 허락하지 않았다.

=맞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픈 부모를 돌보는 일은 대부분 여자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옛날과 달리 지금은 책임지지 않는 낡은 가부장 사회라고 느낀다. 가부장이란 권위는 여전하지만 책임은 여자들이 지는 거다. 그래서 딸 지수(김도영)가 막내였으면 좋겠다 싶었다. 맏딸이라면 남매간 서열에 따른 책임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 않나. 그래서 오빠 둘에 막내 여동생으로 구성된 남매로 설정했다. 실제로 내가 집안에서 막내이기도 하다.(웃음) 가족회의에서 아들(김재록)보다 며느리(권미아)가 좌불안석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사회가 며느리에게 요구하는 게 있기 때문이다. 내 몫은 아닌 것 같은데 거절하기 편치 않아서 생기는 감정이다. 요즘 육아는 남녀가 함께해야 한다는 쪽으로 인식이 바뀐 것 같다. 하지만 노인 돌봄은 여전히 여자의 몫이다.

-창식(김종구)은 제자리에서 오르내리는 스테퍼를 이용해 운동한다. 수옥(강애심)은 텔레비전 뉴스와 공중파 연속극을 보면서 똑같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어쩌면 노년의 삶이란 같은 것의 반복이 아닐까 싶다.

=노인의 일상을 옆에서 지켜보면 계속 반복되는 패턴들이 있다. 젊은 세대가 볼 때는 지루한 일상의 반복이지만 노인들은 그걸 지키려고 굉장히 노력한다. 천보를 걷기 위해서 심혈을 기울이고 현재를 유지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한다. 실제로 노인들이 굉장히 노력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길순이 딸기를 잘 먹는다는 설정이 등장한다. 산딸기 밭에서 젊은 시절을 회상하는 잉마르 베리만의 <산딸기>가 떠오르고, 돌아가시기 전에 딸기는 잘 드셨던 조부모 생각도 났다.

=실제로 노인들이 부드럽고 먹기 좋은 딸기를 좋아하더라. 딸기는 사실 잘 무르는 과일이다. 금방 곰팡이가 핀다. 어쩌면 젊음은 딸기처럼 찰나적인 거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영화제 버전에서는 딸기가 썩어서 곰팡이 핀 장면도 있었다.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아도 관객이 잘 이해하기 때문에 개봉을 준비하면서 뺐다.

-관객에 따라 창식과 수옥이 춤추는 장면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창식만의 욕망이 아니라 두 사람의 화합처럼 비칠 수도 있을 것 같다.

=실제로 배우들이 느낀 건 애정은 아니라더라. 나는 애정이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춤 신은 시나리오에서 한줄 정도였고 무드를 만든 건 배우 두분이다. 춤을 추면서 김종구 선배가 어깨를 토닥이니까 강애심 선배가 설움 같은 게 복받쳐 올랐다더라. 사실 수옥은 애썼다. 그런데 가족들에게 수모를 당하고 쫓겨날 위기에 처한 거다. 그때 창식이 수옥의 어깨를 토닥이니까 고맙고 서러워서 눈물이 터졌다고 하더라. 창식 입장에서도 오랫동안 마음을 나누면서 함께 지낸 수옥을 지키고 싶었을 것 같다. 굳이 성적 욕망이 아니더라도 가까이에서 자신을 알아봐주고 웃어주고 위로해주고 아프면 파스 붙여주는 사람인데, 그를 잃는 건 힘든 일이다. 춤 신은 두 사람이 위로를 주고받는 장면이라 생각한다.

-창식이 앉아 있는 의자와 <아라비아인과 낙타>에서 실제 감독의 아버지가 앉아 있는 의자가 매우 흡사했다.

=아버지의 의자를 보여주며 미술감독에게 비슷한 흔들의자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의자는 가부장이라고 하는 낡은 권력이 앉는 특별한 자리라 생각했다. 집집마다 단독으로 앉는 흔들의자 같은 것들이 있지 않나. 문제는 그걸 누가 차지하느냐, 주로 앉는 사람이 누구냐다.(웃음)

-영화 마지막에 창식이 부엌에서 나는 연기를 걷어내려고 쓰는 도구가 방석이라 인상적이었다. 엉덩이로 무겁게 깔고 앉아 있던 방석을 손에 쥐고 휘두르면서 창석이 직접 돌봄노동에 나서게 될 앞날을 예상하게 한다.

=현장에서 필요에 의해서 방석을 쓴 건데 의미들이 달라붙어서 좋더라. 김종구 선생님도 창식이 그렇게나 지키고 앉아 있던 게 작은 방석만 한 알량한 권위일 뿐이라고 하면서 좋아하셨다.(웃음)

-방석을 휘두르는 엔딩 장면에서 음악은 나오지 않고 창식의 거친 숨소리만 들려준다.

=창식의 마지막 감정은 불안이다. 거친 숨소리에서 느껴지는 창식의 불안을 관객이 같이 귀기울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음악을 쓰지 않았고, 호흡 소리가 증폭되면서 들릴 수 있게 사운드 믹싱을 했다.

-김도영 감독을 딸 지수로 캐스팅한 계기가 궁금하다. 김도영 감독은 전작들에서 ‘고마운 분들’에 빠지지 않고 이름이 올랐던데.

=우리는 2008년 미디액트 단편영화 워크숍에서 처음 만났다. 도영은 연극영화과를 전공해서 연극계에서 많이 활동했다. 도영도 당시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고 나도 미술영상을 하다가 영화를 하고 싶었다. 그렇게 워크숍에 참여하게 됐는데 둘이 같은 조가 되어서 짧은 단편을 만들면서 친해졌다. 그 뒤부터는 서로 작업을 독려하고 채찍질하는 좋은 동료가 됐다. 기획이나 아이디어 단계에서부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다. <82년생 김지영>이 대종상에 초청됐을 때는 함께 시상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도영은 내 모든 영화에 출연하는 페르소나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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