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영화’란 새로운 영역이 개척된다면 이는 누가 연출해야 할까. 소리와 영화의 접점, 정확히 그 분야에서 누구보다 고민하며 작업하는 장본인들, 바로 음악감독일 것이다. 6월 18일 네이버 오디오클립을 통해 공개된 오디오 시네마 시리즈(기획 스튜디오N)는 지금 한국에서 가장 바쁜 음악감독들을 섭외해 인기 웹툰 및 웹소설을 소리로 옮기는 오디오 콘텐츠의 연출을 맡겼다. 여기에 덱스터의 라이브톤 스튜디오에서 돌비애트모스로 작업해 ‘시네마’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완성도를 더욱 높였다. 김태성 감독은 7년차 커플의 만남과 이별에 이르는 여정을 담은 멜로물 <남과 여>(출연 김동욱, 강소라)를, 달파란 감독은 여장을 하고 고등학교 여자 수구부에 들어간 소년 배수구의 성장물 <두근두근두근거려>(출연 찬열, 이세영)를, 방준석 감독은 불면증에 시달리는 톱스타와 라디오 DJ의 로맨틱코미디 <그대 곁에 잠들다>(출연 이제훈, 유인나)를 연출했다. 일주일 동안 무료로 공개된 오디오 시네마는 연일 네이버 오디오클립 랭킹 1~3위를 고수하며 도합 100만회 이상의 조회수를 올리는 성공을 거뒀다. 인터뷰 당시 아직 작품 공개 전이라 조금은 불안해하며 릴리즈를 기다리던 세명의 음악감독으로부터 국내 최초로 시도된 프로젝트에 대한 소회를 들었다.
-하이틴 성장물부터 묵직한 멜로까지, 각각 매우 다른 장르를 연출했다. 각자 작업할 작품은 어떻게 결정됐나.
방준석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결과물이 무궁무진해질 수 있지 않나. 이미 사람들과 교감했던 원작들이 있으니 시나리오를 펼쳐놓고 고르게 됐다. 처음에 여러 후보를 두고 고민하다가 돌고 돌아서 결국 원래 하고 싶던 <그대 곁에 잠들다>를 만들었다.
달파란 골랐다고?
방준석 형은 안 골랐어?
달파란 난 그냥 이걸 연출하면 된다고 해서 하게 됐는데…. (웃음) 다른 일로 정신없는 사이 다른 감독들이 먼저 작품을 골랐고, “감독님은 <두근두근두근거려>를 하면 된다”고 해서 하게 됐다. 여기서 제일 나이가 많은 내가 하이틴물을 맡아 이상하다. 하이틴 로맨스를 본 적도 거의 없다. 난 다크한 걸 좋아한다고.
방준석 아니, 삐삐밴드 출신이 다크하다는 말을 하다니. (웃음)
김태성 처음부터 분명한 목적이 있어서 권미경 스튜디오N 대표님에게도 말씀드렸다. 이게 귀로 들으면서 상상하게 만드는 콘텐츠 아닌가. 난 에로틱한 것을 하고 싶고, 하게 해준다면 함께하겠다고 말했다.(웃음) 출퇴근 시간에 사람들이 몰래 그런 걸 듣고 있는 표정을 생각하면 뭔가 짜릿하다. 처음에는 침대 위에서만 벌어지는 이야기를 해볼까도 생각했다. 그러다 웹소설과 웹툰 중에서 작품을 고를 수 있게 됐는데, 농밀한 사랑 이야기를 다룬 혀노 작가의 <남과 여>를 하고 싶다고 내쪽에서 먼저 말씀드렸다. 하지만 처음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왔다. 물론 침대 위 장면이 있고 배우들의 신음 소리를 아주 디테일하게 녹음했지만 내가 원래 생각한 것의 100분의 1도 못했다.
-오디오 ‘시네마’인 만큼 기존 라디오 드라마와 다르게 접근해야 했을텐데.
방준석 구글 오디오북 같은 걸 찾아보면 수위 높은 장르도 인기가 많다. 소리라는 게 대사 하나하나로 스토리를 따라가게 하는 게 아니라 직접 체험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만든다. 우리 셋 다 그런 체감적 요소를 고려하며 접근하지 않았나 싶다. 달파란 형이 제일 먼저 믹싱 작업을 했는데, 플랫하게 해봤다가 나중에 영화적인 입체감을 기술적으로 만들어준 부분이 있다.
달파란 리얼은 아니고 버추얼 서라운드 작업을 했다. 어쨌거나 청자들은 스테레오 환경에서 듣기 때문에 가상으로 서라운드 효과를 낼 수 있는 작업을 해보자고 한 거다. 의견을 말씀드렸더니 스튜디오에서 제대로 녹음해보라고 지원해주셨다.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방향으로 공간감을 구성하는 건 원래 영화 작업에서도 했던 거라 익숙했다.
김태성 라디오 드라마와는 ‘개인의 체험’ 면에서 다르다. 내가 어떤 감정을 갖고 연애를 하나, 그 사람의 상상력이 곧 카메라처럼 펼쳐진다. 일부러 스토리의 시간 순서를 뒤섞어 상상력을 자극하는 형태로 구성했다. 그리고 음악감독을 섭외한 이유가 있겠다는 생각에 각 에피소드의 주제곡 같은 것을 신경 써서 만들었다.
-음악감독으로서 배우에게 연기 디렉팅을 하는 건 처음이었을 것 같다.
달파란 우리는 대부분 감독과 얘기하지 배우와 대화를 자주 나누진 않으니까. 하지만 연주자들과 녹음할 때 우리도 디렉팅을 많이 하는데 그 작업과 비슷했다. 악기 연주도 감정을 악기에 담아 연기하는 것과 같다. 어떤 연주건 간에 비슷한 면이 있고, 악기와 연기 모두 연주에 가깝다. 감독도 영화에서 지휘자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으니, 시나리오라는 악보를 가지고 연출하는 거라고 생각하며 접근했다.
방준석 배우들도 시나리오를 읽고 자신이 생각한 캐릭터를 잡아 접근하는데, 디렉팅하는 입장에서는 어떤 신이나 상황 전체를 놓고 보면 범위가 벌어진다 싶을 때가 있다. 감독으로서 그걸 줄여나가야 한다. 들어서 좋은 것과 상황에 맞는 연기는 다르지 않나. 어떤 신은 배우가 준비해온 대로 쓱 가기도 했고, 어떤 신은 내쪽에서 제안을 하며 그 접점을 찾아갔다. 그리고 영화를 찍을 때도 편집 단계에서 만들어지는 것들이 있지 않나. 오디오 시네마도 그런 작업이었다. 결국 녹음한 것을 가지고 또다시 장면을 구성해야 한다.
김태성 오로지 하나만 생각했다. 내가 이걸 들었을 때 내 경험을 투영하며 공감할 수 있나? 배우들에게 이 대사가 맞느냐고 계속 물어보며 의심하고, 녹음 현장에서 배우들이 자기가 실제 연애할 때 했던 말로 대사를 많이 바꿨다. 심지어 침대 위 장면도 어떤 게 더 리얼한 표현인지 서로 물어가며 작업했다.
-<남과 여>는 처음 시나리오와 결과물이 완전 다르다. 구성도 다르고 없던 파트도 생기고 생략도 많이 됐다. <남과 여>에서는 다양한 버전의 ‘사랑해’를 편집한 프롤로그가 나온다.
김태성 원래 시나리오에는 없었다. 김동욱씨는 본인이 장소까지 바꿔가며 다양한 버전의 ‘사랑해’를…. (웃음) 보통 영화를 할 때는 편집감독이 따로 있고 세분화된 일이 있는데 이걸 혼자 하려고 하니 너무 막막하더라. 시나리오를 해체해서 단어 단위로, 호흡 소리도 다 잘라서 편집했다. 그리고 에피소드 하나가 끝날 때마다 주변 지인들에게 모니터링을 요청하기 위해 단체 대화방에 파일을 뿌렸다. 시간순으로 진행되지 않는데 스토리가 이해되는지, 다음편을 듣고 싶은지 계속 물었다. 그리고 듣는 사람이 주로 여성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여자들이 상상력이 더 풍부하고 들을 때 공감도 더 많이 하지 않나. 남자들의 의견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웃음) 난 정말 힘들게 작업했다. 다른 영화음악 작업보다 더 힘들었다. 먼저 시작한 달파란 감독님이 재미있게 일사천리로 진행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너무 부러웠다. 한번 더 작업할 수 있다면, 진짜 더 잘할 수 있다.
-<두근두근두근거려>는 수영이나 수구를 해야 하는 이야기 특성상 실제 배우가 뛰면서 녹음을 했다고 들었다.
달파란 제자리뛰기를 하면서 했지. 연기자들이 되게 재밌게 녹음했다. 엑소의 찬열, 그 친구가 뛰면서 연기하는 걸 참 잘하더라. 수구의 아버지로 나오는 정진영 배우 겸 감독님도 참 잘한다고 칭찬했다. 세영씨는 내쪽에서는 괜찮은데도 계속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보고 싶다며 의욕적으로 연기에 임했다. 그런데 액션 연기를 너무 리얼하게 하면 오히려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 만화 같은 느낌으로, 살짝 가짜처럼 보이게끔 연기하도록 했다. 수구부를 맡은 울보 선생님은 성우 정주원이 연기했는데, 그래야 더 만화적인 느낌을 살린 하이틴물 같을 것 같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그대 곁에 잠들다>는 원래 라디오 DJ로 활약한 유인나가 라디오 DJ로 나온다.
방준석 네이버 AI 스피커 목소리를 유인나씨가 녹음하지 않았나. 그 정도로 호감 가는 보이스를 갖고 있다. 하지만 라디오 DJ 할 때의 목소리와 너무 똑같으면 안됐다. 그래서 피해갈 수 있는 건 피해가며 너무 겹치지 않게 평소와는 또 다른 톤으로 녹음했다. 제훈씨랑 같이 녹음하다 보니 서로 연기를 주고받으며 받는 영향도 있었다. 참여한 배우들이 목소리만 들어도 딱 잡히게 다들 연기해줘서 굉장히 행복했다. 영화감독 역의 김희원 배우는 사실 더 재밌는 장면들이 있었는데 넣지 못한 부분도 있어 아쉽다.
-<두근두근두근거려>에는 가사 있는 노래가 나오지 않고, <그대 곁에 잠들다>에는 굉장히 유명한 노래가 나온다. <남과 여>는 곡을 전부 새로 만들었다.
김태성 화면도 표정도 없이 상상하며 들어야 하니 설명되지 않고 그냥 떠다니는 텍스트들이 있지 않나. 노래가 그런 부분을 건드려서 듣는 사람을 끌고 가길 바랐다. 남자와 여자의 시점, 에피소드마다 주제곡이 두곡씩 들어가고 아티스트들이 각자의 연애 이야기를 투영해 가사를 썼다. 평소 작업해보고 싶었던 가수들을 리스트업해서 스튜디오N에 제안했더니 다 받아줬다. 사실 영화할 때는 이렇게 자유로운 작업이 불가능한데, 오디오 시네마를 하면서는 평소에 해보고 싶었던 걸 마음껏 다 해봤다. 죠지, 곽진언, 위아더나잇, 빌리어코스티 등이 참여했다.
방준석 여자주인공이 라디오 DJ라 코멘트를 하고 곡이 나가는 구성이 많다. 덕분에 기존 곡을 마음껏 쓸 수 있었다. 잔나비의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 백예린의 <스며들기 좋은 오늘> 등등…. 극중 유인나씨가 직접 부른 노래는 새로 만들었는데 노래도 정말 잘하더라.
달파란 라디오 드라마를 많이 들으면서 자란 세대다. 요새는 어떻게 하나 궁금해서
-다시 오디오 시네마를 연출할 기회가 생긴다면 어떻게 접근하고 싶은가.
방준석 영화처럼 프리프로덕션부터 포스트프로덕션까지 전체 사이클을 한번 경험하고 나니, 돌이켜봤을 때 비로소 느껴지는 바가 있더라. 음악감독 일을 오래했지만 총체적인 감독 역할, 상당히 체험적인 콘텐츠를 만드는 건 처음 경험해본 거 아닌가. 해석이 더 다양하게 나올 수 있는 콘텐츠다. 영화가 아닌 오디오 매체의 특성을 좀더 고려해 시도할 만한 게 아주 많다.
김태성 아까 언급했던 에로틱 장르를 이름을 바꿔서라도 몰래 해보고 싶은 욕망이 있다. 사실 현장에서 녹음할 때 배우들이 가장 신나게 녹음한 부분도 베드신이었는데, 배우들 중에서 함께하고픈 분이 있다면 같이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상상의 나래를 더 펼칠 수 있는, 더욱 농밀한 작품을 해보고 싶다.
달파란 아주 무서운 장르를 해보면 어떨까. 대사도 중요하지만 대사가 그렇게 많지 않은 작품을, 오디오로만 그 느낌을 전달하는 작업을 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주변 소리를 입체적으로 구현해내서 공간감을 더 가져갈 수 있는 장르가 있을 거다. 다시 하면 정말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웃음)
-곧 오디오 시네마가 청자들에게 공개된다. 팟캐스트는 이동하면서 편하게 듣기도 하는데 오디오 시네마는 사운드에 공을 많이 들인 프로젝트라 그런지 그렇게 듣기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이 콘텐츠를 어디서 어떻게 즐겨주길 바라나.
달파란 듣는 사람 마음인 것 같다. 운전하면서, 지하철에서 들어도 되고, 방 안에서 집중해서 들어도 되고. 영상의 경우 화면이 사람을 홀리는 게 있는데, 오디오만 가지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에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어떤 리듬감을 줄 수 있을지 궁금하다. 생방송도 일방적인 방송도 아니라서 언제든지 재생을 멈출 수 있다. 그래서 음악을 길게 안 썼다. 좀 길게도 작업해봤는데 음악을 끝까지 듣지 않고 빨리 다음으로 넘어가고 싶은 욕구가 생기더라.
김태성 <남과 여>는 자기 전 생각이 제일 많을 때, 가장 심란할 때 들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걱정이 많다. 정말 공들여서 작업했는데 사람들이 넘겨버리면 어떡하지? 피드백 중‘마가 너무 많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그걸 상상력으로 채워넣는 작품이라고 열심히 설득했다. 최근 소비되는 콘텐츠의 속도감을 못 따라갈까봐 걱정이다.
방준석 정보만 들어 있다면 빨리 듣기 위해 뒤로 넘기는 게 가능하지만, 체험적으로 접근한 오디오 시네마는 다르다. 집중해서 들을수록 가져갈 수 있는 게 많긴 하다. 현대인에게 그런 호흡이 있긴 할까 궁금하기도 하다. 하지만 오디오 시네마라는 프로젝트를 투자해서 만든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오디오는 1인칭으로 소비된다는 거다. 어디서 듣든지 간에.
달파란 음, 방금 사운드 아이디어가 하나 생각났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정말 재미있는 걸 할 수 있다. (웃음)
김태성 사실 나도 하나 떠올랐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