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런트 라인]
'환상의 마로나'가 풍기는 행복의 냄새
2020-07-15
글 : 송경원
[송경원 기자의 프런트라인]

이것은 비평도 분석도 아니다. <환상의 마로나>에는 그런 작업이 구태여 필요치 않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다시 읽기’ 정도가 어떨까 싶다. 모두에게 한번쯤은 있었고, 있을지도 모를 ‘마로나’라는 이름의 기억을 다시 읽기. 혹은 아직 경험하지 못한 추억을 상상하기. 1997년 9월 30일 <신해철의 FM음악도시>의 마지막 코멘트. “왜 사느냐는 물음에 답하려 철학과에 갔지만 알 수 없었고 생각하지 않고 살다가 음악도시를 그만두는 이제야 그 답을 알았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사는 것이다.”

너라는 우주를 만나

유튜브 알고리즘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겨, 최근엔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이하 <알쓸신잡>)의 짧은 편집 영상들을 자주 보는 편이다. <환상의 마로나>를 두고 어떻게 첫걸음을 떼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고 있을 즈음 <알쓸신잡> ‘소크라테스를 죽인 것도 민주주의?’라는 제목의 영상을 보고 찌릿한 기분이 들었다. 비유하자면 끊어져 있던 시냅스들이 강한 전류를 타듯 연결되는 감각이라고 할까.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다수의 폭정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게 이 영상의 요지다. 대개 죽음을 받아들여 사회적 약속을 지킨 소크라테스의 선택에 좀더 주목해왔던 것과 달리 패널들은 그를 둘러싼 조건에 대해 명료한 입장을 설명해주었다. “아테네가 일어섰다가 망하는 100년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인간이 무서워진다.” 유시민 작가는 세월에 무너져버린 높은 성벽과 빛바랜 갑옷들을 언급하며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가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오늘날 인류가 기억하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의 의미는 삶의 가치를 증명하는 자존적인 선택이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통해 이름을 남기고 인류의 역사 속에서 영생을 얻었다, 는 설명. 직접 실천하긴 힘들지만 그래서 더욱 이상적이고 숭고한 이야기. 종종 아무 연관도 없어 보이는 것들이 문득 계시처럼 한줄로 주르륵 꿰어지는 경우가 있다. 마로나와 소크라테스, 두 죽음을 나란히 접한 뒤 문득 궁금해졌다. 두 존재가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남긴 건 비교적 명확하다. 삶의 의미와 행복의 가치에 대해서는 수만 가지 단어로 설명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감히 짐작조차 어려운 것은 두 존재가 느꼈을 감정들이다. 요컨대 마로나와 소크라테스는 행복했을까.

마로나는 진짜 행복했을까

오프닝부터 가슴이 일렁이고 눈물이 흐른다. 그 벅차고 미안한 감정에 사로잡혀 뭐라도 끄적여 꺼내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막상 펜을 잡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고 만다. 이 미안하고 행복한 우화는 딱히 비평이나 분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걸. <환상의 마로나>는 설명을 따로 보태지 않아도 좋을 만큼 누구나 공감할 법한 이야기를 쉽고 직관적으로 그린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린다’라는 행위다. 애니메이션의 특권인 변형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이 행복한 견생 앞에 이름표를 붙인다면 ‘감정과 감각의 형상화’ 정도가 어떨까 싶다. 이런 종류의 영화에 필요한 것은 이해가 아니라 대화다.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 ‘마로나의 삶’이 끝난 자리에서 당신의 가슴 밑바닥 묵혀둔 진창에는 무엇이 피어나는가. 머릿속에는 어떤 질문들이 싹트는가.

<환상의 마로나>를 보고 난 뒤 떠오른 의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왜 마로나의 견생이 굳이 그렇게 길 위에서 끝났어야 했는가, 다. 정정하겠다. 이건 영화를 보자마자 든 의문이다. <환상의 마로나>는 끝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도로 위에 새겨진 백묵 질감의 스키드마크, 아스팔트 위의 얼룩을 보자마자 왈칵 눈물부터 쏟아질 것 같을 때 마로나는 관객을 위로하듯 차분하게 말을 건넨다. “여기는 영점의 영점이다. 무가 되는 순간. 이름도 없고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는.” 이 독백은 현재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시킨다. 마로나라고 불렸던 개가 도로 위에서 죽었다. 거기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지만 우리가 목격함으로써 마로나는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관객의 기억 속에서 생명을 얻는다. 왜 굳이 마로나를 죽였어야 했느냐는 나의 질문에 안카 다미안 감독은 “이 이야기는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더 사랑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고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 다른 존재의 우주를 들여다본다는 것. 네가 되어본다는 것. <환상의 마로나>는 그 불가능한 체험을 애니메이션의 힘을 빌려 실현한다.

<환상의 마로나>는 로드킬을 당한 개 마로나가 본인의 기억을 더듬어 직접 들려주는 생의 기록이자 함께 지켜보는 우리의 기억이다. 마로나 왈, “다들 괜찮다면 내 인생의 영화를 돌려보려 한다”. 우리는 마로나라 불렸던 개가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결과를 이미 알고 있다. 말하자면 이건 하나의 생명이 기억으로 완성되어가는 이야기다.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기억의 영화관과 함께 영화는 마로나의 삶을, 온전히 마로나의 관점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지금도 곳곳에서 안타까운 삶을 보내고 있을 수많은 유기견들, 로드킬 당해 도로 위 얼룩으로 사라져간 개들을 대표해서 말이다. 때문에 마로나는 세상을 떠나 또 다른 우주로 가야만 한다. 죽음으로써 존재를 증명하여 영원이 된 소크라테스처럼.

<환상의 마로나>는 견생을 통해 행복의 의미를 되짚는 정교한 우화, 그러니까 만들어진 이야기다. 마로나는 잡종견으로 태어나 세명의 인간과 연을 맺으며 피곤하고 안타까운 생을 살아간다. 곡예사 마놀은 행복으로 충만한 어린 시절, 건설업자 이스트반은 규칙과 규율 속에 사회화되어가는 청소년기, 조숙한 소녀 솔랑주는 주어진 삶에 무뎌진 어른의 시기를 각각 상징한다. 이야기 전체가 인간의 삶과 행복에 대한 은유인 셈이다. 모든 비유법은 추상을 구체화할 목적으로 사용된다. <환상의 마로나>는 행복이란 추상을 견생에 빗대 구체화한다. 우리는 미래를 살거나 과거에 붙잡힌 채 종종 발밑에 핀 꽃의 아름다움을 놓치곤 한다. 행복은 방향이나 목표가 아니다. 본래 오로지 지금의 상태를 설명하는 감정이어야 한다. 충만하게 차올라 그것만으로도 온 우주가 채워지는 시간. <환상의 마로나>는 그 감각을 직접 그려서 전달한다. 안카 다미안 감독은 개들이 자신의 스승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행복 한가운데 있을 때조차 지금의 행복이 눈녹듯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하지만 개들은 오직 눈앞의 시간에 집중하는 법을 알고 있다.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단순하다. 만약 행복이란 단어가 형태를 가지고 있다면 아마도 당신 곁에 함께 있는 개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환상의 마로나>는 애니메이션이기에 가능한 특권들을 활용하여 인간이 바라는 개의 모습을 상상하는 대신 개들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

추상에서 추상으로, 언어를 거치지 않는 애니메이션의 힘

마놀이 아홉에게 “이제부터 ‘마놀의 아나’라고 소개하는 거야”라고 말할 때 마로나는 생각한다. “이제껏 뭔가를 가져본 적이 없는데 갑자기 많은 것을 갖게 되자 다 망칠까봐 겁이 났다.” 이건 소유에 대한 놀라운 전환을 제시한다. 마놀의 아나, 라고 했을 때 나 역시 당연히 마놀이 마로나의 주인이라고 착각해버렸다. 그런데 마로나는 당연한 듯이 자신이 마놀을 가졌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이건 마로나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이야기이므로 마로나의 말이 옳다. 마로나는 나만의 보금자리, 나만의 이름, 그리고 자신만의 마놀을 가졌다. 어린 시절 엄마 개는 말했다. “인간은 우리말을 알 필요 없지만 우리는 인간을 이해해야 해. 자신을 지키려면 인간의 말을 배워라.” 마로나의 엄마가 짚어준 진리처럼 이것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인간의 언어를 빌려 풀어낸 이야기지만 이야기의 주체와 주인은 온전히 마로나다.

우리는 개가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사실 알 수 없기에 의인화라는 우회로를 쉽게 택하곤 한다. 그 순간 이야기는 개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것이 되어버린다. <환상의 마로나>는 인간과 동물을 단순히 위치와 형태만 치환하는 의인화와는 결이 다른 길을 간다. 사실 모든 예술매체는 은유와 상징이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감정을, 그 추상적인 형태를 완벽히 설명할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사건을 짜내고, 상황을 상상하여, 이야기라는 길고 번거로운 과정을 빌린다. 이때 애니메이션의 표현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언어가 되기도 한다. 마로나의 감정을 언어로 옮기면 담아지지 않고 문자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려가버리고 말 것을, 그림이라는 추상적인 표현방식, 그러니까 이미지 언어로 담아낸다. 마로나의 의인화가 인간을 위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애니메이션의 이야기, 그러니까 내러티브의 중력은 인간으로부터 자유롭다. 감정과 감각을 그대로 형상화하는 자유분방한 작화 덕분이다.

<환상의 마로나>에서 반복되는 핵심 이미지는 우주다. 아홉이었던 시절 마로나는 기억한다. 행복은 숫자 9 모양 같고 우유 맛이 난다고. 이런 완벽한 순간들은 복잡한 이미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몽글몽글한 수채 물감의 번짐, 흑백과 간단한 실루엣으로만 표현되는 이 순간은 그야말로 충만함으로 넘쳐난다. 여기까진 인식 바깥의 감각들이다. 영화는 여기서 한 가지 더 재치를 발휘하여 이후 이어질 핵심 이미지를 잡아낸다. 아홉이라는 숫자를 태양계의 행성에 빗대는 것이다. 책에서 마주한 우주의 이미지가 펼쳐지고 아홉과 형제들은 책 속으로 들어가 각각의 행성을 돌아다니며 신기한 여행을 한다. 이후 마로나에게 행복이란 우주가 된다. 오직 너와 나, 두 존재만으로 가득 채워지는 우주. 당연한 말이지만 이것은 사실의 재현이 아니라 감각과 의미의 형상화다. 달리 말하면 이야기 이전의 재현. 여기서 애니메이션과 영화의 근본적인 차이를 하나 짚고 넘어가겠다. 애니메이션에 대한 정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본질적으론 추상적인 감각에 동작과 움직임, 그러니까 생명을 부여하는 작업이라고 믿는다. 영화가 현실-이미지를 판화처럼 찍어낸다면, 애니메이션은 감각과 감정을 직접 그려낸다.

영화는 침묵을 통해 완성된다. 예컨대 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당나귀 발타자르>(1966)에서 관객의 감흥이 피어나는 지점은 당나귀의 행동과 이미지가 아니라 긴 침묵이다.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2001)에서도 중요한 건은 “우리 헤어져”,“그래 헤어지자”라는 대화의 내용이 아니라 두 대화 사이에 자리한, 대답이 돌아오기까지의 숨 막히는 침묵의 시간이다. 영화가 시간의 예술이라면 바로 이 ‘사이’에 있는 침묵의 시간을 필름 위에 새기기 때문이다. 영화는 침묵으로 채워진 백색의 시간을 통해 관객에게 공감할 자리를 내어준다. 보이는 것과 보여주지 않는 것 사이의 긴장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더듬어나가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반면 애니메이션은 감정이라는 추상을 직접 추상적인 형태로 묘사할 수 있다. 영화 내러티브가 관객이 자리할 공백을 만드는 작업이라면 애니메이션은 관객의 망막과 뇌리에 직접 그림을 새겨넣는 작업이다. 둘 다 움직이는 그림(Moving Picture)이지만 하나는 사진과 이야기 재현에 뿌리를 두고, 다른 하나는 움직임과 형상-직관을 최우선으로 한다.

<환상의 마로나> 속 점, 선, 면 나아가 우주의 이미지는 ‘개가 인간을 보며 느끼는 감정과 감각’이라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상태를 직접 투사해 물리적으로 다듬어낸 형태다. 잡종견으로 태어난 마로나의 삶은 인간의 시각에서 보자면 미안하고, 슬프고, 험난한 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마로나 본인은 어떻게 느꼈을까. 영화는 명확하게 답한다. ‘행복은 작은 것’이라고. 가령 곡예사 마놀은 필사적으로 삶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물이다. 마놀은 기분파이며 마로나에게 완전히 충실하다. 둘 사이의 교감은 곡예와 하나되어 곡선으로 발현된다. 일과 놀이가 구분되지 않고, 매 순간이 모험으로 가득하던 시절, “우린 가난해”라는 마놀의 말에 마로나가 답한다. “가난? 농담이죠? 이 정도만 있어도 난 제일 가는 부자개예요.” 뒤이어 작은 방의 지붕이 열리고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공간은 우주가 된다. 나는 근래 행복에 대한 이런 완벽한 이미지를 본 적이 없다. 마로나의 커다란 눈동자는 마놀로 가득하고 마놀의 시선 역시 마로나로 채워진다. 서로가 서로의 우주가 되는 순간, 마침내 마놀과 마로나가 한몸이 되어 나선형으로 하늘로 치솟아 오른다. 문자 그대로 ‘너라는 우주가 되는’ 이 장면은 변형과 직유, 애니메이션에 허락된 환상의 정수라 할 만한다. <환상의 마로나>는 마로나의 감각을 상상하고 감정을 그려내 마침내 우리로 하여금 ‘네가 되어보는 꿈’을 꿀 수 있게 해준다.

아홉, 아나, 사라가 끝내 마로나여야 했던 이유

다시 돌아가,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통해 이름을 남겼다. 그가 그것을 바랐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죽음은 그의 이름을 영원의 반열로 끌어올린다. 내 두 번째 질문은 여기서 시작한다. 우리가 기억하는 건 소크라테스라는 존재인가, 아니면 그의 이름인가. 소크라테스라는 대명사, 그 안에 함축된 인생이라는 스토리텔링이 곧 소크라테스라는 인간 자체라고 할 수 있는가. 한마디로 이름과 존재는 분리되지 않는 일체인가. <환상의 마로나>를 보면서 든 두 번째 질문은 왜 제목이 ‘마로나’냐는 거다. <환상의 마로나>는 ‘아홉’이 ‘마로나’가 되기까지, 세명의 인간과 만나며 겪은 시간들을 담아낸다. 곡예사 마놀에게 아홉은 ‘아나’였고, 건설업자 이스트반에게 아홉은 ‘사라’였으며, 조숙한 소녀 솔랑주에게 아홉은 ‘마로나’였다. 마로나에게 있어 이름은 자신을 증명하는 호칭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다. 아홉, 아나, 사라, 마로나, 뭐라고 불리든 그는 오직 자기 자신일 뿐이다. 마로나는 견종에 얽매이지 않았던 엄마처럼 단지 사랑스런 한 마리 개였으며 동시에 이 모든 이름이기도 하다. 마로나는 그저 마로나지만 엄마와 함께할 땐 아홉이었고, 마놀에겐 아나였으며, 이스트반에겐 사라였다. 마로나의 이름은 관계를 설명하는 방식인 셈이다.

단순하게는 마로나라는 이름으로 가장 긴 시간을 살았고, 그 이름으로 생을 마감했기 때문에 마로나일 것이다. 또 다른 이유를 상상해보면 지난한 과정을 거친 후에 비로소 받아들인 상태, 삶에 대한 일종의 체념 같은 인정이 묻어나는 이름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행복은 모든 것인 양 충만하지만 찰나처럼 스쳐지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마로나는 옛날의 행복에 얽매여 추억을 회상하며 살아가지 않는다. 그저 지금 주어진 것들에 충실할 뿐이다. 솔랑주와 함께했던 공놀이의 기억을 빠르게 서술하는 영화는 마로나의 입을 빌려 말한다. “완벽한 순간이 있다면 이것도 그중 하나리라. 이런 순간을 위해서라면 개의 삶도 가치가 있다.” 동시에 행복으로 충만했던 순간뿐 아니라 반복되는 일상이라 기억할 것도 없는, 매일매일 인에 박여 순식간에 흘러가는 그 시간도 삶의 일부라는 사실. 행복으로 충만했던 아홉이나 아나가 아니라 마로나라는 이름을 택한다는 건 그와 같은 의지의 발현이라 할 만하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들 한다. ‘소크라테스’라는 이름, 그 안에 실린 무게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되묻는다. 하지만 마로나라는 이름은 거꾸로 그 견고한 의미의 사슬을 끊어버린다.

마로나가 말하는 개의 행복은 단순하다. 자는 동안 지켜줄 인간을 가질 것. 그것은 무엇을 위해 만들어진 목적론적인 사고가 아니다. 그저 있음으로써 채워지는 아름다운 관계, 충만한 경험이다. <환상의 마로나>는 질문한다. 당신에게 그런 순간, 그런 사람, 그런 경험이 있느냐고. 그렇다고 애써 찾으려고 헤맬 필요는 없다. 그건 본래 그러한 것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며 언젠가는 당신이 마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신이 무언가를 좇느라 정신이 팔려 미처 알아보지 못한 채 흘려보내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한편의 애니메이션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한편의 영화가 어떤 시간을 선사할 수 있을까. 여기 마로나라는 이름의 우주가, 이걸 보는 당신 역시 하나의 우주라는 사실을 따뜻한 목소리로 읊조린다. 문득 마로나의 노랫말 ‘행복은 작은 것’ 위로 가수 신해철이 말했던 행복론이 겹쳐 떠오른다. “꿈을 이루려는 과정에서 진짜 잃어서는 안되는 소중한 무언가를 잃지 마시길. 당신은 태어난 것으로 이미 의무를 다했다. 나머지 생은 보너스다. 그러니 부디 하루하루 행복하자.” 마로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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