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사라진 시간' 속 형구의 삶은 왜 바뀌었을까
2020-07-15
글 : 박정원 (영화평론가)
버티는 의지

한 남자가 있다. 그는 경찰이고 아내와 두 아들을 가족으로 둔 가장이다. 거나하게 술에 취한 밤이 지나고 그의 삶이 뒤바뀐다. 이제 그는 초등학교 교사고 아내와 아들이 없는 미혼의 남자다. 남자는 자신을 전자의 인물로 기억하는데 그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그를 후자의 인물로 여긴다. 남자의 설움은 그 간극에서 비롯된다. 영화가 절반쯤 진행됐을 때 등장하는 형구(조진웅)의 이같은 돌연한 ‘변신’은 영화를 전혀 다른 방향과 색채로 이끌어가며 관객을 혼돈 속으로 밀어넣는다. 이제 형구의 목표는, 그리고 영화의 관심사는 수혁(배수빈)과 이영(차수연) 부부의 사고사나 이를 둘러싼 마을 사람들의 은밀한 비밀이 아니다. ‘왜’ 형구의 삶이 바뀌었는지 혹은 ‘어떻게’ 하면 돌아갈 수 있는지, 다.

경찰이었던 남자가 교사가 되어 끝나는

‘왜’ 혹은 ‘어떻게’에 대한 답을 고민하기 전에 ‘무엇’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영화를 보면서 문득 든 생각은 두 가지 직업에 대한 것이었다. 경찰과 교사라는 서로 다른 직업. 영화는 왜 이 두 직업을 형구의 직업으로 설정한 것일까. 누가 봐도 경찰의 외견을 가진 인물이 아기자기한 교실의 교단에 서게 될 때의 부조화가 주는 효과를 기대한 것일까. 혹은, 경찰과 교사는 ‘무엇’이 다른가. 경찰은 범죄 사건을 수사한다면, 교사는 학생들을 길러낸다. 경찰 형구는 사망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을 조사하며 수색한다면, 교사 형구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인도한다. 경찰 형구의 직업적 화두가 ‘당신들 어떻게 죽었어’라면, 교사 형구의 직업적 화두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다. <사라진 시간>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경찰이었던 남자가 교사가 되어 끝나는 영화다. 망상인지 악몽인지 저주인지 원래의 현실인지 명확한 답을 내릴 순 없지만, 형구는 끝끝내 경찰로서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조용히 책을 뒤적이며 수업 준비를 하는 장면의 교사 형구의 모습이 어딘지 찡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결국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구의 상황은 이유를 알 수 없이 불시에 들이닥치는 재난과 같다. 형구가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는 ‘왜’라는 질문은 도처에 널려 있는데 정작 정답의 자리는 텅 비어 있는 상태다. 자신을 경찰이 아닌 교사로 기억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이유를 묻거나 이제 그만하라고 소리를 질러봐도 그 누구도 해결해주지 못한다. 말 그대로 지금까지의 형구의 삶은 누구도 되찾아줄 수 없는 ‘사라진 시간’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앞서 시간의 사라짐을 겪었던 다른 인물이 있다. 수혁의 부인 이영이다. 그녀에게 하루 중 낮은 자신으로서 살 수 있는 시간이지만 밤은 자신이 무엇이 될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그리고 다음날이 되면 기억할 수 없는 블랙홀 같은 시간이다. 이영은 자신의 비밀을 알고 철창을 설치하러 온 마을 사람들에게 말한다. “궁금하시죠? 제가 왜 이렇게 됐는지.” 해균(정해균)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궁금하지 않다며 겁에 질려 도망가버린다. 잔인하지만 평범한 반응이다. 어쩌면 이 영화에 ‘왜’에 대한 정답이 없는 것은 마을 사람들이 ‘왜’를 묻지 않은 채 뒷걸음질치던 이 순간에 예고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어떻게’이다. 어떻게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형구는 다양한 시도를 한다. 무작정 자신이 원래 살던 집이나 아들의 학교에 찾아가 행패를 부리기도 하고, 악몽은 가장 무서운 순간 깨어난다며 갑자기 해균을 때려눕히고 불을 지른다. 그러나 잿더미가 된 비닐하우스에서 실려나온 것은 해균의 시체가 아닌 고라니의 사체다. 전문가를 찾아가 상담을 받아보거나, 그를 취하게 만들었던 송로주를 얻어다 미친 듯이 마시기도 한다. 모든 것이 헛된 시도로 돌아가지만 이 잉여적 과정을 포착하는 영화의 밀도가 짙다. 형구가 비닐하우스에 불을 지르고 도망갈 때의 긴박한 리듬감이나 괴롭게 송로주를 마시는 형구를 담아내는 롱테이크는 결과의 허망함에 비해 능청스럽게 감각적이다. 마치 깨고 일어나면 온몸을 땀에 흠뻑 젖게 만드는 악몽처럼, 혹은 실제로 겪은 것만 같은데 알고 보니 환영이었던 어떤 신기루처럼. 형구가 돌아가기 위해 노력할수록 그는 점점 더 가능성의 궤도로부터 이탈하며 일말의 희망조차 증발돼버린다.

가족사진에 대한 사유

‘어떻게’의 시도가 모두 실패로 돌아간 뒤 영화는 슬며시 분위기를 바꿔 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수업과 상담 등 교사로서의 시간을 보낸 형구는 얼마 뒤 휴직을 하고 수안보온천에 간다. 영원히 옛날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르는 절망과 무력의 순간, 카메라가 비추는 것은 욕탕에 앉아 있는 형구의 뒷모습이다. 수증기로 가득 찬 따듯하고 노곤한 기운의 공간 속 그의 둔중한 존재감이 덩그러니 버티고 있다. 다음 장면에서 형구는 뜨개질 강사 초희(이선빈)와 마주친다. 초희는 형구에게 뜨개질을 가르쳤었다 말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형구의 반응이다. 그는 놀라워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 자신이 열심히 했느냐고 묻기까지 한다. 형구가 이같은 둔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후 다시 등장한다. 노천탕 속 형구의 옆으로 수혁, 이영과 닮은 남녀가 다가와 앉는다. 형구는 그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은 채 일어나 탕을 빠져나간다. 온천에서의 휴가는 귀기 서린 꿈인 것일까. 아니면 그간 너무 많은 피로감을 느낀 형구의 학습된 무심함일까. 그도 아니면 형구는 이제 숨겨진 해답의 열쇠를 찾거나 사라진 것들을 되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을 멈추고 자신에게 주어진 생의 시간을 고요히 견디기로 한 것일까. 그의 이러한 모습은 이후 자신의 아픔을 털어놓는 초희에게 “다들 어쩔 수 없잖아요. 울지 마요. 혼자만 그런 게 아니니까”라고 나지막이 위무하는 순간과도 조응한다.

형구와 초희는 온천 인근의 유적지에 갔다가 공사 중인 불상을 발견한다. 초희는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원래의 멋을 되찾을 수 없을 것이며 그건 진짜가 아니라고 아쉬워하지만, 형구는 담담한 얼굴로 괜찮을 거라 말한다. 절대적으로 순수한 원형을 추구하는 것과, 조각나고 흩어진 것들을 보존하려 애쓰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형구는 후자의 힘을 긍정한다. 다신 돌아갈 수 없는 이상적 과거로 복귀하거나 잃어버린 것을 찾아가는 것이 아닌, 그럴 수 없음을 알고 남겨진 파편과 잔해를 간직하여 버티는 의지로서의 힘을. 그러고 보니 영화의 초반부 수혁은 열지 못했으나, 영화의 후반부 형구는 열어보았던 진규(노강민)의 사물함이 떠오른다. 그 안에는 불행한 가족사의 표상으로서의 찢어진 사진 조각이 아닌 진규만의 절실한 기억이자 사적 진실이었던 가족사진이 있었다. 형구가 불가피한 재난 혹은 악몽 혹은 아픔 끝에서 맞닥뜨린 마음과 태도는 애초 그 작은 사물함 속에 고이 들어 있었던 셈이다. 엔딩 시퀀스, 무표정으로 거리를 걸어가는 형구가 오프닝과 같은 모습으로 다시 등장했다가 프레임 밖으로 사라진다. 그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길고 긴 시간을 지나 “참 좋다”라는 힘을 주는 말과 함께 돌아온 남자는 전과 달리 생생한 색을 띠고 있다. 우리의 삶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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