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영의 네오 클래식]
[김호영의 네오 클래식] 왕가위의 '아비정전'
2020-08-03
글 : 김호영 (한양대 프랑스언어문화학과 교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아비정전> 阿飛正傳

감독 왕가위 / 상영시간 100분 / 제작연도 1990년

영화 <아비정전>은 아비(장국영)와 수리진(장만옥)이 처음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아비는 체육관 매점에서 일하는 수리진에게 콜라를 사며 유혹의 말을 건넨다. 이어서 등장하는 밀림 장면. 옅은 안개에 싸인 열대 밀림의 풍경이 느리게 이동하는 카메라에 담기고, 그 위로 영화 제목과 서정적인 기타 선율이 흐른다. 그러고는 다시 아비와 수리진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짧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이 낯선 밀림 이미지는 영화 마지막에서 아비가 죽기 직전 기차를 타고 지나가며 보는 풍경이다. 그러니까 영화는 처음부터 그 끝을, 주인공의 죽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같은 영화의 구조는 아비의 마지막 독백을 떠올리게 한다. ‘어디로도 갈 수 없었던 발 없는 새, 처음부터 죽어 있었던 새.’

각자의 시간을 사는 인물들

영화의 배경은 1960년대 초 홍콩. 아비와 수리진은 연인 사이다. 아비가 미래에 대한 계획 없이 단순한 동거 관계에 머무르려 하자, 실망한 수리진은 그를 떠난다. 아비는 곧 댄서 루루(유가령)를 유혹하는데, 소극적인 수리진과 달리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아비와의 관계를 놓지 않으려한다. 그사이, 아비의 집 근처에서 배회하던 수리진은 순찰 중인 한 경찰(유덕화)과 얘기를 나누게 되고 조금씩 상처를 극복해간다. 경찰은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고 관계를 이어가려 하나, 그녀의 연락이 없자 포기하고 선원이 되어 홍콩을 떠난다. 한편 아비는 자신을 버린 친모를 찾아 필리핀으로 향하는데, 친모로부터 만남을 거절당한 후 낙심한 채 거리를 방황한다. 위조 여권을 구해 필리핀을 떠나려다 폭력 사건에 휘말리게 되고, 결국 기차 안에서 괴한이 쏜 총에 맞아 숨진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강박적으로 ‘시간’을 강조한다. 아비는 수시로 시간을 묻거나 말하고, 여러 번 시계가 클로즈업되어 화면을 점유하며, 틈틈이 초침 소리가 화면 어디선가 들려온다. 마치 일정한 속도로 진행되는 시간의 구조가 삶을 온전히 통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가 진정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규칙적이고 객관적인 시간이 아니다. 그와 정반대로, 주관적이고 불연속적인 시간이다. 영화 속 인물들 모두가 각자 자기만의 시간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수리진은 아비에게 처음 호감을 느낀 그 1분을 잊지 못하고 힘들어한다. “순간이란 정말 짧은 시간인 줄 알았는데, 때로는 오랜 시간이 될 수도 있네요”라고 고백할만큼 1분은 영원처럼 남아서 그녀를 괴롭힌다. 아비는 매 순간 거대한 과거에 짓눌려 산다. 그에게 현재란 무의미한 반복의 연속일 뿐이며, 먼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 처음과 마주하는 것만을 꿈꾼다. 경찰과 루루도 이들과 다르지 않다. 이들은 모두 같은 시간대를 지나고 있지만, 동시에 각자의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다양한 방식으로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시간을 표현한다. 가령 경찰과 수리진의 에피소드에서 빠르게 이어지는 동일 장소의 숏들은 사실은 매번 다른 날 저녁의 만남을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서로와의 시간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두 사람의 내면을 암시한다. 또 친모와의 만남을 거절당한 채 뒤돌아 나오는 아비의 뒷모습을 긴 슬로모션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그 짧은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 하는 그와 친모의 마음을 동시에 담고 있다. 때로는 쏜살같이 지나가고 때로는 정지된 듯 천천히 흐르며, 한번에 긴 시간대를 뛰어넘다가도 처음으로 되돌아오는 시간. 이 불규칙적이고 주관적인 시간은 이후로도 왕가위 영화들을 지배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영화 속 인물들이 살고 있는 주관적 시간은 모두 ‘과거’에 침식당해 있다. 아니, 이들은 모두 현재가 아닌 과거를 살고 있다. 왕가위의 영화에서 시간은 그 자체로 과거를 의미한다. 시간은 매 순간 현재와 과거로 나뉘지만, 모두들 눈앞의 현재를 외면한 채 가깝거나 먼 과거의 시간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다. <동사서독>(1994)의 동사와 서독도, <중경삼림>(1994)과 <타락천사>(1995)의 주인공들도 과거의 기억과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방황한다. 모두 과거에 사로잡힌 채 현재를 의미가 박탈된 공허한 시간으로 흘려보낸다. 이런 텅 빈 시간, 유예된 시간 속에서 사랑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각자 다른 시간대를 살아가는 인물들이 우연히 현재의 시간에서 만나 서로 가까워진다 해도 진정한 결합을 이루어낼 수는 없는 것이다.

<아비정전>은 ‘상실’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주인공들은 모두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잃었고 그 상실의 감정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 상실은, 영화를 만든 감독의 감정일 수도 있다. 영화 내내 잃어버린 시간과 잃어버린 정서를 복원하려 애쓰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다양한 사물과 공간들이 시간과 감정을 되살려내는 기호들로 소용된다. 루루와 수리진이 피우던 ‘크레이븐 A’ 담배, 아비의 클래식 자동차, 주인공들이 얘기를 나누던 ‘퀸즈 카페’, 늘 비가 내리던 텅 빈 밤거리, 거기에 더해지는 하비에르 쿠가의 맘보 등등…. 이 모든 시청각 기호들은 다채로운 문화와 삶의 양식이 뒤섞이고 불안과 절망, 무기력의 감정이 교차하던 1960년대 홍콩의 정서를 완벽하게 부활시킨다. 감독의 말처럼, “<화양연화>가 1960년대 일상생활의 복원에 충실한 영화라면 <아비정전>은 그 시대 청춘이 느꼈을 감정의 복원에 더 집중한 영화”인 것이다.

상실의 감정, 그리고 상실한 시간의 복원

상실의 감정에 시달리는 인물들과 상실한 시간을 복원하려 애쓰는 감독. 이들 모두는 상실이라는 감정의 선을 따라, 그 선 위에서 움직인다. 그리고 그 선은 관객의 감정선과 만난다. 살면서 어느 누가 상실의 고통을 경험하지 않았으랴. 어느 누가 현재를 부정하고 과거의 시간 속에서 헤매지 않았으랴. 감독은 관객이 스스로 상실의 감정을 소환하는 것을 돕기 위해 세심하게 영화적 장치들을 꾸며놓는다. 내러티브를 느슨하게 이완하거나 분절하고, 이미지와 사운드의 감각적인 물질성을 영화 전면에 내세운다. 그로 인해 의미가 지연되고 감각이 의미를 대체하는 지점에서, 관객이 마침내 묻어두었던 상실의 기억을 되살려낼 수 있도록 이끈다. 영화 <아비정전>이 낯선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점차 보편성을 획득해갈 수 있었던 것은 인물과 감독, 관객이 공유하는 이 상실의 감정 덕분이다.

영화가 세상에 나온 후 한참 뒤에, 우리는 한번 더 커다란 상실의 경험을 하게 된다. 배우 장국영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이다. 아비를 연기한 배우가 아니라 아비 그 자체였던 그는 영화 속 아비처럼 어느 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영화를 보며 감정을 공유했던 관객은 그의 죽음으로 영화 전체를 상실하는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그의 죽음이 영화를 영원한 현재로 만들어놓았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의 늙음과 쪼그라듦을 보지 못했기에 우리는 영원히 그를 아비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아마, 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삶이 끝나는 지점에서 영화가 다시 시작되어 영원한 현재로 지속될 거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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