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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날' 오정석 감독 - 정체된 시간을 견뎌 스스로 길을 찾기를
2020-08-20
글 : 조현나
사진 : 최성열

서울의 삶을 정리하고 거제도로 내려온 승희(김유라)는 우연히 할머니 집의 창고에서 발견한 낚싯대를 들고 바다로 향한다. 승희는 낚시터에서 만난 거제 청년과 함께 거제의 새로운 모습을 경험하고, 잊고 있던 추억을 상기한다. 생의 기로에서 한 걸음 물러나 거제의 풍경을 자신의 품에 담은 승희는 그렇게 눅진한 여름의 시간을 견디고 다음 걸음을 내디딜 채비를 한다.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를 보며 영화감독을 꿈꾼 오정석 감독은 단국대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 졸업 작품으로 <여름날>을 완성했다.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인 <여름날>은 제24회 인디포럼 폐막작으로 선정되었으며 상영 이후 관객의 호평이 이어졌다. 비가 잠시 멈춘 습한 여름날, 오정석 감독을 만나 그가 담아낸 승희의 여름날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영화의 배경이 거제도여야만 했던 특별한 이유가 있나.

=원래 구상했던 시나리오가 제작지원을 못 받게 되면서 다른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었다. 대학원에 입학하기 전, 거제의 외할머니 댁에서 한달 정도 지낸 적이 있는데 그때의 풍경이 떠올랐다. 영화를 계속할지 말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던 때였다. 일종의 피신이었던 거지. (웃음) 도심과 시골의 경계에 있는 거제도란 공간에서 내가 잠시 숨을 고르며 보냈던 시간들. 그런 정지된 시간들을 영화에 담아보고 싶었다.

-그럼 촬영지도 외할머니 댁이었나.

=그렇다, 승희가 거주한, 농막이라 불리는 컨테이너 박스와 밭 전부 외할머니 소유다. 나도 그 컨테이너 박스에서 생활했고 실제 나의 외할머니가 승희의 할머니 역으로 출연하셨다. (웃음) 나도 잘 못 알아듣는 외할머니의 사투리를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 예전부터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잘 담긴 것 같다.

-카메라는 계속 승희에게 거리를 둔다. 나무나 타인과 같은 피사체를 중간에 두고 걸쳐 촬영한 경우가 많고, 거리를 좁힌다 해도 주로 승희의 뒷모습을 촬영했다.

=우선 공간을 잘 보여주고 싶었다. 승희가 있는, 그리고 승희가 바라보는 공간들에 초점을 맞춰서 거기에 녹아든 승희의 감정을 조명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거리를 두면 배우의 동선이 좀더 자유로워질 것 같았다. 뒷모습을 촬영한 이유는 드러날 듯 드러나지않는 승희의 감정들에 관객이 좀더 집중했으면 해서다. 우는 듯한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슬픔 같은 것들.

-거제에서 승희의 시간을 ‘유배당한 시간’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배급사와 상의하에 나온 문구다. 처음에는 승희가 마치 죄를 짓고 내려온 상황처럼 보일까봐 걱정했는데, 보다보니 잠시 쉬어가는 승희의 상황과 유배라는 단어가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더라.

-영화에서 승희의 전사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혹시 구체적으로 생각해 둔 것이 있나.

=내가 생각해둔 설정이 있었지만, 김유라 배우와 미팅을 하며 배우에 맞게 많이 바뀌었다. 당시 김유라 배우도 회사와의 계약이 끝나가는 시점이라 또다시 다음 단계를 생각해야 하는 때였다. 그런 상황이 승희와 어울린다고 생각해 캐스팅했고, 또 그런 김유라 배우의 상황을 승희에게도 많이 녹여냈다.

-거제도라는 공간이 승희에게 그리 편치 않아 보인다. 친구는 서울에서 내려온 이유를 재차 묻고, 삼촌과 숙모는 승희가 다시 서울로 돌아가길 바란다.

=상황적으로 불편한 건 맞다. 하지만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컨테이너 박스만큼은 승희에게 편한 공간이지 않았을까. 내가 거제에 있을 때도 그 컨테이너 박스를 굉장히 평온한 공간이라 생각하며 지냈다.

-사실 승희는 컨테이너 박스에 있을 때보다 거제 청년과 있을 때 더 평온해 보였다. 거제 청년은 승희에게 거제에 온 이유나 언제 서울에 갈 예정인지를 캐묻기보다 그저 같이 폐왕성에 오르고 밥을 먹고 낚시를 하는, 묵묵히 곁에 있어주는 사람이다.

=거제 청년은 승희에게 위로가 되는 사람이었으면 했다. 낚시를 가르쳐주며 자연스럽게 만나고, 친구처럼 거제도를 함께 여행하는 느낌이랄까. 조선소 유니폼을 입힌 이유도 딱히 타인과 구별되지 않는 익명의 사람이 외지인인 승희를 따뜻하게 위로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거제 청년은 이름도 따로 설정하지않았다.

-거제 청년에 관해 김록경 배우와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

=사실 김록경 배우를 캐스팅할 계획이 없었다. (웃음) 내 단편 <출장>에 출연한 적이 있어서 원래 친분이 있는 사이인데, 어느 날 본인이 <여름날>에 출연하고 싶다는 거다.“나는 삼천포 출신이라 사투리도 자연스럽고, 조선소에서 일한 경험도 있다”며 엄청 어필하더라. (웃음) 당시 김록경 배우가 한창 낚시를 즐길 때이기도 해서, 그런 말에 넘어간 거지. 거제 청년은 어떤 사람인지, 특히 그의 감정이 사랑인지 아닌지에 관해 김록경 배우와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그때 나는 사랑보단 위로였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내비쳤고. 사실 전부 대사 없이 그가 즉흥적으로 연기해서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눠야 했다.

-조율 과정에서 김유라, 김록경 배우의 역할이 중요했겠다.

=맞다. 나는 장소와 이야기의 주제 정도만 느슨하게 정했다. 때문에 촬영 전에 어떤 대화를 나눌지 배우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시간이 길었다. 나는 배우 본연의 모습들을 많이 담고 싶었다. 예를 들면 “어…” 하고 망설이는 순간이나, “어머!” 하고 놀라는 감탄사들 같은 것. 이런 자연스러움을 담고 싶었다. 나도 이렇게 촬영을 해본 건 처음이라 매 순간 불안했다. 정작 배우들과 스탭들은 캠핑 온 것처럼 즐거워하고 편안해하더라. (웃음) 김유라 배우는 그래도 좀 긴장한 것 같았는데 김록경 배우는 워낙 긴장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더 그랬다. (웃음)

-그렇게 불안한 와중에도 대본 없이 간 이유는 무엇인가.

=원래 준비하던 시나리오가 엎어진 상황에서 내 나름대로 시험을 해보고 싶은 오기가 생겼다. 도움 없이 실험적으로도 영화를 만들 수있다는 걸 증명해보고 싶었다. 돈은 없지만 우리 좋은 성과를 거둬보자고 배우들과 의기투합하며 촬영했다.

-승희는 어둠 속에서 여러 번 등장한다. 밤길을 걷기도 하고, 정자에서 거제의 야경을 바라보다가 결국 불을 끄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영화 속 승희는 눅진하게 눌어붙은 더운 여름을 견뎌내고 있는 중이다. 승희가 어두운 골목길을 갈 때 휴대폰의 불빛으로 길을 비추며 걸어가지 않나. 이 정체된 시간을 견디고, 스스로 불을 밝혀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승희의 순간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폐왕성에 올라가는 승희는 자신의 길을 찾은 걸까.

=이제 거제도를 떠날 때라고 생각했을 거다. (웃음) 언젠가는 떠나야한다고 계속 생각하는 인물이다. 폐왕성은 거제 청년과의 추억이 담긴 장소이기도 하지만 승희의 앞날과도 비슷한 지점이 있다. 물안개에 가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거제의 바다와 섬들이 보이는 거지. 그런 경치를 바라보는 승희로 영화를 마무리하고 싶었다.

-차기작 계획에 관해 이야기해준다면.

=구체화되진 않았지만 <여름날> <가을날> <겨울날> <봄날> 이렇게 연작을 찍을 수 있으면 좋겠다. 김유라 배우에게 “서른 즈음에 <겨울날> 찍을래요?” 하고 물어보기도 했다. (웃음) 즉흥연기를 담은 작품이 처음인데 생각보다 재밌더라. 인물의 실제 삶을 자연스럽게 담아내는 작품들을 더 만들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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