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랑아범(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추리닝’ 영배(영화 <거북이 달린다>) 등 배우 신정근이 그간 보여준 인물들은 액션보다는 리액션이 주요 임무였다. 주연배우를 살리고, 작품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자신이 맡은 캐릭터를 관객에게 눈도장 찍은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강철비2: 정상회담>에서 그가 연기한 장기석 북한 잠수함 부함장은 조선사(유연석) 북한 국방위원장이 퇴장한 영화의 중반부부터 배우 정우성이 연기한 한경재 대통령과 서사를 주도적으로 이끄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인상깊다. 장기석은 오랫동안 북한 핵잠수함을 책임진 전문가이지만 당에 올바른 소리를 했다가 좌천당한 비운의 캐릭터다. 자신의 이름과 계급을 잘못말한 최고 권력자에게 “장지석이 아니라 장기석입네다. 중장이 아니라 중좌입니다. 장군님이 철칙 시켜주셨습네다”라고 고칠 만큼 기개를 갖춘 인물이기도 하다. 과묵하고 올곧은 인물이 보여주는의외의 진심이 서사에 힘찬 동력을 불어넣는데, 이것은 “무뚝뚝하지만 따뜻한 인간애를 가진”(배우 정우성의 표현) 신정근의 개인적 면모와도 연결돼 흥미롭다. 최근 <외계인>(감독 최동훈) 촬영 때문에 바쁜 그를 만나 더 자세한 얘기를 들었다.
-장기석 부함장에 매료된 관객이 많다.
=촬영할 때만 해도 이런 반응이 나올 줄 전혀 예상치 못했는데 몸둘 바를 모르겠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어땠나.
=쉬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제껏 맡아왔던 역할들과 많이 달랐고.
-어떤 점에서 달랐나.
=출연 분량이 전작에 비해 훨씬 많았고, 그래서 부담스러웠다.
-장기석은 어떤 인물로 다가왔나. 당에 올바른 소리를 했다가 좌천당한 잠수함 부함장인데.
=그는 핵탄두를 장착한 잠수함을 오랫동안 책임진, 아시아 최고의 실력자다. 전문가이자 군인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양우석 감독이 왜 당신에게 장기석 역을 맡겼다고 생각하나.
=내 필모그래피를 보고 선택한 것 같진 않았다. 내 얼굴이 장기석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양우석 감독에게 물어보니, “한국의 토미 리 존스 같았다”고 하더라. 표정은 뚱한데 할 일을 묵묵히 하는 프로페셔널 같은 이미지를 갖춘 배우라고 했다.
=감독님에게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 있다. 눈썹이 처지면 불만스러운 표정이 나오는데 그걸 유심히 봐주신 것 같다.
-늘 그렇듯이 이번에도 산에 올라가서 시나리오를 읽었나.
=지난해 드라마 <호텔 델루나>를 찍고 있을 때 시나리오를 받은 까닭에 산에 올라가지 못했다. 잠을 제대로 못 자며 드라마를 찍었다. 틈틈이 시나리오를 읽으며 (장기석의) 북한 사투리 대사를 외웠다. 드라마 촬영이 끝난 뒤 이 영화 촬영까지 보름정도 시간이 생겼는데 그때 집중적으로 산에 올라갔다.
-영화의 초반부, 조선사 북한 국방위원장이 자신의 이름을 잘못 부르자 바로잡는 모습에서 장기석이 어떤 인물인지 단적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강직함, 그게 장기석을 설명하는 단어다. 그걸 잘 보여주는 게 관건이었는데 찍고 나니 장기석이 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에 옳은 소리를 할 만한 인물이었다.
-장기석이 입은 군복의 맨 위 단추가 채워져 있지 않던데.
=의상을 내 몸에 꼭 맞추진 않는다. 옷이 너무 각이 잡히면 인물이 옷에 갇힌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맨 위 단추를 풀어 약간 헐렁헐렁하게 입었다.
-조선사 위원장과 미국 스무트 대통령(앵거스 맥페이든)을 잠수함에서 내보낼 때 모자가 바람에 날려가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군모는 군인의 카리스마를 상징하는 도구인데 바람에 날려간 건 의미심장하다. 당에 올바른 소리를 한 뒤로 잠수함을 탈 일이 없는 사람이 다시 타면서 생긴 운명이랄까. 잠수함에서 나이가 가장 많고, 그런 작은 설정들이 장기석을 만들어낸 것 같다. 대본에도 장기석은 ‘타고났다’고 묘사됐다.
-넓지 않은 잠수함에서 장기석의 동선이 가장 활발해 인상적이었다. 그의 발길이 닿지 않는 데가 없다.
=잠수함이라는 공간에 적응하는 게 최우선 과제였다. 장기석이 조종실부터 비상 탈출구까지 잠수함의 이곳저곳을 왔다갔다하는 인물이라 오가는 데불편함이 없고, 뒷걸음질을 치더라도 턱에 걸리지않아야 하는 등 동선을 파악하는 데 집중했다.
-공간이 넓지 않아 제약이 많았겠다.
=숨막히지. 좁은 공간에 카메라도, 스탭들도 다 들어와 있으니까. 그럼에도 장기석은 활동 반경이 넓은 인물이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했다.
-조선사와 미국 대통령이 잠수함에서 퇴장한 뒤부터 장기석이 조선사 역할을 대신해 한경재와 함께 서사를 이끌어가는데.
=그때부터 잠수함 안에 38선이 생기고 피아가 명확해지지 않나. 한경재 대통령과 같은 배를 탔지만, 그럼에도 장기석의 목표는 하나였다. 장병들과 잠수함을 구하는 것. 그동안 주연배우를 받치는 역할을 해왔고, 그런 역할을 스스로 잘해왔다고 생각한다. 늘 수비수였다가 이번 영화에서 처음으로 공격수가 된 것 같다. 서사가 전개되면서 장기석은 계속 성장한다. 촬영할 때는 뭔지 모른 채 열심히 했는데 영화를 본 주변 사람들이 ‘인생캐(릭터)’라고 말해주더라.
-관객이 장기석이 등장할 때마다 응원하더라.
=장기석의 말을 듣지 않으면 잠수함이 폭발하니까, 영화가 끝나니까. (웃음)
-옛날 얘기도 해보자. 어린 시절 소방 의용대원이던 아버지 덕분에 극장에서 영화를 많이 보았다고 들었다.
=고등학생 때 연극반이었고, 영화잡지 <스크린>을 정기구독할 만큼 영화를 좋아했다. 배우가 되기로 한 결정적인 계기는… 연기 말고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극단 생활을 하기로 한 것도 그래서다. 서울에 올라와 처음 본 영화가 이소룡의 <정무문>이었고.
-1983년 극단 하나의 단원으로 연극을 시작했다고.
=무대라는 공간이 너무 좋았다. (“가족들의 반대는 없었나”라는 기자의 질문에) 당시 아버지가 중동에서 일하셨던 까닭에 내가 뭐라도 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하셨다. 그게 편했다.
-무대에선 주로 어떤 역할을 맡았나.
=번역극부터 창작극, 뮤지컬까지 다양한 작품을 두루 경험했다. 배우 송경철과 함께 연극 <맨홀 추락사건>을, 후배들과 함께 창작극 <혜화동 파출소>를 무대에 올렸던 기억이 난다. 특히 <혜화동 파출소>에선 노숙자 역할을 맡았는데 연극을 보러 온 관객이 실제 노숙자인 줄 알았다.
-돈벌이는 안됐겠다.
=내가 철이 없어서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다. 아내가 초등학생 과외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서 돈을 벌어야겠다 싶어 영화 오디션을 보았다.
-<와일드 카드>에 함께 출연한 배우 정진영이 이준익 감독에게 <황산벌>에 추천하면서 이준익 감독과의 인연이 시작됐는데.
=덕분에 <황산벌> 오디션을 보고, 김흠순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평양성>에서도 김흠순을 연기했다). 그 뒤로 <왕의 남자> <라디오 스타> <즐거운 인생> <님은 먼 곳에>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평양성> 등 이준익 감독의 거의 모든 작품에 출연해‘이준익의 페르소나’라 불리기도 했다.
-이준익 감독의 말에 따르면, 현장에 오면 불필요한 말이나 행동을 전혀 하지 않고 공간에 집중해 관찰하는 습관으로 유명하다더라.
=연극배우 시절, 무대 옆에 대기했던 습관이 몸에 밴 것 같다. 영화를 처음 작업할 때는 ‘바라시’(뒷정리)니 ‘가이다마’(스탭이 배우를 대신해 카메라 앞에 서는 일) 같은 일본 용어가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몰라서 그런 말들을 익히기도 했다. 지금도 현장에선 휴대폰을 들고 다니지 않는다. 그 대신 내가 연기할 공간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연기하는지 체크하는 데 집중한다.
-공간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는 편인가보다.
=몸이 기억하는 게 공간이기 때문이다. 시나리오를 읽을 때는 그걸 잘 모른다. 촬영 전 대본과 감독님의 주문에 따라 캐릭터의 뼈대를 만든 뒤 나머지 20%를 현장에 와서 채우는 편이다. 그러니 현장에 계속 집중할 수밖에 없다.
-시나리오를 읽기 위해 산에 올라가는 이유는 뭔가.
=집중이 잘된다. 산에 올라가 시나리오를 다 읽고 내려와 대사를 소리 내어 말한다. 올라갈 때 대사를 말하면 숨이 차니까. 그때 기교파로 갈 것인가, 악당으로 갈 것인가 같은 톤을 정한다. 대본에서 중요한 장면을 스마트폰으로 찍은 뒤 집에서 수시로 꺼내 본다. 이 과정을 한꺼번에 하지 않고 매일 조금씩 연습한다. 연극할 때부터 그랬다. 지금은 안 하면 불안하다.
-주로 어느 산을 가나.
=북악산. 부암동으로 넘어갈 때도 있고, 종로로 넘어갈 때도 있고. 백사실계곡으로 갈 때도 있다. 코스는 그날 술을 얼마만큼 마셨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시나리오를 읽을 때는 산책 코스를 애용한다. 올라가면서 머릿속으로 시나리오와 인물을 분석하고, 캐릭터가 정리되면 몸 관리에 들어간다.
-현재 촬영하고 있는 최동훈 감독의 신작 <외계인>에서 맡은 역할은 뭔가.
=아직은 아무 얘기도 할 수 없다. 얘기하면 위약금 물어야 한다. (웃음)
-외계인 역인가.
=아니다. 외계인 얼굴은 아니잖나.
영화 2019 <강철비2: 정상회담> 2018 <기묘한 가족> 2018 <식구> 2017 <대장 김창수> 2016 <대결> 2016 <터널> 2015 <너를 사랑한 시간> 2015 <위험한 상견례2> 2014 <해적: 바다로 간 산적> 2013 <끝까지 간다> 2013 <더 파이브> 2013 <깡철이> 2013 <은밀하게 위대하게> 2012 <광해, 왕이 된 남자> 2010 <평양성> 2008 <님은 먼 곳에> 2007 <즐거운 인생> 2007 <날아라 허동구> 2006 <라디오 스타> 2006 <사생결단> 2005 <왕의 남자> 2003 <와일드 카드> 2002 <챔피언> 2002 <복수는 나의 것>
드라마 2019 <호텔 델루나> 2018 <남자친구> 2018 <미스터 션샤인> 2015 <너를 사랑한 시간> 2015 <후아유-학교 2015> 2014 <피노키오> 2009 <남자이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