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강철비2: 정상회담'은 어떻게 타자를 소비하는가
2020-08-26
글 : 송형국 (영화평론가)
멀다고 해도되갔구만
<강철비2: 정상회담>

<강철비> 1, 2편의 여러 공통점 중 눈에 띄는 하나는 남측 주인공 부인의 첫 등장 장면이다. 말할 것 없이 인물의 첫 등장은 캐릭터 소개 기능을 갖는데, 보조 인물의 그것은 주인공의 캐릭터 구축을 다지는 역할도 맡는다. 1편에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곽철우(곽도원)가 자녀들과 패스트푸드를 사먹다 대선 결과 관련 통화로 자리를 비운 사이 이혼한 아내(김지호)가 등장해 아이들을 혼낸다. “뭐야, 햄버거 먹니?” 2편에서는 늦은 밤 스낵을 집어먹으며 문서를 살펴보는 대통령(정우성) 뒤에서 부인(염정아)이 나타나 핀잔을 준다. “그 과자는 어디서 났대요?” 그러고는 황태채를 구워 대령한다. ‘먹는 것 가지고 잔소리하는 아내들’의 일관된 등장. 이 장면들을 거치며 1편의 남편은 ‘직장에서 중차대한 일을 수행하면서 가정에선 별 권한이 없는 한국 중년 남성’의 자리에 선다. 2편의 남편은 ‘밤 늦도록 국가 중대사를 놓고 고뇌하는 서민적 감성의 지도자’ 이미지를 단시간에 쌓아올린다. 극중 한반도의 명운을 좌우할 청와대 수석 또는 대통령이, 도입부에서 ‘보통의 남편’에 위치함으로써 관객의 이입도를 높인다. <강철비> 시리즈가 남측 주인공에 대한 관객의 감정 접근을 위해 ‘아내’를 사용하는 방식이다.

1편의 아내는 남편의 휴대폰에 ‘독한년’으로 저장돼 있고 2편의 아내는 배우자에게 독한 ‘등짝 스매싱’을 날린다. 여성을 혐오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니지만, 1편에서 보인 북한 여성 캐릭터들의 납작한 전형성을 떠올리면 영화가 남한의 아내 캐릭터들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도 살필 필요가 있다. 1953년 정전협정 서명에 남한의 자리는 없었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강조해야 했던 영화는 이 기본적인 역사를 모르는 인물로 대통령 부인을 설정했다. 감독 이름이 같은 건 우연이지만, <한반도>(감독 강우석, 2006)에서 역사학자 최민재(조재현)가 문화센터 강단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날도 모르는 여편네들”이라며 수강생 아주머니들을 꾸짖는 장면이 겹치는 건 우연이 아니다. 두 영화 모두 민족감정을 잔뜩 돋운 다음 언쟁과 연설로 민족주의를 강의하는 프로파간다의 성격이 짙기 때문이다. 남성 중심의 정치·군사 영화에서 프로파간다를 위해 사용되는 타자로서의 여성.

2020년대 분단 서사가 갈 길은

안보 이슈와 군사작전이 핵심인 영화에서 여성 비중이 적다고 불평하려는 게 아니다. 이 글의 문제 제기는 2020년대 전쟁·전투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타자를 취급하며 과거의 그것과 어떻게 결별해야 하는가이다. 현재 한국에서 국무회의가 열리면 여성가족부는 말할 것 없고 교육부총리, 외교부, 법무부, 국토교통부에다 (개성공단 기업 업무를 관장하는)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여성이다. <강철비2: 정상회담>에서 여성 각료라곤 한명도 보이지 않다가 여성 국무총리(김용림)가 등장해 그나마 안도했으나, 몇 차례 교과서적 대응만을 보여준 뒤 사라진다. 미국에서도 대칭적으로 여성 부통령(크리스틴 댈턴)이 나서는데, 수가 빤히 들여다보이는 교활한 캐릭터다. 일본쪽에선 극우세력인 야마토 재단의 음모를 실행하는 직원이 무려 ‘꽃뱀’이다. 한국 해경 경비함 함장에게 일본 순시함을 공격하도록 꾸미는 한편 해군본부 중령과 불륜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진다. 21세기 문명국 여성이 회사 지시를 받아 상대국 남성에게 자신의 성을 판다는 발상.

거듭 강조하지만 현실에서 해군 잠수함 안에 있지도 않을 여성이 영화에서 주도적 역할을 맡아야만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타자를 대상화하는 창작자의 잠재된 인식이 극중 비주류를, 우리가 아닌 나라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짚을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이름 모를 병사의 무모한 총격, 이어지는 단역들의 소비적 죽음, 위기 증폭에 활용되는 미·중·일의 평면적인 추악함, 계획이 틀어지자 재단 총수를 총살하는 일본의 비현실적 야만에 이르기까지. 20세기 냉전의 와중에 스크린에 넘쳐 흐른 전쟁 속 타자화와 21세기 배경의 전쟁 소재 영화는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민족주의자 남성이 창작한 상업영화에서 여성이 대상화되는 연유 또한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며, 웃자고 만든 영화에 정색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이럴수록 김보라 감독이 내놓겠다고 예고한 전쟁영화가 더욱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A=B가 되는 배제의 순간

양극화와 더불어 강화된 위험사회 속에 자국 이기주의가 횡행하는 국제사회 현실을 풍자적으로 바라보자는 영화의 제안에 공감한다. 지난해 2월 ‘하노이 노딜’과 그 틈바구니에 선 한국 정부의 애달픈 노력을 빼닮은 극 전반부 협상 결렬 과정, 후반부 잠수함 무기 운용의 디테일 등 이 영화엔 승전 구역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양우석 감독은 스무트(앵거스 맥페이든)=트럼프 대통령, 조선사(유연석)=김정은 위원장, 한경재=남한의 처지, 담배=핵무기, 방귀=대북 제재 등의 비유에서부터 주요 인물의 작명에 이르기까지 관객 누구나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장치를 심어놓고도, 자신의 대유법을 여러 인터뷰를 통해 해설까지 해주고 있다. A=B가 되는 순간 영화는 ‘일타강사 양우석의 족집게 강의’가 돼버린다. 극중 대사를 빌리자면 “남조선 주입식 교육”과 다를 바 없어진다. 정해놓은 답 외의 다른 생각은 인정받지 못한 채 입시 전쟁에서 배제되는 방식. 냉전시대와 그 상징인 ‘잠수함영화’들이 체제 이분법에 따라 타자를 배제해온 논리. 일본을 비롯한 주변국이 전쟁 책동 세력으로만 그려진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스무트 미 대통령이 주사를 맞은 다음 그들의 음흉한 계략을 실토하는 장면에 이르면 아연실색해진다. 이쯤 되면 미국은 대화 상대가 될 수 없는 악당 국가인데, 문재인 정부의 포용 정책을 이야기에 꿰어맞추려다보니 영화는 방향타 잃은 함선처럼 갈팡질팡하고 만다. 스스로 쌓아올린 민족의 자존과 대화를 필요로 하는 현실 비유가 서로 충돌하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 이후 현 정부까지 이어지고 있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배제의 논리로 설계되지 않았다. 사실상 5천만명이 부대끼는 섬과 같은 우리나라가, 유라시아로 확장된 시장에서 주변국과 역량을 나누고 함께 발휘하자는 대승적 미래계획이자 동북아 공동 번영을 모색하는 통 큰 구상이다. <강철비> 시리즈는 1편 ‘남북한 공동 핵무장론’에서 2편 ‘비핵화를 통한 평화체제 구축’으로 일면 선회한 듯 보이지만, 악의와 야만으로 가득한 강대국 사이에서 한민족의 극장 속 판타지를 구현한다는 점에서 나아간 게 없다. 우리는 북한 강경파의 반란을 다룬 <쉬리>(1999)를 보며 한국영화가 비로소 냉전시대 담론에서 벗어났다고 느낀 적이 있다. 21년 뒤 비슷한 설정의 잠수함영화를 보면서 현실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않는 감정적 민족주의로부터 벗어나기란 여전히 ‘멀다고 해도 되갔구만’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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