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한국 사회를 비추며 작품 활동을 해온 장률 감독은 일찌감치 일본 후쿠오카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찍기로 마음먹었다. 아시아 포커스 후쿠오카국제영화제에 이런저런 이유로 초청받아 그곳을 오간 지 10년이 되자 “후쿠오카가 궁금했고 관련 영화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 싶었기 때문이다. 현지 지인들에게 후쿠오카에서 영화를 찍겠다고 말하자 사람들이 언제 찍느냐고 물었다. 누구나 먼 곳에 사는 친구에게 언젠가 찾아가겠다고 기약 없는 약속을 하지만, 장률 감독은 영화로 약속하고 영화로 약속을 지켰다. <후쿠오카>는 서울에서 헌책방을 운영하는 제문(윤제문)이 손님이자 말동무인 소담(박소담)과 함께 후쿠오카를 여행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은 영화다. 제문의 대학 동아리 선배지만 연애사가 복잡하게 얽힌 탓에 28년 간 연락을 끊었던 해효(권해효)까지 등장하면서 세 사람의 기묘한 어울림이 시작된다. <경주>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이하 <군산>) 등 지방 도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삶의 면면을 섬세한 눈으로 들여다보는 장률 감독. 그와 나눈 대화를 옮긴다.
-10년 동안 다닌 후쿠오카는 어땠나.
=아주 편하다. 후쿠오카는 일본 같지 않다. 일본 같지 않다는 건, 도쿄 같지 않다는 뜻이다. 다양한 문화가 섞여 있고, 개인주의 성향도 덜하다. 예를 들면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옆자리 사람들과 말이 통하면 같이 술을 마신다. 이건 도쿄에서 상상도 못하는 일이고, 서울에서도 흔치 않은 일이다. 도시는 세련됐는데 사람들 마음은 개방적이어서 재밌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공간에서 윤동주 시인이 돌아가셨다. 윤동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후쿠오카에 윤동주 시비를 세우자는 움직임이 있지만, 반대가 심해 아직 성사되지 못하고 있다. 이건 또 뭘까 싶고 후쿠오카가 계속 궁금했다. 영화에서 해효가 술집을 운영하면서 옛사랑 순희를 기다리고, 술집에 윤동주 시인의 시를 걸어놓았다. 후쿠오카에는 이런 복합적인 분위기가 있다.
-배우 박소담이 전작 <군산>에 이어 또 출연한다. <군산>에서 일본 교포 주은을 연기하면서 부르던 일본 노래를 <후쿠오카>의 소담도 부르는데.
=군산이란 도시가 일제강점기에 유명한 항구도시였고, 군산을 거쳐 한국의 쌀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래서 <군산>의 주은과 아버지 이 사장(정진영)을 일본 교포로 설정했다. 그런 다음 ‘일본에서 내가 제일 잘 아는 도시가 어디일까’ 생각해보니 후쿠오카여서 두 캐릭터를 후쿠오카 출신으로 정했다. 실제로 후쿠오카는 한국과 가깝고, 재일교포가 많이 사는 곳이다. 두 캐릭터가 부르는 일본 노래는 아이들이 부르는 어머니에 대한 노래다. 주은의 어머니는 죽었고 소담의 어머니는 집을 나가버렸다. 두 캐릭터 모두 성장과정에 어머니란 존재가 없다. 그렇다면 두 캐릭터 모두 어머니가 그립지 않겠는가.
-<후쿠오카>의 소담은 영화 중반까지는 <군산>의 주은과 유사하지만 후반부에 가면 완전히 다른 성장 배경을 가진 것으로 그려진다. 말하자면, 장률 감독의 전작을 의식하면서 보는 관객을 배반하는 셈인데.
=이 세상은 배신의 연속이다. (웃음) 물론 한 배우가 두 영화의 인물을 각각 연기했지만 <후쿠오카>는 <군산>과 완전히 다른 영화다. 사람들은 의외로 비슷한 면이 많다. 이 사람 몸에서도 저 사람이 보이고, 저 사람 몸에서도 이 사람이 보인다.
-장률 감독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은 캐릭터에 자신의 성격이 반영되는 신선한 경험을 했다고 말한다. <후쿠오카> 역시 마찬가지인가. 배우 권해효, 윤제문, 박소담의 실제 성격이 반영됐나.
=내 영화뿐 아니라 다른 영화에도 배우의 어떤 면이 들어간다고 본다. 그게 뭐냐면, 그 사람의 냄새다. 그 사람의 냄새는 어디 갈 수가 없다. 사람마다 어떤 특징이 있다. 동작도 좋고 표정도 좋고 언어도 좋다. 그게 영화 속에서 작용한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박소담, 권해효, 윤제문 배우간의 호흡은 어땠나.
=세 배우 다 아주 좋은 배우다. 세 사람 모두 연기를 위해 이 세상에 오지 않았나 싶다. 박소담은 몸에 연기가 딱 붙어 있다. 연기 세포 같은 게 있다. 세명이 다 그렇다. 배우들은 누구와 함께 연기하는지에 따라 연기가 다를 수 있다. <후쿠오카>의 세 주연배우는 서로를 너무 좋아했다. 서로 연기하는 것도 좋아했다. 배우로서 함께 연기하는 배우에게 어떤 주문을 받고, 자신도 또 다른 연기를 주었다. 현장에서 배우들이 아주 유창하고 아름답게 서로 연기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니 너무 좋았다.
-동네 책방 주인 제문과 젊은 손님 소담이 즉흥적으로 후쿠오카 여행을 떠난다. 관객에 따라 두 캐릭터가 함께 숙소에 머문다는 설정에서부터 불안감을 느낄 수도 있는데.
=우리 삶에서도 타인을 일단 믿는 사람이 있고, 의심이 많은 사람이 있다. 남녀 둘이 함께 있으면 뭔 일이 나지 않을까 걱정하지만, 실제로 뭔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도 많다. 나이와 성별에 관계없이 서로 통하는 사람들이 있다. 통하기만 한다면 젊은이도 할아버지, 할머니와 친구가 될 수 있다. 그게 우리 삶의 아름다움이 아니겠나. 영화를 준비할 때부터 제문과 소담, 해효 세 캐릭터를 남녀 관계로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해효와 제문 사이의 28년간 묵은 감정이 어떻게 풀리는가 생각해보면, 사람을 믿는 소담 같은 캐릭터가 풀어줄 수 있지 않겠나 싶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고 소통하고자 하는 소담과 같은 사람.
-서울에서 헌책방을 운영하는 제문이 해효, 소담과 함께 후쿠오카의 헌책방을 방문한다. 배경이 서울의 정은서점과 후쿠오카의 이리에서점인데, 두 헌책방은 마치 미로 같아 보이기도 하고 때론 아늑한 비밀 공간 같아 보인다.
=책방을 아주 좋아한다. 요즘은 그렇지 않은데, 예전에는 며칠만 책방에 못 가도 불안했다. 요즘은 스마트폰이 있고 텔레비전이 있지만, 내가 성장할 때만 해도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길은 책밖에 없었다. 그리고 책방에서 서로 주고받는 눈길은 꽤 아름답다. 금품이 있는 곳에서 나누는 눈길과는 다르다. 과거에는 책방에서 사랑도 많이 이뤄졌다. 해효와 제문은 1980년대에 청년 시절을 보냈다고 설정했고, 그렇다면 책방에 대한 특별한 느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PC방 대신 책방에 와 있는 소담은 옛날 사람들의 정서와 통할 수 있다고 봤다. 지금 젊은 사람들 중에도 소담 같은 사람이 있을 것 같다.
-중국에서 책방을 자주 다니던 청년이었나.
=그땐 나만 그런 게 아니고 세상에 호기심이 있는 청년들은 다 책방에 다녔다. 중국에서 도서관은 좀 달랐다. 출입 조건이 까다로웠다. 직장도 따지고 누구나 들어갈 수는 없는 공간이었다. 도서관에 일종의 권위가 있었다. 90년대 후반부터 차차 좋아져서 지금은 누구나 갈 수 있다. 반면 서점은 당시에도 누구든 막지 않았다.
-차기작은 무엇인가.
=<야나가와>를 다 찍어놓고 후반작업을 못하고 있다. 중국 배우들을 데리고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촬영했다. 색보정은 베이징에서 하고 믹싱은 타이완에서 하는데, 코로나19 때문에 내가 그 어디도 못 가고 있다. 주제는 역시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