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가 ‘진짜 마지막’을 부르는 방식
2020-09-02
글 : 김철홍 (평론가)
마술의 매혹으로부터 이야기 구하기

인남(황정민)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 딸이 걱정이다. 하지만 곧 딸을 잠시 떠나야 한다. 인남은 딸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지만, 정작 걱정이 많은 건 자신이다. 그래서 인남은 아이에게 자신의 마술을 선보이고, 딸 유민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마술사가 마술을 하고 관객이 그것에 반응하는 이 장면에서 기시감이 느껴지는 건, 이 영화의 특정 장면을 보고 반응하고야 마는 관객의 모습이 유민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진짜 마술은 바로 영화를 본 관객 중 백이면 백 언급하게 되는 ‘스톱모션’ 기법인데, 그런 의미에서 레이(이정재) 역시 인남과 같은 마술사다.

두 마술사- 조르주 멜리에스 그리고…

스톱모션을 마술로, 레이를 마술사로 느끼게 되는 것의 원인이, 물론 먼 옛날 <달세계 여행>(1902)을 통해 스톱모션을 선보인 조르주 멜리에스가 마술사였던 것 때문은 아닐 것이다. 대신 스톱모션과 인남의 마술의 공통점에서 이유를 찾아볼 수 있는데, 그건 둘 다 무언가 사라지게 하면서 관객을 매혹시킨다는 것이다. 스톱, 그리고 모션하는 사이에 생길 수밖에 없는 프레임의 공백. 사라져버렸기에 다른 어떤 가능성도 허락되지 않는 무(無)의 순간. 아니 프레임 자체가 사라졌으므로 그곳에 없음이 있다는 것조차 잊게 되는 무자비한 마술. 영화에 마술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스톱모션이야말로 그 어떤 마술보다 강력하고 위험하다. 그런데 진짜 무서운 것은 이것이 그만큼 너무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인남은 이 무시무시한 마술로부터 모두를 구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는 왠지 믿음직스럽지 않다. 인남은 처음부터 액션이 하기 싫다는 듯 영화에 등장한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인남은 고레에다(도요하라 고스케)의 뒤에서 목을 조르며 등장하는데 이때 인남이 관객에게 처음 보여주는 표정은 괴로움이다. 그런 측면에서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이하 <다만악>)의 오프닝 시퀀스는 조금 이상하다. 한 비밀 조직의 전직 요원의 임무수행 모습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이 장면은, 비슷한 설정을 가진 영화들의 대다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오프닝이다. 주인공의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여주며 앞으로 영화에 나올 볼거리에 대한 기대감을 심어주는 기능적인 장면들. 이를테면 ‘매력 발산 시간’인 셈이다.

그러나 <다만악>의 오프닝에서 우리는 인남의 매력을 느낄 수 없다. 오히려 영화는 적극적으로 인남의 매력을 숨긴다. 고레에다가 이상한 낌새를 느껴 경호원을 부를 때, 영화가 보여주는 건 어느새 시체가 된 경호원들이다. 분명 혼자서 여러명을 ‘어느새’ 처리하는 모습은 액션영화의 주인공으로서 꽤나 매력적이었을 것이나, 영화는 이를 생략하고 대신 일을 마친 후 지쳐버린 인남을 보여준다. 이때 인남이 작업복으로 위장하고 있는 모습 또한 가능하면 액션을 피하려는 인남의 의도가 느껴져 그의 매력을 떨어뜨린다. 인남의 복장은 영화 중간에 또 한번 언급된다. 방콕에서 인남을 조력하는 영배(이서환)는 본격적으로 작전을 실행하려는 인남에게 덥지 않냐고 묻는다. 이때 인남은 뜨거운 방콕의 날씨에 맞지 않게 검은 정장을 입고 있는데, 영배가 인남에게 이것을 묻기 전까지 우리가 인남의 복장에 의문을 갖지 않은 것은 검은 정장이 ‘이런 영화’의 흔한 작업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작업복은 몸을 쓰기에 그다지 적합해 보이지도 않고, 인남 역시 과격하게 액션하는 타입이 아니다. 레이를 만나기 전까지의 인남의 액션은 그의 복장에 따라 경제적이기 그지없다. 상대방을 먼저 손쉬운 방법으로 제압한 뒤, 날카로운 도구를 사용해 원하는 것을 얻는 식이다.

반면 레이의 경우는 그 반대다. ‘이렇게까지 하는 것’ 자체가 액션의 목표인 그는, 상대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과정을 즐긴다. 그런 그의 복장은 날씨와 액션에 어울리고, 무엇보다 ‘누가 봐도’ 매력적이다. <다만악>은 이 영화를 보는 모두가 ‘악’인 레이를 매력적으로 느끼게 하도록 자꾸만 레이와 인남을 대비시킨다. 그 의도가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때는 우연히 현지 조직의 아지트에 들어가게 된 레이가 혼자서 일당을 처리하는 장면이다. 영화의 서사와 아무 상관이 없는 이 시퀀스는 오로지 레이가 얼마나 매력적인 마술사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매력 발산 시간에 불과하다. 그곳에서 자신의 액션을 마음껏 선보이는 레이. 바로 이때 처음으로 스톱모션이 등장하고, 그렇게 레이는 무섭지만 동시에 매력적인 인물이 된다.

영화를 진정 위협하는 것

그런데 인남을 진정으로 위협하는 것은 레이의 강함일까 아니면 매력일까. 인남의 사연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자신의 마술만을 생각하는 자가 영화를 점령해오고 있다. 그는 자신의 마술로 관객이 인남의 이야기를 잊게끔 매혹한다. 그러니까 딸을 구해야 한다는 자신의 서사가 스펙터클에 의해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것이야말로 인남과 이 영화에 진정한 위기는 아닐까. “너와 연관된 인간들을 모두 죽일 거야”라는 레이의 말이 섬뜩하게 느껴지는 것도 이것이 인남의 서사를 아는 사람이 없도록 하겠다는 말처럼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인남에겐 어떤 계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유민은 계속해서 아무 말이 없다. 의사도 유민으로부터 아무 문제를 발견하지 못한다. 도대체 유민이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이 유민을 이렇게 만든 것일까. 그것이 누구보다 신경 쓰이는 인남은 유민에게 자신의 마술을 보여주고, 마침내 마술이 관객을 반응하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에만 집중하느라 관객을 고려하지 않는 액션을 해왔던 인남은 이야기를 지키기 위해 레이가 몰고 오는 차에 몸을 던지고, 이때 여기에 슬로모션이라는 마술이 펼쳐진다. 어쩌면 유민이 아무 말을 하지 못했던 것은 인남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영화의 소행일 수도, 레이를 너무 매력적으로 그린 영화의 잘못에 대한 반성일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유민이 하지 않은 것은 말이 아니라, 대사였던 것이다.

인남의 결단에도 불구하고, 레이는 포기하지 않는다. 인남이 깨어나자 똑같이 정신을 차리는 레이는 마치 이게 어딘가 적혀 있기 때문에 꼭 해야만 하는 것처럼 인남의 배를 가른다. 이제 모든 이유를 기억하지 못하는 레이는 아무 개연성도 따지지 않는 괴물이 된 것이다. 그는 멈추지 않을 것 같다. 아니 멈추지 못할 것 같다. 이 멈추지 못하는 마술의 ‘진짜 마지막’은 아마 모든 이야기의 소멸일 것이다. 레이가 존재하는 한그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느낀 인남은 그래서 마술사가 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신기하고 매력적인 마술을 선보인다. 그건 바로 마술사 자신을 사라지게 하는 마술. 인남은 수류탄을 터트려 자신과 레이를 사라지게 하고, 그렇게 이야기를 구해낸다.

"금지된 마법을 하는 마술사와 부모 마술사의 희생, 그리고 살아남은 한 아이. <해리 포터> 시리즈를 떠올리게 하는 이 영화는,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난 마술사들의 사진을 보여준다. 이 사진 속의 인물들은 마법 세계의 그것처럼 움직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여기 마술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언제 또 이 세계가 위험에 빠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해리는 액션이라는 마술과 이야기의 균형을 지켜낼 수 있을까. 잿더미에서 이야기는 그렇게 다시 한 번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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