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아의 행보는 그가 선택할 수 있었던 안전한 다른 길을 떠올려볼 때보다 흥미로워진다. 그는 사람들이 신민아 하면 흔히 떠올리는 러블리한 캐릭터가 나올 법한 작품, 예컨대 드라마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 같은 로맨틱 코미디를 생각만큼 많이 하지 않았다. 데뷔작부터가 목검을 휘두르고 하늘을 날아다니던 <화산고>였고 드라마 <때려>에서 여자 복서, 다크한 복수극 <마왕>에서 사이코메트리 능력을 가진 초능력자를 연기했으며 <고고70>에서는 음란해 보여도 상관없다는 애티튜드로 광기에 가까운 춤을 췄다.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경주> 같은 독립영화 역시 그의 필모그래피를 설명하는 중요한 퍼즐이다. 최근 드라마 <보좌관>에서는 단발머리에 어두운 슈트를 입고 총선에 도전하는 여성 정치인을 연기했다. 그는 관성적으로 갈 법한 순간에도 브레이크를 걸고, 꼿꼿이 다른 길을 개척해왔다. 이쯤 되면 되레 궁금해진다. 왜 신민아가 러블리함의 대명사로 불렸던 거지?
실제 연기한 캐릭터들과 무관하게 그가 요구받는 이미지가 투영된 결과라는 가설은 꽤 가능성이 높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배우로서 안정감이 생긴 신민아는 이따금 로맨스물의 사랑스러운 여성으로 분할 때도 캐릭터에 완벽히 어울리는 연기를 했다. 사랑스러운 표정부터 애인의 내면을 중요시하는 심성까지 연애 판타지를 완벽히 실현하던 <야수와 미녀>, 소고기를 사달라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조르던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 같은 작품을 신민아 최고의 모습으로 꼽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 역시 배우의 훌륭한 재능과 연기로 기억되어야 마땅하지만, 원래 사람이 사랑스럽기 때문에 이미지 캐스팅이 잘됐다는 식으로 넘겨짚는 경우가 많았다. 장르부터 소재, 캐릭터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뻔한 선택을 하지 않던 신민아는 2000년대 초반 부상한 80년대생 배우 중 가장 재평가가 시급한 이름이다.
여성 다이빙 선수들의 뒤틀린 욕망을 보여주는 <디바>는 신민아가 처음 도전하는 미스터리 스릴러지만, 그에게 꽤 개연성 있는 선택이다. 다이빙의 추락을 서늘한 장르적 색깔로 치환하고, 여성의 대립 혹은 연대라고 단순히 구분 지을 수 없는 복잡다단한 심리에 집중한 <디바>는 남초 집단인 한국영화계에 드문 기획이다. 신민아가 연기하는 이영은 친구 수진(이유영)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주변에서 과하다고 눈치를 줄 만큼 그를 챙기지만 정작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기미가 보이면 얼굴에서 웃음을 지운다. 커버 스타 지면 촬영차 <씨네21> 스튜디오를 찾은 신민아는 2002년 당시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을 벽에서 발견하고 환한 미소로 당시를 추억했다. “많은 분들이 나의 색다른 모습을 볼 때마다 어떤 계기가 있었을까 생각하지만, 나는 늘 똑같았다. 영화를 대하는 태도나, 너무 열심히 한다는 것까지. 변했다 싶다가도 막상 옛날 작품을 다시 보면 그 안의 내가 지금과 다르지 않다.” <디바>를 위해 혹독한 다이빙 연습을 감내한 신민아는 신인 시절에도 6시간 동안 와이어에 매달려 있어도 씩씩한 배우였고(<화산고>), 2002년 인터뷰에서처럼 여전히 무례함과 반칙을 싫어한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기에 같은 곳에 머물지 않는 신민아를 만났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2014) 이후 오랜만에 선택한 영화다. 그만큼 <디바>를 선택한 데에는 선명한 이유가 있었을 듯한데.
=무엇보다 시나리오가 되게 재밌었다. 스릴러 장르에, 다이빙 소재에, 이런 뒤틀린 감정을 다루는 시나리오를 어떻게 영화로 표현할 수 있을까. 배우로선 시나리오가 주는 강렬함을 연기로 표현해보고 싶은 호기심과 기대감이 있었다. 그동안 내가 보여주지 못했던, 다른 결의 연기를 기대하기도 했고.
-다이빙 같은 소재도 중요하지만,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의 결을 살리면서 이영의 심리를 잘 표현해내는 게 관건인 시나리오였다. 글을 읽으면서 캐릭터가 어떻게 다가왔나. 극단적으로 치닫는 그의 심리가 모두 이해가 가던가.
=감독님에게 이영의 다이빙 실력이 어느 정도냐고 물어보니, ‘넘사벽’이라는 표현을 쓰시더라. 남들보다 월등한 실력을 지닌 이영이 어떤 사고 이후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다 욕망을 드러내고 나중엔 광기까지 내보인다. 최고의 자리에 있으면 마냥 행복하기만 하고 아무 걱정이 없겠지 싶지만, 상황이 실력을 좌지우지하는 환경이 너무 숨가쁘고 1등을 뺏기지 않기 위해 중압감을 느끼는 이영의 감정을 생각하면 오히려 이입이 됐다. 꼭 다이빙 같은 운동이 아니더라도 내가 원하는 목표에 가까워지지 않으면 자신을 채찍질하고, 막상 올라가면 불안해지는 마음이 깊든 얕든 누구에게나 다 있다. 안타깝기도 하고, 이런 감정을 느끼는 이영이 인간적이기도 했다. 내가 생각해도 이영이 처한 상황이 그를 미치게 할 것 같았다. 다만 시나리오에서 내가 느낀 것을 연기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다 보니 다이버는 태생적으로 불안이 서릴 수밖에 없는 직업이 아닐까 생각했다. 더불어 배우이기 때문에 더 공감할 수 있었던 이영의 감정도 있었을 것 같고.
=다이빙은 멘탈과 컨디션을 조절하지 못하면 다칠 수 있는 거친 스포츠다. 휙 하고 금방 지나가는 찰나처럼 보여도 아주 정확한 동작으로 10m 높이에서 뛰어내려야 하기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이영과 수진 등 <디바>의 캐릭터들 역시 묘하게 다이빙과 닮았다. 배우도 연기할 때 멘탈이 가장 중요하다. 모든 사람이 다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내가 이 연기를 해내야지만 다음 컷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압박을 배우 역시 사람이다 보니 느끼게 된다. 예산이 큰 영화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가 결과를 좌지우지한다. 집중이 안된다고 생각하면 계속 연기가 꼬이고 식은땀도 흐른다. 우리는 표현을 안 하지만 그런 책임감을 계속 갖고 있다. 경력이 쌓이면서 그런 부담에 익숙해진 듯하지만 불안은 불현듯 또 찾아온다. 이 과정 역시 또 하나의 공부다. 계속 느끼고 안주하지 않아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운동선수처럼 점수를 매기는 직업은 아니지만 배우로서 공감할 수 있는 비슷한 면이 있다.
-대중문화에서는 여자와 여자가 등장하고 그들 사이에 ‘질투’라고 할 만한 감정이 엿보이면 ‘캣파이트’ 같은 소재로 소비하는 경향이 있다. <디바>는 실제 내용이 전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구도로 오해받을 수 있다는 걱정은 안 해봤나.
=우리는 오히려 반대로 생각했는데. (웃음) 퀴어로 보일 수 있지 않겠냐는 말도 나눴다. 남자 캐릭터들이 나온다고 ‘남자의 적은 남자’라고 하지는 않지 않나. 다이빙은 남자도 여자도 한다. <디바>는 심플하게 두 여성 캐릭터에 집중하는 영화다. 촬영장에서 ‘난 이영이었던 적이 있었다’, ‘수진이었던 적이 있었다’는 얘기를 나눴다. 등수의 문제가 아니라 친구끼리의 미묘한 감정이 있다. 관객이 두 캐릭터 모두에게 감정이입했으면 좋겠다.
-신민아 하면 러블리하고 사랑스럽다는 이미지가 있는데, 오히려 그런 배우들이 얼굴에서 웃음을 지울 때 드라마틱한 효과가 생긴다. <디바>에서 그 장기를 발휘할 거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내가 그렇게 러블리한 캐릭터를 많이 하지는 않았는데 사람들이 내 이미지를 그렇게 기억하는 건 작품에서 웃는 장면이 많아서였던 것같다. 사실 <디바>가 엄청난 변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해보지 않았던 결의 캐릭터가 욕심났지만 전혀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은 아니다. 드라마 <보좌관>에서도 러블리한 캐릭터는 아니지 않나. 그런데 먼저 <디바>를 본 관계자들이 하나같이 신민아의 새로운 얼굴을 봤다고 하더라. (웃음) 다들 그렇게 얘기해주시니 나 역시 결과물이 어떨지 기대가 된다.
-데뷔작 <화산고> 때부터 와이어 액션 연기를 했고, <무림여대생> 같은 필모그래피도 있어 왠지 몸을 잘 쓴다는 인상이 있다. 어머니가 농구를 하셨다든지, 6살 때부터 스케이트를 탔다고 하는 얘기도 들었다. 학창시절에 별다른 노력 없이도 체력장 특급 받는 친구들처럼 왠지 몸 쓰는걸 타고났을 것 같다.
=사실 잘했다. (웃음) 음, 다른 사람보다는 빨리 배우지 않았을까. 다이빙 훈련에 들어가기 전에는 기초체력과 스트레칭, 다이빙 시뮬레이션 등을 하는 지상훈련을 오래 받으면서 선수 같은 근육을 만들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 다이빙이 위로만 3, 5, 10m 있는 게 아니라 수심도 5m까지다. 물에 대한 공포가 있으면 시작하기 어렵다. 다행히 물을 좋아해서 물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다만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것에 대한 공포에 익숙해질 수 있게 노력했다. 그런데 다이빙 연기를 한다는 건 조금 다른 얘기다. 원하는 동작을 그럴싸하게 해내는 것이 필요하다보니 그런 걸 많이 따라하려고 했다. 그런데 정말 쉽지 않다. 다이빙은 정말 어렵다.
-운동선수처럼 보여야 하고, 민낯으로 수영복을 입고 다이빙하는 과정이 모두 영화에 담긴다. 김윤미 영화사 올 대표도 여자배우가 이런 연기를 할 때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에 더 박수를 쳐줘야 한다고 말하더라.
=그냥 수영복을 입는 것도 아니라 물살을 맞으며 연기를 해야 한다. 항상 걱정됐던 게 수영복이 돌아갈까봐…. (웃음) 훈련하면서 이 상황에 점점 더 익숙해지려고 하고, 촬영에 들어가고부터는 이 신을 잘해내야 한다는 생각에 점점 자연스럽게 무뎌졌다. 다행히 제작자, 촬영감독, 감독이 모두 여성이었고 현장에도 여성들이 많았다. 남녀를 구분하고 싶지는 않지만 확실히 심리적인 안정감이 있었다.
-성별을 구분해서 얘기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지만, 여성감독과 여성 촬영감독, 여성 제작자가 함께 만들어가는 작품은 정말 흔치 않다. 여성배우들이 수영복을 입고 나오는 작품에서 카메라가 별 이유 없이 여성의 몸을 대상화해 관음적으로 찍지 않는 것도 필요하다.
=연출부도 여성들이었다. 다이빙 연습할 때도 배우들과 같이 뛰면서 분위기를 만들어줬다. 체력적으로 굉장히 힘든 영화였지만 그럼에도 내 편이 형성되어 있는 것 같은, 엄청난 의지가 됐다. 감정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많이 힘들었지만 무사히 <디바>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여성들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개봉을 앞둔 시점까지도 나는 배우, 그들은 스탭이라고 구분되지 않는다. 우리는 ‘팀’으로서 함께 힘을 합쳐 영화를 만들었다.
-<디바>에 온전히 집중하며 보낸 2018년을 돌이켜보면 어떤가. 이후 촬영한 드라마 <보좌관>에서 신민아의 새로운 모습을 봤다는 반응이 많았다. 이 프로젝트를 통과하면서 배우에게 생긴 변화를 생각해보게 되는데.
=사실 여자배우들에게는 언제나 갈증이 있다. 표현하고 싶은데 그런 기회가 귀하다 보니 작품을 만나는 것 자체가 무척 감사하다. 어떤 작품이든 열심히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계속 시동을 걸고 있었다. 그때 <디바> 시나리오를 만났다. 항상 같은 마음으로 작품에 임하기 때문에 <디바>를 통해 내가 어떻게 바뀌었고, <보좌관> 때 무엇이 달라졌는지 자세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보았다면 내가 모르는 어떤 부분을 도움 받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2002년 <씨네21>이 선정한 7인의 라이징 스타 특집 기사가 요즘도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더라. 당시 권상우, 신민아, 박해일, 조승우, 공효진, 류승범, 임은경이 표지를 장식했다. 당시 커버 촬영 현장이 어땠는지 기억하나.
=나도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그 사진을 봤다. 너무 재밌다. 얼마나 풋풋한지… 병아리처럼 보이려고 옷도 다 노랑색으로 입은 거다. (웃음) 아마 그때도 이 공간(<씨네21> 스튜디오)이었던 거 같은데, 너무 많은 사람이 모여 있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공)효진 언니랑은 모델 시절부터 알고 지냈고 <화산고>도 함께해서 친했기 때문에 주로 언니랑 말을 많이 했다. 그때 같이 화보를 찍은 배우들이 지금도 활동하는 게 정말 대단하다. 내가 함께한 인터뷰인데도 괜히 나까지 뿌듯하다.
-영화 잡지가 해야 하는 역할 중 하나가 좋은 배우의 시작부터 함께해 그 성장 과정을 성실히 기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잡지 모델로 경력을 시작한 만큼 잡지에 대해 남다른 감정이 있을 것 같은데, 배우 신민아에게 <씨네21>은 어떤 의미인가.
=<화산고> 때만 해도 영화지가 참 많아서 4~5개씩 촬영했다. <씨네21>뿐만 아니라 <키노>에서도 찍고…. 이런 얘기 하니까 너무 옛날 사람 같다. (웃음) 그래서 <디바> 개봉할 때 <씨네21> 커버를 촬영한다고 해서 너무 반가웠다. 난 아직도 인터넷에서 <씨네21> 커버를 보면서 이런 영화가 개봉하는구나, 라고 정보를 얻는다. 배우에게 <씨네21>은 영화를 선보일 수 있는 기회다. 그래서 이 잡지가 아직 남아 있는 게 배우로서 너무나 고맙다. 오래오래 계속 함께했으면 좋겠다.
-올 상반기에는 배우 김해숙과 <휴가>를 촬영했다.
=저승에서 3일의 휴가를 받아 이승으로 내려온 엄마가 딸을 만나러 간다. 내가 연기한 딸은 원래 UCLA 수학과 교수였는데 엄마가 돌아가신 후 휴직계를 낸다. 딸은 엄마가 일했던 식당에서 생전 엄마의 모습을 계속 느끼고 싶어 하고, 엄마는 딸이 교수를 계속 하고 있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식당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하고, 딸은 엄마를 볼 수 없다. 그런 슬픈 이야기를 담은 판타지 드라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