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쟁이들> 개봉 이후 <죽지않는 인간들의 밤>까지 8년 동안 어떻게 지냈나. 전작들을 즐겁게 봤던 팬들이 여전히 잊지 않고 반가움을 보낸다.
=공백기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사실 조금 괴롭다. 영화 한편 들어가기가 쉬운 게 아니니까. 3~4개 정도 되는 프로젝트를 굴리다가 모두 엎어졌다. 아무래도 내게 들어오는 제안이 모두 개성 강한 컨셉의 이야기들이라 만들어지기가 쉽지 않은 면이 있다.<죽지않는 인간들의 밤>까지 벌써 4편이나 B급 스타일의 장르영화를 했는데, 사실 한국 영화산업에서 이런 역할이 더이상 내 몫은 아니라고 느낀다. 경력이나 나이 면에서 기성감독이 되어버렸잖나. 젊은 신인들, 재기발랄한 창작자들이 나와서 판을 뒤엎을 이상한 영화들을 보여줬음 한다. 2000년대 초중반에 등장했던 막나가는 한국영화들이 없다는 게 안타까운 요즘이다.
-하루 21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음주가무와 운동을 즐기고, 불륜도 일삼는 남편이 ‘언브레이커블’ 이라는 외계 존재로 등장한다.
=원래 장항준 감독의 시나리오에서는 정말 죽지 않는 인간이 몇천만명 중 한명의 확률로 있다는 설정이었는데 내가 SF적 설정을 더했다. 소희의 남편 만길은 영화적으로는 죽지 않는 언브레이커블이지만 소희, 새라, 양선 세 여성의 시각에서는 간단히 말해 ‘배드 가이’다. 이 영화를 만들 때 <델마와 루이스> 생각을 많이 했다. 그 영화에 나오는 남자들, 정말 하나같이 다 나쁜 놈들이잖나. (웃음)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자란 편인데, 고등학생 때 처음 <델마와 루이스>를 보고 그 영화 속 남자들을 다 응징하고 싶다는 생각을했다. <델마와 루이스>가 진지한 드라마로 여성 서사를 풀어냈다면, 내 영화는 그보다는 좀더 가볍게 희화화한 셈이다. 만길의 악행을 묘사할 때도 일부러 너무 폭력적인 이미지는 없도록 조절했다. 원래도 그런 걸 별로 안 좋아한다.
-닥터 장의 탐정사무소를 보면 남편이 외계인인 게 진짜 문제는 아닌 듯하다. 배신하고, 증오하고, 복수하는 부부들의 드라마가 끊이지 않는 것이 인간 세상이구나 싶어지는 대목이 있다. 이 지점에서 여자들이 상처만 받는 대신 차라리 죽이는 걸 택한다는 설정이 핵심적이다.
=못된 놈들을 향한 세 여자들의 복수극이 나는 왜 그렇게 좋았을까? 자라면서 보아온 어머니가 강인한 모습이어서 그랬을 거다. ‘여자라고 못할 게 어디 있어.’ 어머니가 항상 심어준 생각이다. <차우>에서도 정유미 배우가 연기한 캐릭터를 구축할 때 동물학자 제인 구달을 모델로 삼았다. 반면에 내가 살아온 세상에서 남자들은 자주 바보같기만 하다. (웃음)
-<시실리 2km>에 귀신이, <점쟁이들>에 무속신앙이 등장한 것처럼 심령적 세계와 접속하곤 했는데 이번엔 지구 밖 존재로 관심을 돌린 계기가있나. SF적 취향의 출처도 궁금한데.
=딘 패리소 감독의 <갤럭시 퀘스트>(1999). 엄청 웃긴 영화다! 하지만고백하자면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레퍼런스를 찾을 수 없었다. 약간의도한 측면도 있긴 한데, 하나의 시나리오를 갖고 구성원들이 저마다 딴생각하고 있는 상황을 즐기는 편이다.
-현장에서 배우들에게 세세한 디렉션을 주지 않고 즉흥적인 설정을 더하는 스타일이다. 이번 영화도 배우들을 상황 속에 던져놓고 앙상블이 저절로 피어오를 때까지 기다렸나.
=시나리오는 시나리오일 뿐, 나는 현장에서 비로소 캐치되는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번 현장에서도 배우들이 일단 서로 합을 맞춰가게 기다렸다. 당연히 초반엔 아수라장이었다. 뒤로 빠져서 풀숏으로 지켜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배우들 스스로 캐릭터가 되면서 오묘하게 질서가 맞아떨어진다. 그럴 땐 영화보단 차라리 연극 같다. 내가 디렉션을 많이 주지 않으니까 불편하고 답답해하던 배우들도 차츰 자기 자리를 잡아간다. <차우> 찍을 때도 이런 현장은 처음 본다며 당혹스러워하던 윤제문, 장항선 배우가 나중엔 그 누구보다 즐거워했다.
-과거의 영화 현장에 비해 촬영시간이 촉박해서 더이상 고수하기 쉽지않은 방식일 텐데. 밤 장면이 많아 더욱 힘든 현장이었을 것 같다.
=45회 정도로 마무리한 것 같은데, 그마저도 해가 완전히 저문 이후인 밤 9~10시부터 다음날 해 뜨기 전까지 촬영하는 스케줄이라 전반적으로 아주 급박했다. 촬영 종료 시간이 다가오면 급한 마음에아무 생각이 안 나기도 했다. 편집까지 끝내고 다 같이 저녁을 먹는데 김성오 배우가, 자기가 여태 해본 영화 중에서 가장 힘들었다고 하더라. 땅에 파묻히는 장면 같은 건 배우를 많이 고생시켰다.
-<씨네21> 커버 스타 인터뷰에서 서영희 배우가 “감독님은 현장에서도 배우나 스탭들이 지나가면서 하는 말과 행동을 보며 혼자 키득키득 웃으신다. 일상에 숨어 있는 희비극의 포인트를 잘 찾아내는 예리한 감성이 있다”고 말한 지점이 인상적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관찰하는 걸 굉장히 좋아했다. 취미가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하는 거다. 그러면서 하나의 캐리커처를 만들어보려고 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다보면 이 세상에 얼마나 희한한 캐릭터들이 많은지 누구나 알게 된다. 배우를 볼 때도 그 사람만의 약점과 강점, 숨기고 있는 모습과 본모습 등을 들춰내고 싶은 마음이 든다.
-황당한 상황 와중에 인물들이 저마다 진심으로 최선을 다한다는 점이 신정원 영화 속 짠한 웃음의 출처다.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이 이런 걸까 싶다.
=데뷔작을 만들 때부터 나는 내 영화가 코미디라 생각하지 않았다. 배우들, 스탭들에게도 정극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게 아니면 그냥 개그 프로그램 보면 되지 뭐하러 영화를 보겠나. 이상하고 뒤틀려 있지만 우리의 현실이라고 생각해야 공감이 간다. 물론 짐 캐리 같은 불세출의 개인기를 지닌 스타가 있다면 슬랩스틱으로 밀어붙여도 되겠지만…. 배우들을 극한 상황으로 유도하는 이유도 그 사람의 연기가 아닌 진짜를 보고 싶어서 그런 것 같다.
-전작 <점쟁이들>부터 주류영화의 톤 앤드 매너를 조금씩 흡수하는 느낌도 든다. 마니아층과 일반 관객 사이의 접점을 고려하는 셈일까.
=오히려 지금부터는 날을 더 세워보려고 한다. 관객도 그런 걸 원한다. <곡성> 같은 영화도 흥행 공식으로 따지면 말이 안되는 영화니까. 10년 전부터 준비하던 좀비영화가 있었는데 한국 사람들은 좀비장르를 절대 안 본다고 하던 시절을 거쳐 지금은 <부산행> <반도>가 잘됐다.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다.